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어. 왔어?”
마른 비는 천천히 등을 돌려서 구칠을 마주 봤다.
어제 서신을 보내서 구칠에게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후개를 대동한 채 이곳에서 보자고 한 것이다.
구칠은 마른 비가 만나자고 한 이유를 예상한 듯 기꺼운 표정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할 땐 언제고 생각이 바뀐 모양이지?”
구칠은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마른 비는 아무 말 없이 서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잘 생각했네! 아주 잘 생각했어!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후개께선 곧 정신을 차릴 걸세. 그럼 깜짝 놀랄 거야. 후개의 총명함과 걸출함은 어떤 후기지수에게도 밀리지 않지! 자네와도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걸세.”
마른 비는 이 상황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구칠은 그게 호의적인 미소라고 여겼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분란이 정리되고 후개께서 방주가 되면 자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걸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본방을 찾게나!”
구칠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후개를 반대하는 쪽에서 누구를 섭외하든 지금 중원에서 마른 비의 명성과 영향력을 능가할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림 내부로 한정시킨다면 더 비중 있는 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마른 비의 연줄은 군부는 물론이고 주원장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이토록 황제와 가까운 무림인은 전무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걸세! 거지들의 집단이라고 얕보기 일쑤지만, 개방의 전력은 알면 알수록 엄청나거든!”
마른 비는 그가 실컷 떠들도록 놔둔 뒤에 조용히 말했다.
“당신 덕분에 후개를 알게 됐잖아? 나도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소개? 오오, 수왕의 친구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구칠은 한껏 들떠서 마른 비의 옆에 섰다.
그리고 걷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일다경쯤 지났을까?
저 멀리 폐 사찰이 보일 때였다.
신나게 걷던 구칠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자, 잠깐? 이건…!”
심신을 옥죄는 기운.
주변 풍경이 새카맣게 일그러진다는 착각이 들 만큼 농밀한 마기였다.
구칠은 일순간 숨이 턱 막혀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질린 표정으로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다.
“수, 수왕…! 설마 소개해 준다는 친구가?”
지금 대도 근처에서 이토록 강대한 마기를 뿜어낼 존재는 둘밖에 없었다.
소교주와 권마.
그리고 주원장에게 뒤통수를 맞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그들의 심정을 반영하듯 마기에선 소름 끼치는 기운이 스멀댔다.
구칠은 지금 자신이 범의 아가리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자네 제정신인가?! 내가 개방의 장로라는 걸 잊은 게야?! 세상에, 소개할 사람이 없어서 마교의 인물들을…!”
정의개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악을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중원 무림인들에게 마교란 악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구칠이 버럭 소리쳤지만, 마른 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중원 무림인들은 사해는 동도란 말을 자주 쓰던데. 같이 전쟁도 치른 사이잖아. 이번 기회에 인맥의 폭을 넓혀봐. 장담하는데 아주 유쾌한 경험이 될 거야.”
마른 비는 웃었고, 구칠은 얼굴이 벌게진 채 푸들푸들 떨었다.
“내가 잘못 봤군. 순수한 게 아니라 아예 생각이 없는 거였어! 백치도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걸세! 난 가겠네! 맙소사, 어울릴 자가 없어서 마교의 쓰레기들을 내게…!”
“뭐라고?”
굵직한 저음이 들려오는 순간, 구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떨리는 눈길이 향한 곳엔 흑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허허허.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야. 면전에서 쓰레기라는 소릴 듣게 되다니. 천검도 감히 노부 앞에서 그런 막말을 늘어놓진 못할 터인데.”
권마는 뚜둑 소리가 나게 목을 꺾으며 말했다.
“말해봐라, 애송아. 주원장에게 놀아나서 본교가 우스워 보인 게냐? 아니면 내전 때문에 본교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고 여긴 게야? 그도 아니면… 노부가 같잖게 보였나? 그따위 소릴 내뱉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 그게 아니라….”
구칠의 눈은 처량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무언가를 퍼뜩 깨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표정을 싹 바꾼 구칠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애송이라니?! 방금 애송이라 하였는가! 이 구칠에게?! 권마 그대가 천마신교의 장로라 하나, 나 역시 대 개방의 장로요! 가까이 있는 줄 모르고 실언한 점은 사과하리다! 허나 그대 또한 내게 사과해야 할 것이오!”
