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뭐지?’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정서 불안인 것처럼 한곳을 응시하지 못하던 눈동자가 한순간 섬광처럼 번뜩였다.
하지만 후개는 곧바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아예 땅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파묻은 채 혼자 웅얼대고 있었다.
“왜 말이 없나? 도와주기 싫은가?”
마른 비가 후개를 빤히 들여다보자, 구칠은 고개를 돌려서 그를 확인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는 절실해 보였지만, 마른 비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응. 싫어. 내가 그런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잖아.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봐.”
여전히 후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구칠은 얼굴을 구기며 실망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개방이 무림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모르는가! 자넨 자네의 영향력으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누군가와 싸울 필요도 없고, 명성에 금이 가는 것도 아니네! 그저 지지한다는 한마디면 돼! 그럼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데, 그것도 못 해준단 말인가!”
구칠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마른 비가 그의 뜻에 따라줄 이유가 없었다.
후개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단호히 말했다.
“응.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친구의 일도 아니고, 심지어 난 당신이 싫다고 분명히 말했어. 억지 부리지 마. 난 엄한 일에 낄 생각 없으니까.”
마른 비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뒤에서 구칠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마른 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해…….’
허기도 가신 지 오래였다.
말을 걸기 위해서 호시탐탐 틈을 엿보는 사람들.
마른 비는 밥이고 뭐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한시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저기… 수왕 님?”
뭐냐. 이번엔 또 누구지?
고개를 돌리니 호화로운 성장을 입은 여인이 웃고 있었다.
스물 초반쯤 되었을까?
마른 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옷만큼이나 얼굴 생김새도 화려했다.
“서문유화예요. 꼭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그녀는 그 말만 딱 하고 마른 비를 올려다봤다.
빙설연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이국적인 신비로움을 가졌다면, 서문유화란 여인은 전형적인 한족의 미인이었다.
원래도 예뻤겠지만, 화장을 통해 강조한 눈코입은 청초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동시에 풍겼다.
정성 들여 꾸밈으로써 더욱 빛이 나는 외모.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인이었다.
“마른 비야.”
하지만 약간의 두근거림을 선사한 빙설연과 달리 그녀는 마른 비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마 노을이를 떠올린 직후라 그런 것 같았다.
자신을 서문유화라고 소개한 여인은 마른 비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끝이에요?”
뭐가 끝이냐는 거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건가?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문유화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보통은 뭘 덧붙이더라고요. ‘아름답다’, ‘예쁘다’ 뭐 그런 쪽으로.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아, 칭찬을 바라는 건가?’
마른 비는 그렇게 해석했고, 여인을 꼼꼼히 살폈다.
과연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는 게 수긍이 갈 만큼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고개를 끄덕인 마른 비가 솔직하게 말했다.
“맞아. 그런 말 들을 만해. 근데 나는 그것보다 당신의 힘이 더 놀랍네. 내가 본 우리 또래 여자들 중에서 당신이 두 번째로 강한 것 같아.”
마른 비는 그녀의 손을 봤다.
손바닥에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
화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마른 비는 그게 무척이나 좋게 보였다.
그건 그녀가 쌓은 노력의 증거였으니까.
서문유화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니! 세상에…! 이봐요, 수왕! 당신, 언니가 누군지 몰라요?”
영령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소녀였다.
허리춤에 손을 짚은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마른 비를 타박했다.
“서문유화! 서문세가(西門世家)의 금지옥엽이자 천하제일미! 당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요! 근데 반응이 그게 뭐예요?”
소녀는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발끈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마른 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음…….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마른 비의 대답이 예상을 벗어났던 모양이다.
소녀는 당황하더니 우물쭈물 댔다.
“꼬, 꼭 해야 할 말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은 좀……. 보통은 그렇게 침착하지 않단 말이에요! 호들갑을 떨지!”
소녀는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서문유화를 보며 외쳤다.
“거 봐요, 언니! 먼저 말 걸면 안 된다니까! 아이참, 왜 안 하던 행동을 해서….”
도무지 맥락을 잡기 힘들었다.
마른 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서문유화는 까르르 웃었다.
“저희 때문에 정신이 없으시죠? 죄송해요. 꼭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기주 평야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거든요. 저랑 비슷한 나이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녀는 동경과 선망이 어린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쁘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끝이냐고 물은 게 아니었거든요. 친해지고 싶어서 농담을 한 건데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아… 농담이었구나. 내가 둔해서 알아듣질 못했네.”
마른 비는 이마를 긁적였고, 서문유화는 그런 반응이 신선한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특이하세요. 제가 본 대부분의 남자들은 저를 칭찬하기 바빴거든요.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자랑하거나.”
“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들이었죠.”
소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소녀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댔다.
유치한 반응이지만, 그녀가 서문유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른… 비? 발음이 맞나요? 제 외모가 아니라 무공을 먼저 봐준 건 공자가 처음이에요. 그래서 기뻐요. 지금의 힘을 갖추기 위해서 죽을 만큼 단련했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게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소이는 이번에도 본인의 일처럼 신이 나서 외쳤다.
“유화 언니는 정말 대단해요! 열아홉 살에 무려 칠룡의 일인에 들었다고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누구 앞에서 떠들고 있는지를 깨닫고 풀이 죽었다.
“대단… 엄청 대단한 건데……. 아무나 못 하는 건데……. 당신에게는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가만 놔두면 울어버릴 것 같다.
마른 비는 그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서문유화와 소이는 광장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 중 처음으로 마른 비를 유쾌하게 해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단련을 해봐서 알아. 이 정도 경지에 오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 그쵸? 수왕이 보기에도 그렇죠? 맞아요! 언니는 진짜 대단해…! 당신,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괜찮은 구석도 있네요!”
