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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04화 (304/463)

304화

“왜? 규야, 소교주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

일행의 시선이 여규에게 쏠렸다.

여규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말을 더듬었다.

“폐하가… 소교주를 호명하지 않았어…!”

마른 비가 벌인 일이 충격적이어서 잊고 있었는데, 주원장은 천진운을 부르지 않았다.

황성 침공에 가담한 사영만 추켜세우고, 막상 마교는 논공행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천진운과 마교의 타격대가 올린 전공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영, 그 시커먼 살수 놈을 황성 침공에 끌어들인 게 소교주 아냐? 그게 북벌을 성공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잖아. 심지어 무칼리를 묶어둔 것도 소교주고.”

철중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른 비 못지않은 공을 세운 천진운이 포상에서 제외됐다?

그게 뜻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폐하가 설마… 소교주를 버리려는 건가?”

여규가 중얼거리자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진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에서 여규의 추측이 맞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효용가치가 다한 사냥개를 처분하는 것.

쓸 만한 사냥개를 여러 마리 보유한 사냥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버려진 게 인간이라는 점과, 그가 호랑이보다도 날카로운 이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물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빠드득!

천진운이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주원장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곧바로 버림받았다면 누구라도 분노할 수밖에 없으리라.

철중구는 천진운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렸다.

“진짜냐? 와… 나 같으면 열이 뻗쳐서 돌아버렸을 거야. 그나저나 소교주의 뒤통수를 치다니. 황제가 된 이상, 마교 따윈 겁나지 않는다는 건가? 하긴 소교주의 세력은 저기 있는 게 전부지. 화가 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비정한 세계였다.

마른 비와 천진운이 무릎을 꿇지 않았을 때, 둘을 보는 주원장의 눈빛이 달랐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주원장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천진운이 부복하지 않았다거나 효용가치가 다 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닌 듯했다.

한동안 고민한 여규는 진실에 가까운 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종교…! 백련교의 뿌리가 마교에서 발원했다는 소문이 있어. 폐하는 백련교에 들어가서 세력을 키웠고. 한데 백련교의 교리는 위정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절대 달가운 내용이 아니야. 그것 때문일 거야. 폐하는 자신을 키운 백련교와 손을 끊으려는 거고, 소교주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그 일환이겠지.”

만인지상(萬人之上).

주원장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쥔 절대자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종교와 엮이는 순간 제왕적 권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실체도 불분명한 신은 둘째치더라도, 교도들이 열광적으로 떠받드는 교주 때문에 권력이 양분되는 결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폐하가 소명왕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한림아가 표금산에게 살해당한 날, 주원장을 경계하라고 했던 황일의 우려가 맞았다.

주원장은 처음 천하를 꿈꾸었을 때부터 황제가 되면 백련교와의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백련교는 야망을 실현시켜줄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주원장이 백련교의 뿌리인 마교와 관계를 이어 나갈 리 없었다.

더군다나 마교에는 ‘그자’가 있었고, 천진운을 돕는 순간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황제가 되어 마침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 주원장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마교와 엮일 생각이 없었다.

“아마… 소교주가 폐하를 도운 건 거래 때문이었을 거야.”

주원장이 황제가 되는 걸 도우면 마교의 반란분자들을 진압하는 데 힘을 빌려주겠다는 거래.

거기까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건 궁극적으로 ‘그’와의 한판 승부를 염두에 둔 협상이었다.

하지만 주원장과 천진운 외의 인물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여규로선 주원장이 필요한 걸 모두 얻고 나서 천진운을 배신했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었다.

머리를 제법 굴릴 줄 아는 자들은 상황을 짐작하고 천진운과 주원장을 번갈아 봤다.

“…….”

천진운은 무서운 얼굴로 주원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통탄스럽게도 천하의 마교 소교주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지, 무의식적인지는 몰라도, 그는 전력으로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숭천문 일대를 뒤덮었다.

좌우에 포진한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을 일거에 찍어 누르는 마기(魔氣).

천하 최강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이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어?! 이건… 진짜 엄청난데?”

마른 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천진운이 강할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의 마기와 핏빛의 눈동자는 천 년 전, 중원 무림을 초토화시켰던 천마의 상징이었다.

세상을 뒤엎어 버릴 것 같은 기운에 무림인들은 침을 삼키며 죽은 듯이 침묵했다.

하지만 저 멀리 있는 군부의 인물들은 달랐다.

“허허, 서 형. 고생 많았소. 한 잔 받으시구려.”

주원장은 서달과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마치 천진운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그건 서달도, 상우춘도, 그 아래 모인 군부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술맛이 기가 막히구먼!”

“그러게. 결국 대도를 밟는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들이 이 엄청난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저건 주원장의 명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행동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주원장…! 이 천진운을…… 무시하겠단 말인가!”

의도적인 무시.

주원장은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지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건 매우 효과적이었다.

중원 무림인 중 마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것으로 주원장은 찜찜한 과거를 털어내는 동시에 정파와 사파의 지지를 얻게 될 것이었다.

“흐… 흐흐. 멋지게 당했군.”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심장이 타버릴 것 같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혼자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터.

하지만 지금 천진운은 자신을 믿고 따라온 수백 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다.

‘설령 이들 모두를 데리고 덤빈다 해도…….’

