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05화 (305/463)

305화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스스로를 함윤이라고 밝히며 다짜고짜 외쳤다.

자신들을 수하로 들여 달라고.

난데없는 사태에 마른 비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수하라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영령이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다.

여규나 전룡도 마찬가지였다.

철중구만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라……. 사파의 쾌남들인가? 하긴, 늦은 감이 있지. 비아 정도의 명성과 힘이라면 진작 이랬어야 해.”

장사의 뒷골목에서 살아온 철중구는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했다.

약자가 강자에게 허리를 숙이고 밑으로 들어가는 일.

받아들일지 말지는 강자의 몫이지만, 추종자들이 생겼다는 건 기꺼운 일이었다.

적어도 철중구의 생각은 그랬다.

반면 마른 비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수하라니? 친구라면 모를까, 난 그런 거 안 키워.”

그러자 함윤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소란을 떨었다.

“친구라니, 그럴 순 없소! 우린 원의 기마대를 깨부수던 당신의 힘과 용기에 반했단 말이오! 수왕의 휘하로 들어가 그 등을 좇고 싶소이다! 우리의 대장이 되어주시오!”

함윤의 얼굴에선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건 뒤에 늘어선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마른 비에게 감복한 모양이었다.

여규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고, 전룡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철중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암, 비아라면 자격이 있지.’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마른 비는 그들의 허리를 일으키며 차분히 말했다.

“음……. 우선 좋게 봐준 건 고마워.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난 부하 같은 건 받지 않아. 그러니 마음만 받을게.”

함윤은 거절당할 거란 생각은 못 했는지 당황했다.

“우, 우리가 성에 차지 않소? 물론 당신 같은 고수가 보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이래 봬도 절강성(浙江省)에서 한가락씩 하는 주먹들이오. 우리를 거두면 분명히 도움이…!”

그의 말처럼 사내들은 범상치 않았다.

무공도 제법이지만, 기질이 상당했다.

자신보다 강한 자와 붙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부류.

그들은 하나하나가 타고난 싸움꾼들이었다.

“당신들이 부족하다는 게 아냐. 오히려 난 당신들처럼 투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좋아. 그냥 누군가를 거두고 책임지는 거, 잘하지도 못하고 원치도 않거든.”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도 괜찮았다.

정파 특유의 갑갑한 느낌도, 대부분의 사파인들에게서 나는 음험한 냄새도 풍기질 않았으니까.

이들은 거칠게 살아왔음에도 나름의 기준을 지키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재미난 건 그런 자들끼리 뭉쳤다는 것이다.

철중구도 그걸 느꼈는지 관심을 보였다.

“절강성이라고? 동남쪽 끝에서 올라왔구만. 바닷바람 맞으며 큰 건가?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이군.”

하지만 함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철중구를 힐끗 보더니 별다른 감흥 없이 툭 뱉었다.

“투도인가? 당신도 상당하더군. 미안한데 잠시 빠져주겠나? 지금 수왕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서.”

마른 비에게 보이는 공손함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내용은 그렇다 쳐도 억양이 대단히 도발적이었다.

철중구가 웃음을 거두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흐흐. 이 새끼가 칭찬을 해줬더니 기어오르려고 하네? 너 몇 살이냐? 상판대기보다는 어린 것 같은데. 오늘 내가 예절 교육을 좀 시켜주랴?”

코를 가로지른 칼자국부터, 얼굴에선 노련한 투사의 기운이 묻어나지만, 눈이 희한하게 앳되다.

말투로 봐선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정도 돼 보이는데, 눈을 보면 또 그 생각이 싹 사라진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놈이었다.

싸움판을 전전하다 온 건 맞는지, 함윤은 기세를 드러낸 철중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예의는 그럴 만한 상대에게 차리는 것이지. 교육? 당신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나이는 열일곱이다. 혹시나 어리다고 무시할 생각이라면….”

한마디로 너는 존중을 보낼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평소의 철중구라면 당장 칼부터 뽑았겠으나,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여, 열일곱?! 그 얼굴이?! 아이 시발, 놀래라. 나보다 많은 줄 알았잖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말투는 또 왜 그래?”