눈을 부릅뜬 구칠은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힘의 열세.
하지만 마교도의 앞에서 주눅 든 모습 따윈 보이지 않는다.
설령 여기서 숨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버티고 선 구칠은 그의 별호가 왜 정의개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호오… 노부의 기세를 떨쳐 낸단 말이지? 대충 급조한 장난감은 아니로군.”
장난감이란 말을 듣는 순간, 구칠의 눈이 꿈틀댔다.
하지만 그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변화였고, 그는 더욱 기세를 돋우며 호통쳤다.
“장난감이라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네놈이야말로 정신이 나갔구나! 정녕 여기서 끝을 보잔 말인가!”
구칠은 불같이 분노하며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권마의 눈이 가늘어졌고,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원하던 바다. 그래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겠지. 천산의 턱 밑까지 침투했다는 정의개의 실력이 어떤지 한번 보자꾸나.”
타구봉을 쥔 손이 움찔했지만, 구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선 악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노강호의 기백이 드러날 뿐이었다.
구칠은 권마를 노려보며 자신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에겐 미안하다. 괜히 노부를 따라왔다가 목숨을 잃게 생겼구나. 허나 이놈들은 결코 대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죽음으로 소교주와 권마를 처치할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터.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대도에 주둔 중인 정파의 세력이 복수할 거란 걸 내비치는 말이었다.
그건 우회적인 협박인 동시에 자연스럽게 수행원들을 싸움에 끌어들이는 말이기도 했다.
구칠에게 감복한 개방의 제자들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걱정 마십시오, 장로님! 저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교 칠대 장로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백! 감명받았습니다!”
“저희가 먼저 나서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뒤로…!”
“후개 님을 보호하라! 설령 우리는 죽더라도 후개 님만은 살려 보내야 해!”
분연히 일어선 개방의 방도들이 구칠을 둘러쌌다.
그들은 자신들을 넘기 전엔 구칠을 건드릴 수 없다는 듯 권마를 노려봤다.
구칠이 다급해진 건 권마의 표정 때문이었다.
이쯤이면 물러서는 걸 고려할 만도 한데,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수왕! 자네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마른 비가 중재를 한다면 어떻게든 상황이 진정될 수도 있다.
구칠이 마른 비를 흘깃거렸지만, 그는 구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구칠이 당황할 때, 의외의 인물이 나섰다.
“그만. 개방의 제자들은 나서지 않네요. 뒤로 물러나시어요.”
“……?!”
난데없는 목소리에 개방 방도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꿈에서도 듣고 싶었던 명료한 음성.
십만 개방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후개가 맑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후개 님?! 어, 어떻게?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개방의 제자들도 놀랐지만,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건 구칠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권마가 통쾌한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크하하! 대 개방의 장로께서 표정 관리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무기를 꺼냈으면 휘둘러 봐야지! 이리 와라, 애송아!”
권마는 성큼성큼 다가섰고, 개방의 제자들은 바짝 긴장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후개는 지엄한 목소리로 재차 명령했다.
“물러나라고 했어요! 전장에서 후개의 명은 곧 방주의 명! 명을 어길 건가요?”
수행원들은 혼란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주춤대며 물러섰다.
“어, 어떻게…….”
구칠은 넋이 나가 있다가 뒤늦게 홀로 남겨진 걸 깨달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권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어디 얼마나 신경 써서 만든 놈인지 보자꾸나!”
부아아앙―!
도끼를 휘두르는 듯한 음향이 바람을 갈랐다.
권마의 독문무공, 마령철권(魔靈鐵券)이 태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쇄도했다.
구칠은 기겁을 하며 타구봉을 움직여 방어에 나섰다.
“크흡…!”
타구십팔초(打狗十八招).
개방을 상징하는 봉법이 눈부신 변화를 그렸다.
엄밀한 수비식이 펼쳐졌으나, 마령철권에 담긴 패력은 구칠의 방어를 깨부수고 엄습했다.
