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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08화 (308/463)

308화

논공행상 때 전룡과 영령을 주시하던 눈길들.

회의 인물들은 정사지간의 진영에 숨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황성에 초대됐을 리 없다.

놈들도 북벌에 가담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나 태도로 볼 때, 대의 따위를 염두에 둔 것 같진 않았다.

저들은 오직 영령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름 끼치는 놈들이네.”

회의 집요함에 마른 비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앞으로 나섰고, 영령의 앞을 막아서서 놈들의 눈길을 차단했다.

“미친……. 여기까지 따라왔나? 집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전룡도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들을 제치고 달려왔다.

철창을 움켜쥔 전룡이 어깨를 나란히 하자, 마른 비가 물었다.

“형. 령이를 괴롭힌 게 저놈들인 거지?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몰라도 잘됐네. 잡아서 족치면 뭔가가 나오겠지.”

마른 비는 전룡과 영령이 좋았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릴 생각이었다.

그가 기세를 끌어올리며 발을 내디딜 때였다.

「그대도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로군요. 허나 불완전해. 아쉽게도 본회의 식구가 될 순 없겠어요.」

난데없는 전음에 마른 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난 너희 식구가 되겠다고 한 적 없는데?”

전음을 날린 사람은 회의 인물들 중 맨 앞에 있는 사내였다.

그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키가 마른 비의 가슴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았다.

동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

아이 같은 사내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영 소저는 당신과 달라요. 그녀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천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고귀한 존재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꾸? 누가 물어봤어?”

사내는 마른 비의 말은 듣지도 않고 계속 떠들어 댔다.

「그녀는 고대의 천인, 수백 년간 잠들었던 회주를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분의 얼어붙은 심장을 깨울 수 있는 세 개의 열쇠 중 하나란 말입니다. 당신처럼 선택받지 못한 자는 그녀와 어울릴 자격이 없어요.」

“우와~ 환장하겠네! 형, 쟤네 원래 이래?”

묻지도 않은 걸 줄줄이 늘어놓더니 종국에는 자격 운운한다.

상대의 말 따윈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무작정 쏟아내는 놈이었다.

‘뭐 하는 놈들이야, 대체?’

말투, 눈빛, 분위기, 태도…….

얼핏 봐선 티가 나지 않지만, 들여다볼수록 섬뜩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느낌.

마른 비는 답답해서 가슴을 쾅쾅 쳤다.

“왜? 또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나?”

마른 비에게만 보낸 전음이라 전룡은 내용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

“원래 그런 놈들이다. 상대의 생각이나 입장 따윈 고려하지 않아. 제 할 말만 늘어놓다가 행동에 나서지. 당사자가 거부해도 말이야. 납치든 협박이든 고문이든, 그 과정에서 아군이 몇 명이 죽든 개의치 않는다. 오직 ‘령이를 데려간다’는 것에만 집중하지.”

“……미친 거 아냐?”

그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부드러운 미소와 나긋나긋한 어투.

단체로 저런 얼굴을 하고 몹쓸 짓을 저지른다고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지. 하지만 행동에 나설 땐 그렇지 않다. 전투에 접어들면 놈들은 지극히 합리적이야. 불리하면 물러서고, 승산이 보일 때만 달려든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광기 어린 놈들이 냉철한 이성을 겸비하고 있으니까.”

심지어 놈들은 상당한 힘까지 갖춘 게 분명했다.

원 기마대에게 쫓기는 중이었다지만, 전룡에게 사경을 헤맬 정도의 중상을 입혔으니까.

“그래? 붙어보면 알겠지.”

마른 비가 놈들에게 다가가려 할 때, 목소리가 들렸다.

“저들인가요?”

질문을 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빙설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흰옷을 입은 자들을 살폈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저들이 천인회로군요.”

놀랍게도 그녀는 회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전룡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었다.

“아까 령이와 대화를 나누던 분이시군. 저들에 대해 아시오?”

전룡도 빙궁의 인물과는 초면이었다.

빙설연은 살짝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네. 궁의 어른들께 들었습니다.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자들……. 중원에선 초능이라고 부른다지요? 천인회는 초능자들의 집단입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본궁은 저들과 고대의 맹약으로 얽혀 있지요.”

빙설연이 영령에게 말을 건 이유였다.

또한 빙궁이 오래도록 중원과 교류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전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대의 맹약? 저놈들, 최근에 나타난 놈들이 아니었소?”

“아닙니다.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을 뿐, 저들은 계속 존재해왔지요. 박해를 받고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했는데,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양지로 나온 모양입니다.”

빙설연은 천인회에 대해 깊게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는 마른 비 뒤에 있는 영령을 보며 말했다.

“아까 영 소저와 대화를 나누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천인회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그들은 원래…….”

빙설연은 갑자기 말을 끊고 침묵했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은 뒤에 입술을 뗐다.

“이제 와서 과거에 어땠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겠죠. 직접 보니 영 소저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에 대한 정보를 수정해야 할 것 같아요.”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녀에게선 경우에 따라 오래도록 이어져 온 인연을 끊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사문의 어른들과 충돌하는 한이 있더라도.

