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육정마 추격전.
마교의 총단이 있는 천산의 턱 밑까지 쫓아가서 파융의 목을 베어온 일화다.
구칠에게 정의개란 별호가 붙게 된 사건이자, 중원의 협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열광하게 만든 계기였다.
비록 파융이 마교에서 쫓겨나며 팔 하나가 잘린 상태였다지만, 구칠은 상위 서열을 차지했던 그를 죽임으로써 단번에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장로님은 멀쩡했네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무언가가 다르어요. 장담컨대 그 사람은 구칠 장로님이 아니네요.”
마른 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껍질 같은 게 구칠을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후개의 말을 듣자마자 마른 비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시도해볼 만한 계획이 있어. 한번 해보자.”
“정말 도와주어요? 이렇게 쉽게? 저를 뭘 믿고?”
후개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마른 비의 말을 듣자 그 표정은 더욱 짙어졌다.
“그냥 느낌이야. 구칠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일 거라는 느낌.”
“……진짜 답 없는 사람이어요. 그 느낌이 틀렸으면 어쩌려고?”
후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마른 비를 똑바로 쳐다봤다.
“명색이 개방의 후개네요.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빈손으로 도와달라고 할 만큼 염치없지 않어요. 선물을 들고 왔네요. 그걸로 거래해요.”
이번엔 마른 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보기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도와줄게. 나도 구칠을 볼 때마다 영 찜찜했어. 그리고 당신이 마음에 들거든. 우리 친구하자.”
마른 비는 씩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후개는 마른 비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건 뭐네요? 설마 ‘주먹을 마주치면 이제부터 친구다.’ 뭐 그런 거?”
“어? 어… 맞아. 우리 부족의 간이 인사법인데….”
“완전 싫어. 유치하고 믿을 수도 없네요. 이런 거 한다고 친구가 되면 세상에 친구 아닌 사람 없겠어요. 그리고 난 수왕과 친구할 생각 없네요.”
후개는 딱 질색이라는 듯 말했다.
“우정이란 불확실한 감정에 기대는 것보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걸 주고받는 거래가 깔끔하네요. 그래서 오늘 낮에 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어요.”
그건 매우 절실한 이야기였다.
마른 비가 눈을 빛내자, 후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천인회. 빙 소저가 말했듯이 초능자들의 집단이네요. 수백 년간 존속해온 단체이며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들이어요. 그들은 우연찮게 타고난 능력 하나로 자신들이 하늘의 점지를 받은 신인류라고 믿네요.”
“거기까진 들었어. 놈들의 힘은 어때?”
후개는 천인회에 대해 열심히 알아봤는지 막힘없이 술술 뱉었다.
“실제적인 전투 능력은 불명. 워낙 은밀히 활동하는 데다가 아까 보았듯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놈들을 잡아낼 수 없네요. 고대 문헌을 뒤적인 결과, 개인의 능력 편차가 심하다는 것과 무공이 발달하기 전 시대에는 구파일방을 가볍게 찍어 누르던 때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음… 상당하네.”
후개는 긴 이야기를 쏟아내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꺼냈다.
“공백. 낮에 본 동자 같은 사내의 이름이네요. 양지로 나온 천인회의 행동대장 같은 인물이어요.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것. 그건 저도 깜짝 놀랐는데, 비슷한 경우가 목격된 경우가 있었네요. 그건 천인회 중에서도 대단히 특수한 능력이며, 여러 가지 초능들을 중첩해서 사용한 결과 같네요.”
무공과 달리 개인의 선천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거라서 정확한 판단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놈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
후개가 짧은 시간 동안 구칠의 이목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다는 게 느껴졌다.
“이건 빙 소저의 말을 듣고 알아본 건데…… 빙궁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네요. 방주만이 열람 가능한 기밀이라 저도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어요. 다만 낮의 대화로 미루어 천인회가 자신들의 주인을 깨우려 하고 있고, 거기에 영 소저가 필요하다는 건 추측 가능하겠네요.”
후개가 거래를 위해 준비한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 마른 비의 도움을 받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긴 듯했다.
“천하 돌아가는 것, 알아요?”
“응?”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마른 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후개는 곧바로 말을 꺼냈다.
“중원은 넓어요. 수왕의 생각보다 훨씬 더. 정도맹과 사도련이 정파와 사파의 연합체로서 천하를 아우른다고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이네요. 중원의 각 지역은 백 년간 단절된 채 지내왔고, 각 성에서는 자체적인 생태계가 싹텄어요.”
중원을 양분하는 정보 집단의 차기 수장이 바라보는 강호였다.
그는 무척이나 우려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정도맹과 사도련은 안이하네요. 천검은 욕심이 많지만 그의 시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패군은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양지에 드러난 무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어요. 이번 북벌을 기점으로 기상천외한 세력들이 쏟아져 나올 거네요.”
혼란.
후개는 중원에 찾아올 혼란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수교와의 조우에서 느꼈듯이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천기자 어르신은 하늘의 안배니, 음양의 조화니, 달이 차고 기우니 하시지만, 그건 전혀 근거 없는 말이어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힘을 믿어야 하네요. 전 그 일환으로 수왕을 선택했고, 그래서 이 거래를 제안하는 거네요.”
처음부터 여기까지 준비하고 온 걸까?
후개는 막힘이 없었다.
갑자기 천하정세로 이어진 대화의 흐름에 마른 비가 두통을 느낄 무렵, 후개는 말했다.