철없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마른 비는 그녀의 순수함이, 그리고 서문유화를 향한 애정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와… 웃는 모습이 훨씬 멋지네요!”
서문유화가 마른 비를 보며 중얼댔다.
그러자 소이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언니!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비전연애법(祕典戀愛法)’에 쓰여 있었어요! 마음에 드는 남자를 꼬시려면 먼저 다가가거나 함부로 칭찬하면 안 된다고! 언니는 지금 두 수나 내준 거예요! 실수한 거라고요!”
“휴……. 소이야, 그런 것 좀 안 보면 안 되겠니? 그리고 꼬시긴 누굴 꼬셔! 그런 거 아니란다. 얘도 참.”
서문유화가 발그레한 얼굴로 핀잔을 줬다.
마른 비의 눈치를 보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응?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기분이 좋아진 마른 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제가 두 번째로 강하다고 했잖아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면 첫 번째가 누구인지 여쭤도 될까요?”
소이는 그새를 못 참고 또 끼어들었다.
“맞아! 저도 궁금해요! 또래에서 언니보다 강한 여자가 있다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요. 언니는 건방진 팽가의 남자들보다도 도를 잘 쓴다고요!”
‘도객이었어?’
시선을 내리니 서문유화의 허리춤엔 도가 매달려 있었다.
남자들이 쓰는 두터운 도와 달리 가늘고 날렵한 형태는 무게를 줄이고 속도를 향상시킨 것 같았다.
그래도 검에 비하면 훨씬 무거워 보였는데, 가냘픈 팔로 저런 걸 휘두르는 모습이 얼른 그려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도를 관찰하던 마른 비가 말했다.
“사실이야. 삼 년 전에 싸웠을 때 꽤 고전했거든. 내가 강해졌듯이 그 친구도 몰라보게 발전했겠지. 그때의 경지가 아마 지금의 당신과 비슷할 거야.”
솔직히 족장 결정전 때의 노을이가 지금의 서문유화보다 강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실망할 것 같아서 노을의 힘을 조금 낮추어 말했는데, 소이는 그것도 믿기 힘들어했다.
“삼 년 전이라고요? 말도 안 돼! 그런 여고수가 있었으면 당장 알려졌겠죠!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란 걸 알아요. 그분의 성함을 물어도 될까요?”
침착하던 서문유화도 조바심이 나는 눈치였다.
마른 비는 아련한 눈으로 답했다.
“저녁노을이라는 친구야. 한어로 바꾸면 석하(夕霞)쯤 되겠네. 그날 이후로 우리 부족의 족장을 맡고 있어.”
수왕을 배출한 부족의 족장.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그런 집단의 수장을 맡을 정도라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다.
믿기 힘들지만 수왕의 확고한 눈빛을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이는 입을 꾹 다물었고, 서문유화는 작게 중얼댔다.
“부족……. 그러고 보니 공자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네요. 말해줄 수 있나요?”
마른 비에 대해 궁금한 건 서문유화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다가와 귀를 기울이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저도 궁금합니다. 어디서 당신 같은 분을 배출한 건지. 아까 눈인사는 나눴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려요. 북해빙궁의 빙설연입니다.”
영령을 대동한 채 다가온 빙설연이 고개를 숙였다.
마른 비는 통성명을 했고, 소이는 감탄을 내뱉었다.
“와아! 이 언니 진짜 예쁘다…!”
빙설연의 이국적인 외모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이쪽을 주시하는 게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딜 가도 꼭 볼 수 있는 자들이 이곳에도 있었다.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와 빙화(氷花)…! 쳇, 야만인 놈이 여복이 터졌군.”
“그러게 말이야. 무공이 뛰어나긴 해도 결국 야만인 아닌가. 서문 소저와 빙 소저는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질시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서문유화와 빙설연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였고, 그녀들에게 관심이 있지만 말도 못 붙이던 자들이 마른 비를 헐뜯었다.
일행이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질펀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디 시벌 같잖은 똥개들이 숨어서 왈왈 짖고 지랄이야, 지랄이? 꼬우면 니들도 목숨 걸고 싸워서 인정받지 그랬냐? 야만인? 자신 있으면 이리 나와서 지껄여 보던가!”
철중구였다.
그는 건들건들 다가오며 욕을 퍼부었고, 마른 비를 험담하던 자들이 일시에 침묵했다.
애초에 나설 용기가 없으니 뒤에서 질투나 하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판을 깔아준다고 나올 리 없었다.
거 봐라 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던 철중구가 흠칫했다.
“으엇, 깜짝이야! 뭐야, 얘네? 선녀여?”
그제야 서문유화와 빙설연을 본 철중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어…… 욕할 만했네. 욕할 만했어. 이건 비아 네가 잘못한 거다. 어우씨, 뭐가 이렇게 예뻐?”
어벙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철중구 때문에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바뀐 건 영령 때문이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와서 마른 비의 소매를 잡았다.
“오라버니. 잠깐만 이리 와봐.”
마른 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따라나섰다.
대꾸 없이 일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영령은 정사지간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쪽을 바라봤다.
평소의 당찬 모습과 달리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기. 저쪽 보여?”
“……?”
영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엔 희한한 옷을 입은 자들이 서 있었다.
소매와 바지통이 펄럭일 정도로 넓은 옷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색이었다.
다소곳이 손을 모은 그들은 전원이 영령을 보고 있었는데, 온화한 표정과 달리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누구야?”
마른 비가 묻자, 영령은 겁먹은 얼굴로 답했다.
“회야. 날 쫓아다니는 놈들. 놈들도 이곳에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