“끄윽! 취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구칠의 눈이 풀리며 휘청대기 시작했다.
그는 목숨이 오가는 찰나에 만취한 취객처럼 비틀대고 있었다.
휘리릭―
궤적을 종잡을 수 없는 변화.
중원에 존재하는 보법 중 동선을 가장 예측하기 힘들다는 취팔선보(醉八仙步)가 펼쳐졌다.
구칠의 발이 ‘之’(갈 지)자를 그리는 순간, 권마의 주먹이 허공을 때렸다.
“딸꾹!”
권마의 품으로 파고든 구칠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흐릿하던 눈이 빛을 되찾고, 개방의 장로에게만 전수된다는 백결신장(白結神掌)이 권마의 몸을 때렸다.
투우웅―!
‘투웅?’
평소와는 다른 소리였다.
구칠이 눈을 들었을 때, 권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게 전력이냐?”
구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온 힘을 다한 백결신장을 정통으로 맞고도 권마는 건재했다.
타격 부위에 두른 호신강기를 뚫지 못한 것이다.
“일단 눕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스팟―!
두툼한 수도(手刀)가 구칠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의식은 남겨둔 채 육체만 마비시키는 일격.
권마는 깔끔하게 뇌를 흔들어서 육신의 제어를 앗아버렸고, 구칠은 하늘이 흔들리는 걸 느끼며 무너져 내렸다.
“어… 우어….”
권마는 침을 질질 흘리는 구칠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무공까지 제대로 가르쳤군. 이 정도라면 고문도 먹히지 않겠어. 저로선 판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소교주님.”
권마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흑색 장포를 걸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구칠의 앞까지 걸어온 천진운은 경련하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제대로 만든 장난감이군요. 이 정도면 상당히 공을 들였겠어.”
후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개방의 제자들을 제지했고, 마른 비는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천진운은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조금 거친 방법을 써도 되겠나?”
마른 비는 대꾸하는 대신 후개를 바라봤다.
후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진운은 손바닥을 펴서 구칠에게 향했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얼마나 버티는지.”
천진운의 몸에서 칠흑의 마기가 치솟고,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새카만 마기가 천진운의 손바닥으로부터 쏟아지자, 구칠이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크, 크아악! 카아아아악!”
그건 마치 어둠이 노을을 뜯어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검은 기운이 구칠을 뒤덮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주홍빛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주홍빛 기운은 천진운의 마기로부터 구칠을 보호하듯 저항했지만, 곧 강제로 뜯겨 나와 소멸했다.
만마 위에 군림하는 천마신공.
마에 근원을 둔 기운이라면 천마의 핏줄에게 계승되는 천마신기를 당해낼 수 없다.
그건 마치 태생부터 정해진 상하 관계나 다름없었다.
뿌드득- 뿌득! 꾸드드득―!
“어?!”
조용히 지켜보던 마른 비가 놀라서 외쳤다.
구칠의 몸속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체형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거… 강무재 아저씨가 했던…!”
축골공.
야투에 침입하기 위해 문지기로 변장했던 강무재가 선보인 기예였다.
하지만 천진운은 고개를 저었다.
“축골공 따위가 아니다. 뼈만이 아니라 근육과 살까지도 가공하는 기술이야. 변환체골공(變換體骨功). 본교의 특급 첩자들이 사용하는 기예지.”
천진운은 신음하는 구칠의 얼굴을 붙잡고 자세히 뜯어봤다.
그리고 확신하는 어투로 말했다.
“귀와 턱으로 연결되는 부위에 미세하게 꿰맨 흔적이 있다. 이건 원래 이놈의 얼굴이 아니야.”
천진운은 구칠 행세를 하던 놈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비아, 네 말이 맞았다. 이놈은 구칠이 아니야. 구칠을 죽이고, 인피를 도려내서 제 얼굴에 이식한 거다.”
천진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놈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본교에서 침투시킨 세작이 분명하다. 애초부터 첩자로 쓰기 위해 키워진 놈이야. 천마신기에 반응한 주홍빛 마기……. 확실해. 이놈은 ‘그’가 키운 장난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