“구칠의 정체를 밝히는 걸 도와주길 바라네요. 그럼 전 그를 쳐내고 개방을 통합하여 방주가 될 거네요. 이건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아니어요. 방대한 정보를 취합한 끝에 십만 개방을 이끌 존재로 저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네요.”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마른 비는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이런 구구절절한 거래가 아니어도 그를 도와주려 했다.
마른 비가 입을 열기 전에, 후개는 그가 준비한 회심의 패를 꺼냈다.
“샅샅이 검토한 결과 수왕의 행보는 언제나 옳았다는 판단을 내렸네요. 의와 협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수왕의 길을 밝혀주겠어요. 개방의 정보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게 협력하겠다는 뜻이어요.”
후개는 당당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도와달라고 왔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가를 들고 온 것이다.
‘별나지만 대단한 인간이네.’
마른 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먹을 내밀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친구….”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싫네요.”
또한 후개는 확고한 인간이었다.
후개와 논의를 마친 마른 비는 그가 돌아가는 걸 보자마자 잠이 들었다.
별비는 몸이 찌뿌둥했는지 연회가 끝나자마자 성 밖으로 나가서 근처의 산을 헤매다 돌아왔고, 마른 비는 별비의 기척이 느껴졌을 때 비로소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자그마치 한나절이 지나 있었다.
“손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른 비가 일어나자 시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전날 그를 유혹했던 향단이였는데, 그녀는 차분한 말투와 달리 더욱 뜨거워진 눈빛을 보냈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른 비를 찾은 손님들 때문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새벽부터 숙소 앞에 진을 친 것이다.
마른 비를 영입하기 위해, 혹은 그와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기 위해 무림의 거물들은 물론이고 군부의 장수들까지 숙소를 찾았다.
“이런 건 원의 고관대작들을 모실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어요. 진짜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향단이가 끈끈한 눈빛을 보냈지만, 마른 비가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적당한 핑계를 말해주자, 향단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손님들을 물리기 위해 나갔다.
이런 일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공자님… 이따가 저녁에 봬요.”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 달착지근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남겼다.
마른 비는 지금 황성에서 향단이가 가장 무서웠다.
그래서 절대 혼자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쩌저정! 투콱! 꽈광―!
“크아악!”
“커헉…!”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진짜 징글징글한 인간들이었다.
“후욱, 훅…! 대충 끝나가는 거 같은데? 삐약이들, 이게 전부냐?!”
정원 쪽에서 철중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른 비는 밥을 먹자고 하려다가 흥을 깨기 싫어서 여규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서달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들어가 있었다.
여휘의 시신을 확인하고 건네받기 위해서였다.
“일어났구나, 비아야. 밥 안 먹었지?”
전룡과 영령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났다.
둘은 입구로 들어오려다가 끝도 없이 늘어선 인간들을 보고 월담을 감행한 거였다.
“여기도 그러네! 진짜 끈질긴 인간들이야! 싫다는 데도 계속 와!”
전룡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치를 떠는 영령을 보며, 마른 비는 빙그레 웃었다.
“응, 밥 안 먹었어. 같이 먹자. 할 말도 있어.”
마른 비는 후개에게 들은 천인회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전룡과 영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고, 그새 빙설연과 대화를 나누었는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린 초원을 넘어 빙궁에 가기로 했다.”
천인회가 영령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이유.
그 원인이 빙궁에 있을 거라는 후개의 짐작은 맞았다.
전룡은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지금껏 지긋지긋하게 쫓겨 다녔다. 천인회의 위치를 안다면 찾아가겠지만, 그건 도무지 알 방도가 없어. 놈들은 령이를 노리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럼 차라리 근본적인 원인을 마주하기로 했다.”
전룡다운 결정이었다.
어딘가에 몸을 의탁하거나 숨지 않고 북해빙궁을 찾아가 궁주와 대면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궁주에게 숨겨진 비사를 듣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작정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곧 약속이 있어. 지금 당장은 같이 가기 힘들 것 같아.”
마른 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삼 년 전에 한 약속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룡은 무슨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우리 일이다.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도움을 받았어. 걱정하지 마라. 다 잘될 거다.”
전룡은 마른 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령이의 안전이 확보되면 그땐 우리가 널 찾겠다. 제법 많은 곳을 돌았지만, 우린 항상 추격을 걱정하며 피 말리는 삶을 살았어. 일이 마무리되면 비아 너와 여유 있게 중원을 유람하고 싶다.”
과묵한 사내의 묵직한 말이었다.
전룡의 진심은 마른 비의 가슴에 진하게 내려앉았다.
마른 비는 감동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끝나는 대로 뒤를 따라갈게. 북쪽에서 봐, 형.”
새롭게 이어지는 길이었다.
마른 비는 어깨에 얹힌 전룡의 손을 붙잡고 후일을 기약했다.
짹짹―
다음 날 아침, 마른 비는 대도 북서쪽에 위치한 야산에 올랐다.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는 하루하고도 한나절을 싸웠고, 그대로 쓰러져서 뒤엉킨 채 잠이 들었다.
황궁을 다녀온 여규도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든 뒤였다.
별비와 산에 오른 마른 비가 맑은 공기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수왕. 무슨 일로 나를 불렀나?”
고개를 돌린 곳엔 구칠과 그의 수행원들, 그리고 구칠의 뒤에 몸을 숨긴 채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는 후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