함윤이 눈을 부릅떴다.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함윤은 열여섯 살에 절강성 각지의 싸움꾼들을 모조리 눕혔고, 그들의 대형이 됐다.

하지만 너무 어리다 보니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느꼈고, 무시받기 싫어서 말투에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타고난 노안까지 더해져서 그 노력은 그럭저럭 효과를 봤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듣는 건 참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철중구……. 죽고 싶나?”

함윤이 눈을 부라렸고, 철중구는 낄낄대며 웃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병아리네. 딱 저 나이 때 날 보는 거 같아. 하긴 눈에 뵈는 게 없을 나이지. 근데 삐약아, 상대는 봐가며 까불어야 하지 않겠니? 여기서 죽여주랴?”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마른 비의 수하가 되기 위해 왔다가 싸움을 하게 생겼다.

그것도 황성의 한복판에서.

함윤도 철중구 못지않게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둘이 지지고 볶는 건 상관없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난처해진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전룡이 끼어들었다.

“그만. 거기까지. 싸울 거면 밖에 나가서 싸워라.”

“음……. 수라…!”

가벼운 어투였지만, 함윤은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룡이 마른 비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반면 철중구는 함윤의 말을 따라하며 비아냥댔다.

“‘우움~ 수롸아아아~!’ 전룡 따위한테 쫄면서 날 죽이겠다고? 고향 내려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애송아.”

함윤은 부들부들 떨며 칼자루에 손을 댔지만, 마른 비의 제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해. 칼 뽑으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중구 너도 적당히 하고. 날 찾은 손님인 걸 잊었어?”

“아… 그랬지? 간만에 놀리기 좋은 놈이 나타나서. 크흠, 미안. 그만하마.”

상황을 정리한 마른 비는 끊겼던 말을 마쳤다.

“아무튼 난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지 않아. 그러니 더 괜찮은 사람을 찾도록 해.”

함윤은 이를 깨물고 고민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그냥 따라다니는 건? 수하로 받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불편하게 하지 않을 테니 그 정도는 허락해 주십쇼!”

간절한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마른 비에게 제대로 반한 듯했다.

마른 비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것까지 하지 말라고는 못 하겠네. 알아서 해. 그러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따라가고.”

“가, 감사합니다! 수왕!”

함윤은 활짝 웃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뭣들 해! 인사 안 드리고!”

그러자 삼십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수왕!”

“아, 아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마른 비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함윤은 절강성 주요 도시들의 뒷골목을 장악한 자들을 전부 때려눕힌 후, 그중 심지가 굳고 쓸 만한 자들만을 추려 북벌에 지원했다고 했다.

원래는 공을 세워서 사도련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생각이었으나, 마른 비의 싸움을 보고 만 것이다.

일행이 함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수왕! 산서성(山西省)의 절검문(切劍門)이 인사드리오! 혹시 이 뒤에 마땅한 계획이 없다면 본문에 들러 문주님과 천하 정세에 대해 논하시는 게….”

“무슨 소리! 수왕께서 그 먼 곳까지 뭐 하러 간단 말인가! 그리고 천하 정세는 무슨 놈의 천하 정세! 수왕, 옥전(玉田)의 신가장입니다. 전쟁도 끝났고, 하북성까지 오셨는데 여독을 푸셔야지요. 마침 본가에서 며칠만 더 가면 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山海關)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로 모실 테니….”

마른 비와 관계를 트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마른 비가 광장에 나오자마자 마교의 진영으로 향하고, 표금산을 처리하는 바람에 눈치만 보며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함윤이 하는 걸 보고 이때다 싶어 몰려든 것이다.

정신이 없는 건 마른 비만이 아니었다.

“수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 잘 듣게! 원하는 모든 걸 내줄 테니 본방의 식구로…!”

“투도! 자넨 장사 출신이 아닌가! 본파도 호남에 있네! 섭섭지 않게 대우해줄 테니 본파 검대의 대주로…!”

