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북해빙궁(北海氷宮)이로군.”
말을 건넨 건 구칠이었다.
그는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데, 마른 비를 둘러쌌던 사람들이 빠지자 접근한 것 같았다.
마른 비는 대도에 진입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왜? 난 당신 싫다니까? 왜 자꾸 달라붙는 거야?”
기분이 상할 만도 하련만 구칠은 넉살 좋게 마른 비의 핀잔을 넘겼다.
“허허. 사소한 일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닐세. 우리가 어디 보통 인연인가. 게다가 우린 서로에게 득이 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난 자네의 힘과 명성, 영향력이 필요하고, 자네는 내게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잘 생각해보게. 이토록 바람직한 관계는 흔치 않아.”
이제는 아예 대놓고 실리적인 부분을 언급한다.
그따위 것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구칠이 선수를 쳤다.
“가령 난 지금 자네의 궁금증을 곧바로 충족시켜 줄 수 있네. 저 소저에 대해 알려주지.”
구칠은 마른 비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이번 북벌은 중원의 문파들에게만 의미가 있던 게 아니야. 중원에 진출하고 싶지만 원 황실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새외의 문파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기회였지.”
구칠은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북쪽 끝, 설원의 땅 아라사(俄羅斯)에 위치한 신비문파. 북해빙궁에서도 이번에 사람을 보내왔네. 저들은 과거부터 중원의 문파들과 교류해왔어. 하지만 근 백 년간 중원에서 활동하지 못했지.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빙궁이 북벌에 참전한 직접적인 이유는 따로 있네.”
여인의 독특한 기운은 마른 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북해빙궁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구칠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른 비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왜? 저 사람들도 핍박을 받았어?”
구칠은 ‘옳거니, 걸려들었어.’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원은 눈과 얼음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극지의 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거긴 희귀한 광석이 넘쳐난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걸 제련할 수 있는 건 빙궁뿐이지. 침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협박을 했다고 들었네.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몰살하겠다고 말이야.”
중원과 교류할 길도 막히고, 팔자에도 없는 조공까지 바치게 되었으니 빙궁이 원을 끔찍하게 싫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원의 몰락을 바랐고, 중원의 사정을 지켜보다가 북벌의 조짐이 보이자 즉각 제자들을 파견했다.
기주 평야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하북성 북쪽에서 그들은 맹활약을 펼쳤다고 했다.
“그렇구나. 근데 빙궁 사람들은 전부 머리색이 저래? 우리와는 인종이 다른 것 같은데?”
혼혈도 아니다.
영령과 대화를 나누는 여인은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보였다.
하지만 구칠은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은 우리와 비슷하네. 빙궁에는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중원이야. 오래전 중원에서 이주한 자들이 세운 문파거든. 세월이 흐르며 현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혹한에 어울리는 무공을 창안했지만, 빙궁의 주를 이루는 건 한족일세. 뭐 지금에 와서는 피가 섞였겠지만 말이야.”
빙궁이 계속 중원과 교류하는 이유였다.
더욱 중요한 그들만의 사정이 있지만, 구칠도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아라사에는 피부가 하얗고 금발인 인종이 있지. 십여 년 전, 궁주가 현지의 고아 한 명을 빙궁으로 데려왔다고 해. 얼어 죽기 직전인 소녀였는데,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월등한 신체 조건으로 차기 빙궁주로 거론될 만큼 성장했지. 그게 저 여인일세.”
구칠은 중원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외모를 지닌 여인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빙설연. 그녀의 이름이야.”
“빙설연…….”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국적인 외모 탓일까?
건우라는 한족식 이름만큼이나 입에 붙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빙설연은 여인의 미모에 둔감한 마른 비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키가 엄청 크네.’
한족을 먼저 예로 들자면 그들은 작은 편이다.
중원에서 크다는 소릴 듣는 장정들이 마른 비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빙설연은 언뜻 봐도 그들보다 컸다.
‘아마 중구보다 조금 작겠어.’
놀라운 건 비율이었는데, 팔다리가 길고 늘씬한 데다가 심지어 탄탄하기까지 했다.
저런 몸으로 무공을 펼치면 대단히 효율적일 것 같았다.
‘눈도 신기하고…….’
마른 비는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빙설연의 눈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시선을 느낀 걸까?
영령과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이쪽을 돌아봤고, 마른 비와 눈이 마주쳤다.
빙설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마른 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
마른 비는 그제야 빤히 바라보는 게 실례라는 걸 깨닫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발그레한 볼과 당황한 표정.
구칠이 ‘오호,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농을 건넸다.
“자네, 설마 그녀에게 반한 건가? 수왕과 빙궁의 차기 궁주. 실력부터 외모까지 상당히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지는데. 어때? 내가 힘 한번 써줘?”
마른 비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무, 무슨 소리야! 됐어! 그런 거 하지 마!”
구칠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반응이군. 다 큰 청춘 남녀가 만나는 게 어때서? 설마 천하의 수왕이 부끄러움을 타는 건가? 그게 아니면…… 어, 가만. 자네 혹시 정인(情人)이 있나?”
정인.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다만 요즘 들어 부쩍 보고 싶은 얼굴은 있었다.