그래도 이길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군부의 인물들은 천 명에 불과했지만 전원이 장군급의 강자들이었고, 서달과 상우춘도 있었다.

아니, 저기까지 가지도 못할 것이다.

살기를 드러내는 순간, 좌우에 있는 무림인들이 막아설 테니까.

실제로 그들은 바짝 긴장한 채 무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소교주님.”

두툼한 손이 천진운의 팔에 얹어졌다.

분노로 떠는 소교주를 제지한 건 탄탄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궈, 권마…!”

노인을 알아본 무림인들이 침음을 삼켰다.

마교 칠대 장로이자 천하제일권을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자.

그는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소교주에 못지않은 강자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른 비도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마교…! 왜 마교를 두려워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저 할아버지도 엄청나!”

마른 비는 야투에서 권마를 보지 못했다.

그는 야전단을 압박하기 위해 소교주와 다른 경로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마주한 권마는 마른 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달라! 환마와도, 비마와도!’

각각 환술과 경공으로 일가를 이룬 둘과 달리, 권마는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경지는 여휘에 비견될 정도였다.

소교주와 권마.

대체 천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저런 강자들이 쫓겨나와 사방이 적뿐인 중원을 헤매고 있는 것인가.

겨우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주원장은 골수까지 빨아먹고 천진운을 버렸다.

마른 비는 그의 참담한 심정이 전해지는 듯했다.

“진정하십시오, 소교주님. 분하지만… 오늘은 물러나야 합니다.”

침착한 어조였지만, 천진운은 권마가 자신 못지않게 분노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팔에 얹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인은 필사적으로 화를 억눌렀고, 그 덕분에 천진운도 냉정함을 찾을 수 있었다.

“내 미숙함 탓이오. 당연히 결판을 내기 위해 나설 거라 속단했어. 설마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꼬리를 마는 개였을 줄이야.”

전음이 아닌데도 소교주의 음성은 또렷이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군부의 인물들은 흠칫하며 멈췄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술잔을 든 주원장의 손 또한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 모두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달리 소교주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걸 본 천진운은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한심하군. 천하를 제패한 자가 오래된 망령이 두려워 같잖은 연기나 하는 꼴이라니. 애초에 이 정도 그릇이었던 거야. 내가 잘못 봤다. 이런 놈을 데리고는 그자를 이길 수 없어.”

이번엔 주원장이 부들댈 차례였다.

하지만 그는 검을 뽑으려는 군부의 장수들을 나서지 못하게 했다.

지금 천진운을 살려 보내야 그를 견제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둘이 치고받는 동안 황위를 다지고 완전한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끝까지 그를 무시했고, 이를 깨문 천진운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치욕은 잊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을 지그시 노려본 소교주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간다.”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던 마교의 인물들이 천진운과 권마의 뒤를 따랐다.

“어? 잠깐…!”

마른 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중원인들은 소교주를 두려워하지만, 마른 비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배신당한 그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그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립무원인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른 비가 발을 떼기 전에 전음이 들려왔다.

「그만. 움직이지 마라. 지금 나와 엮이는 건 네게 좋지 않아. 네가 목숨을 걸고 쌓아 올린 명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

마른 비는 잠시 멍해졌다가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고 울컥했다.

『훼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지금 그리 갈 테니까 나랑…!』

천진운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리고 마른 비만 볼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사영이 왜 널 좋아하는지 알겠군.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날 염려해준 건 네가 처음이다. 그 마음만으로 충분해. 네가 날 헤아렸듯이 나 또한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마른 비는 그제야 광장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걸 깨달았다.

주원장에게 버림받은 소교주를 따라갈 것인가.

군중은 지금 이 행보로 마른 비의 성향을 최종적으로 분류할 것이다.

그건 주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심유한 눈으로 마른 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마른 비는 화가 났다.

누가 봐도 천진운이 억울한 상황이 아닌가.

그 덕분에 북벌이 성공했고, 여기 모여 앉아서 기뻐할 수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소속과 과거의 은원을 떠나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동지고, 전우였다.

한데 대부분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마른 비는 울화가 치밀었다.

눈길들을 싹 다 무시하고 천진운의 뒤를 쫓으려는 찰나, 또 한번 전음이 도착했다.

「부탁이다. 오지 마라. 내가 그걸 원치 않는다. 지금은 그 자리에 앉아서 연회를 즐겨.」

천진운은 마른 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어서 말했다.

「만약 날 보고 싶다면 이틀 후에 북서쪽에 있는 야산으로 와라. 거기 있는 폐사찰에서 우린 향후 계획을 짜고 정비를 마친 후에 이동할 거야. 떠나기 전에… 내 술이나 한잔 받아줬으면 좋겠다.」

진심 어린 말투였다.

천진운은 자신 때문에 마른 비가 중원인들과 관계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마른 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틀 후에 보자.」

천진운은 훨씬 홀가분해진 얼굴로 숭천문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마른 비가 등을 돌렸다.

‘마음에 안 들어.’

그가 불만 어린 눈으로 주원장을 바라볼 때였다.

“수왕!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마른 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험상궂은 사내가 삼십 여 명의 사내들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왕! 당신을 흠모하여 찾아왔소이다! 우릴 수하로 받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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