전룡과 철중구에게도 영입 제의가 쏟아졌다.

반면 소속이 확실한 여규에게는 정파의 인물들이 다가왔다.

“아버님 일은 안타깝게 됐네. 삼가 조의를 표하네. 나, 형산파(衡山派) 장로 장승부일세.”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자네의 검술은 고검께서 남기신 거겠지? 점창이 자네 부자 덕분에 비상하겠군.”

눈썰미가 있는 정파의 원로들은 여규의 가치를 알아봤다.

적재적소에서 아군을 지원하며 치명적인 일격을 꽂아 넣는 검사.

앞으로 나서서 설치는 자들은 많지만, 이런 인재는 정말 드문 법이다.

마른 비가 있어서 뒤에 머물 뿐, 여규는 마음만 먹으면 최전선에 설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점창이 굉장한 인재를 배출했다면서 자파의 후기지수들을 데려와 안면을 트기 바빴다.

“굉장한 인기로군.”

마른 비 일행은 연회의 중심이었다.

모두가 그들을 주목했고, 친해지고 싶어 했다.

속이 꼬인 자들은 배 아파했지만, 그들의 실력만큼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른 비나 전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규나 철중구만 해도 거대문파 대주급을 상회하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어쩌다가 이런 괴물들이 한데 뭉쳐 다니게 됐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인 존재는 또 있었다.

“어, 엄청나군.”

무림인들은 생고기를 뜯고 있는 별비를 관찰했다.

멀리서 볼 때도 크다고 느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앞발 한 방에 코끼리도 날려버릴 것 같은 괴물이었다.

아니, 코끼리 따위는 문제도 아니리라.

기를 사용한다고 했으니 아마 숭천문도 일격에 가루로 만들 것이다.

별비가 고기를 우물거릴 때마다 번뜩이는 이빨을 보며,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초라하다고 느꼈다.

“배, 백풍 님? 말을 알아듣는다던데 들리시나요?”

용감한 누군가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별비는 고기를 씹다 말고 그를 힐끗 봤는데, ‘그래서 뭐?’라는 표정이었다.

“오, 오오! 정말이다! 진짜로 말을 알아듣나 봐!”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그는 더욱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털을 한번 쓰다듬어 봐도….”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맹수가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인간에게 거리를 내어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별비는 사내를 지그시 보다가 왼쪽 앞발을 쑥 내밀었다.

관심과 선망에 대한 답례쯤 되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황송한 듯 앞발을 어루만지더니 감탄했다.

“오오! 크고 부드러워!”

사람들이 부러워하자 사내는 더욱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기, 그럼 내친김에 등에 한번 타 봐도?”

적당히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별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버럭 울음을 터뜨렸다.

“크하앙!”

모여 있던 인간들이 기겁을 하며 흩어지고, 별비의 울음을 코앞에서 받은 사내는 혼백이 날아간 표정으로 땅을 기며 도망쳤다.

“히, 히이익…!”

〔이래서 인간은 잘해주면 안 돼.〕

입맛을 버렸다는 듯 별비는 씹던 고기를 퉤 뱉었다.

“어우, 정신없어! 나 갈 곳이 있어서 아무도 안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이제 밥 좀 먹게 비켜주면 안 될까?”

식사를 방해받은 마른 비는 짜증을 내며 사람들을 물렸다.

아직 배가 차지도 않았는데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뭘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결례를 깨달은 자들이 황급히 사과하며 물러났다.

간신히 여유를 찾은 마른 비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아… 숙소로 가버릴까?’

일행을 데리고 들어갈지를 고민하는 순간, 마른 비는 보았다.

영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인을.

백색의 무복을 입은 그녀는 피부도 새하얬는데, 더욱 눈길을 끄는 건 머리카락이었다.

‘어? 금발?’

여인은 만금당 사천지부에서 보았던 미카엘처럼 황금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저 사람, 기운이 굉장히 독특해!’

마른 비가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또 있었다.

설원에 휘몰아치는 북풍한설.

여인의 내부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