‘노을이…….’
시비가 은근히 유혹을 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매력적인 여인들을 볼수록, 마른 비는 노을이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졌다.
‘진짜 보고 싶네.’
아무리 둔한 인간이라도 이쯤 되면 고민할 때가 됐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마른 비가 처음으로 노을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 구칠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봐, 수왕. 잡담은 이쯤하고, 소개할 사람이 있네.”
역시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던 거였다.
불쾌해진 마른 비가 눈살을 찌푸릴 때, 구칠의 뒤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수… 왕! 반갑습… 니다!”
꾀죄죄한 거지였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악취가 진동을 했다.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눈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다.
구칠의 뒤에 숨은 그는 불안함을 느끼는지 어깨를 움츠린 채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마른 비를 흘깃거리는 걸로 보아 가까워지고 싶은 눈치였다.
구칠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꽉 쥐더니 허리춤을 헤쳐서 매듭을 들어 올렸다.
“본방의 매듭에 대해 알고 있나? 자, 보게. 여덟 개야. 팔결. 이분이 바로 방주의 뒤를 이어 본방을 책임질 후개일세.”
놀라운 일이었다.
여규에게 듣기로는 십만에 이르는 방도 중에서 고르고 고른 천재가 후개로 뽑힌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후개는 막강한 무예는 물론이고, 정파 최고의 정보 집단을 이끌 자답게 비상한 두뇌를 소유해야 한다고 했다.
타 문파와 달리 방주가 낙점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개방 방도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선정된다고 들었다.
한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자라니.
구칠은 마른 비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네. 예전에 큰 사고를 겪고서 이렇게 되었어. 후개로 선정된 이후에 말이야. 하지만 나는 믿네. 후개께서 언젠가는 과거의 총명함을 되찾을 거라고. 문제는 반대파가 많다는 거야. 그들은 후개의 교체를 주장하고 있지.”
마른 비는 후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몸을 움찔 떨었지만, 곧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나도 반가워. 난 마른 비야. 이름이 뭐야?”
“……후… 개. 이름 없어. 그냥 후개야….”
후개로 낙점되는 순간 이름은 사라진다.
개방의 오랜 전통이었다.
구칠의 설명을 들은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후개의 눈을 들여다봤다.
겉모습은 어눌하지만, 자연기가 전해주는 느낌은 믿을 수 없이 맑았다.
옆에 있는 구칠과 확연히 대비된다고 할까.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구칠이 왜 자신에게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지였다.
“도와주게.”
“도와달라니? 뭘?”
구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개방은 지금 심각한 분열과 혼란에 휩싸여 있네. 반대파가 있다고 했지? 그들은 후개를 끌어내리고 다른 자를 추대하려 하고 있어. 그리고 그놈들이 내세운 건 자격 미달의 애송이지. 사고를 겪기 전의 후개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는 녀석이야.”
구칠은 생각만 해도 열이 받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놈을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어리숙한 녀석을 방주로 앉히고 제 놈들이 방을 좌지우지하려는 게지! 탐욕스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구칠은 수염이 푸들푸들 떨릴 만큼 화를 냈다.
조용히 지켜보던 마른 비가 물었다.
“개방 내부의 사정이잖아? 내게 뭘 도와달라는 건데?”
구칠은 아차 하는 얼굴이 됐다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식구끼리 물리적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은 지지 세력이 많은 쪽으로 기울게 돼 있어. 한데 후개를 지지하는 우리와 반대파의 비율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박빙이지.”
구칠은 마른 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서 강력한 후견인이 필요하네. 현재의 후개가 정통한 후계자이며, 그 외에 다른 자가 방주가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지지자. 내부의 여론이 막상막하라 결국은 외부의 유명 인사들을 포섭하는 지경까지 이른 게지. 허나 아무나 끌어들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구칠은 마른 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다른 자들도 고려해 봤지만, 현시점에서 자네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네. 무공이든 명성이든 인기든 현재 강호 무림에서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모든 면에서 자네가 최적이야. 부디 우리를 도와주게.”
구칠은 정파 무림에서 개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피력하며 마른 비를 설득했다.
그의 절실함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 황당한 부탁이었다.
마른 비가 후개에 대해 얼마나 알며, 일면식도 없는 개방의 사정에 끼어들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리고 마른 비는 구칠의 말도 의심스러웠다.
그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밝혀졌고, 그게 나쁜 의도가 아니란 건 알게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칠의 입장일 뿐이다.
심지어 같이 있는 후개조차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니 이게 사실이란 걸 입증할 방도가 없었다.
“후개가 정신만 차리면 해결될 문제일세. 충격으로 약간의 후유증을 겪고 있을 뿐, 그의 능력은 여전히 출중하네. 난 후개가 예전의 총기 어린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지키고 싶을 뿐이야.”
구칠의 간곡한 부탁을 들으며, 마른 비는 후개를 바라봤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가만있질 못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흔들며, 침을 질질 흘렸다.
마른 비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스으윽―
‘어?!’
정신없이 사방으로 구르던 눈동자가 마른 비를 스쳐 지나갔다.
잘못 본 것일까?
순간 또렷한 빛이 번쩍이며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