빙설연은 서글서글한 외모에 어울리는 결단력을 지닌 여걸이었다.

“강소성에서 이상한 놈들을 봤어.”

마른 비였다.

그는 산의 지맥에 시커먼 말뚝을 박은 채 괴수들을 양산하던 백수교를 떠올렸다.

“겉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느낌이 비슷해.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거나 광적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어도 개의치 않는 것. 마치….”

그때였다.

불쾌함이 담긴 전음이 날아든 것은.

「당신…… 지금 백수교와 우리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겁니까? 역시 도태된 종자답군요. 그 미개한 것들과 신인류인 우리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진화에서 낙오되어 과거로 역행하는 자들이니까요. 그것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집니다!」

혐오감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마른 비는 우선 사내가 백수교를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연스럽게 납치된 여인을 떠올렸다.

‘엽주…!’

수천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들은 아직도 옥예린을 찾고 있는 중일 것이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백수교에 대해 알고 있는 자를 마주쳤다.

심지어 그놈은 영령을 괴롭힌 장본인이었다.

‘아저씨 눈치 볼 때가 아냐. 연회고 뭐고 일단 잡는다!’

마른 비는 주원장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또 분위기를 망치면 결코 좋을 게 없으리란 것도.

하지만 옥예린을 위해서도, 영령을 위해서도 놈들을 놓칠 순 없었다.

마음을 굳힌 마른 비가 천인회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벌, 또 뭔 일이여? 얼씨구? 옷 봐라? 저 광대 같은 놈들은 뭔데?”

마른 비가 움직이자 철중구가 즉각 따라붙었다.

저 멀리서 정파의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여규도 인파를 헤치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죠? 수왕 님, 설마 싸우려는 거예요?”

서문유화도 달려와서 영령의 옆에 섰다.

그녀와 빙설연이 영령을 지키자, 전룡이 철창을 고쳐 쥐며 마른 비에게 합류했다.

겨우 풀어졌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냐?”

“몰라! 수왕이 왜 저러지?”

무지막지한 기세를 일으키는 마른 비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른 비는 동자 같은 사내만 노려보며 거리를 좁혔다.

천인회의 인물들이 모인 곳에 가까워졌을 때,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런, 이런. 아까도 그러더니 정말 물불을 가리지를 않는군요. 그 야만성, 역시나 도태된 자답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주목받을 생각이 없어서 이만.」

“도망치려고? 내가 이 거리에서 너희를 놓칠 것 같아?”

마른 비는 코웃음을 쳤지만, 곧 눈을 의심해야 했다.

스아악―

십여 명에 달하는 천인회의 인물들이 바람에 쓸리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감각은 물론이고 기감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놈들을 찾을 수 없었다.

“별비야!”

마른 비가 등을 돌리며 버럭 외쳤다.

하지만 별비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후각까지 동원해서 사방을 훑던 별비가 이내 힘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럴 수가…….”

마른 비는 허탈한 얼굴이었다.

비마도 추격했던 자신이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놈들을 놓치다니.

심지어 별비까지 나섰는데 종적을 잡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뭐야? 왜 저러는 건데?”

“누구한테 투기를 드러낸 거지? 아무것도 없잖아?”

“수왕만이 아니라 일행이 전부 이상하군.”

더욱 황당한 건 군중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천인회의 인물들을 보지 못한 듯이 웅성댔다.

마치 마른 비가 허공과 싸우려 한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만 놈들이 보인 거야?’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를 망친 마른 비에게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지만,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천인회가 있던 곳만 바라봤다.

* * *

“봤네. 하얗고 펄럭이는 옷을 입은 놈들. 갑자기 사라졌을 땐 기절초풍했지. 그건 경공도 뭣도 아니었어.”

서달이었다.

그는 천인회를 인식하지 못한 대부분의 무림인들과 달리 놈들을 목격했고,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고 했다.

“서 장군님과 내겐 보였지만, 폐하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저게 뭐 하는 거냐고 물으시더군. 적색창기병도 대부분이 감지하지 못했어. 몽골 놈들의 주술도 기가 막혔지만, 이건 더하지 않나! 정체가 뭔가, 그놈들?”

상우춘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는 전쟁을 거치며 마른 비에 대한 호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질문에 응했다.

“무공 경지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적색창기병에서도 지휘관급은 놈들을 보았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일정 무공 수위를 달성한 고수들의 이목을 속이진 못한다는 거겠지.”

놈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영령이야 특수한 능력을 지녔으니 예외로 치고, 마른 비 일행 중 소이만 놈들을 보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었다.

영령과 소이를 제외한 전원이 칠룡과 사호 이상 가는 고수들이었으니 충분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그럼 갑자기 사라진 건 어떻게 생각해?”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서달과 상우춘도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주원장의 호위를 강화해야겠다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마른 비는 방을 나섰다.

“후우… 답답하네.”

마른 비는 숙소로 돌아와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놈들을 쫓을 방법은 둘째치고, 무슨 짓을 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밤이 깊어갈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실마리를 들고 숙소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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