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장난감?”
흘려듣기 힘든 불쾌함에 마른 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진운은 마른 비의 심정을 눈치채고 오해 말라는 듯 덧붙였다.
“그가 특정 목적을 위해 키운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에게 쓸 말은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 부르니 굳어져 버렸지. 그리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야.”
천진운은 천산이 있는 북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겐 모든 게 유희일 뿐이거든. 첩자를 키우는 것도, 천하 정세에 개입하는 것도, 누군가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어쩌면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 전쟁도 그에겐 무료함을 달래줄 오락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길 바란다는 어투였다.
나의 모든 걸 던진 투쟁이 누군가에게는 장난에 불과하다면 어떤 심정이 들까?
천진운 같은 사내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꿈틀대는 첩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변환체골공을 습득할 정도라면 목소리를 바꾸는 건 일도 아니야. 표적의 모든 걸 그대로 구현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알아채기 힘들지. 하지만 그게 인피를 꿰맨 자국이나 미세하게 흘러나가는 본신의 기운까지 숨겨주진 못해.”
천진운은 구칠을 흉내 낸 자를 발로 툭 치며 말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일에 투입되는 놈들은 그에게 특수한 내공심법을 전수받는다. 아까 본 주홍빛 기운이 그것이야. 그걸 운용함으로써 의심받을 만한 터럭 같은 흔적까지 숨길 수 있지. 그게 본교의 특급 첩자라는 증거이자 그의 장난감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이다.”
천진운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비아 넌 어떻게 이놈이 구칠이 아니란 걸 알아챈 거냐? 천마신공이 아닌 이상 식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터인데.”
권마조차 미리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알아챌 수 없었다.
후개도 본인의 목숨이 위협받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궁금한 얼굴을 하자, 마른 비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냥 느낌으로.”
“느낌…….”
후개는 눈썹을 찌푸렸고, 소교주와 권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절정의 문턱을 넘은 강자들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느낌이란 마른 비가 지닌 내공의 근원과 관련이 있으리란 것을.
“이, 이게 대체……. 그럼 저분이… 아니, 저자가 구 장로님이 아니란 말이오?”
넋이 나가 있던 개방의 제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천진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그럴 리가 없소! 구 장로님과 동행하며 무공을 수도 없이 견식했단 말이오! 그건 분명 정통의 개방 무공이었소! 아까 취팔선보와 백결신장도…!”
천진운은 끝까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본교에게 한 번이라도 털리지 않은 중원의 문파가 얼마나 될 것 같나? 문주에게 일인비전으로 계승되는 무공을 제외하면 웬만한 건 천산의 비고에 전부 정리되어 있다.”
“그, 그럴 수가……. 그럼 진짜 구 장로님께선 육정마를 쫓아 천산에 갔을 때 이미?”
천진운은 그럴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꿔치기 당했겠지.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파융은 더러운 행실로 본교에서 쫓겨난 녀석이야. 구칠의 얼굴을 도려내 이놈에게 씌우고, 파융의 목을 베어 들려줬겠지. 중원 무림인들은 열광하며 이놈을 찬양했을 거고.”
“사실… 이냐? 정말 구 장로님께서 돌아가신 거냔 말이다!”
개방의 제자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린 첩자는 개방의 제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천진운을 올려다봤다.
“소교주…! 그분께 반기를 든 것도 모자라 이런 짓을…! 개방의 중추에 침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느냐! 너는 그분이 아니라 교를 배신한 것이다!”
“반기? 배신이라고?”
천진운의 눈썹이 꿈틀댔다.
새카만 마기가 흘러나오고, 그의 눈이 붉게 물들자 첩자는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사육된 끄나풀 주제에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만마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마.
천마의 그림자가 사위를 뒤덮자, 첩자는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세작이 되기 전부터 세뇌되다시피 한 여덟 글자를 되뇌었다.
“처, 천마군림(天魔君臨)……. 만마앙복(萬魔仰伏)…!”
“내가 바로 천마의 진실한 후예다. 내가 곧 교이며, 나의 뜻이 곧 신교의 의지다. 말하라.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냐?”
첩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몸에 깃든 무언가가 천마신기에 극렬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듯했다.
눈을 부릅뜨고 거품을 흘리던 첩자가 띄엄띄엄 내뱉었다.
“유, 유일무이한 마…. 마의 조종(祖宗)…. 위대한 신교의 주, 주인…!”
퍼어억―!
거기까지였다.
간질병 환자처럼 몸을 떨던 그는 주인이란 말을 뱉는 순간, 머리가 터져 버렸다.
정적이 내려앉고, 천진운은 기세를 거뒀다.
“기폭제를 머리에 심어놨군.”
이 정도 수준의 첩자라면 심문 따윈 불가능하다.
기밀을 발설하거나 특정 조건에 노출되면 목숨이 끊기게끔 조치했을 테니까.
그게 장난감을 키우는 그의 방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천진운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멀찍이서 지켜보던 개방의 제자들이 난리를 치며 토악질을 했다.
“주인이란 단어에도 금제를 걸어놓은 건가? 고약한 장난이로군. 아니, 본심이 묻어난 건가?”
천진운이 중얼댈 때, 마른 비가 물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그’가 누구야?”
모두가 궁금한 부분이었다.
특히 후개는 천진운의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번쩍였다.
천진운은 개방의 인물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에 말했다.
“그건 본교의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 성미 고약하고 무지막지한 노인네라고만 해두지.”
그렇게 대꾸하고, 천진운은 후개를 바라봤다.
“비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손대지 않았을 거다. 첩자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야. 내전 중인 걸 떠나서, 개방의 중추에 침투한 본교의 인물을 제거한 건 사실이니까.”
후개는 천진운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는 계산에 철저하며, 빚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당당하게 허리를 편 후개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난 방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오. 이 빚, 동일한 방식과 같은 무게로 갚으리다. 당신이 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돕겠소. 한 번에 한해,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든 도움을 요청해도 좋소.”
“어?!”
후개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른 비가 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멀쩡히 말 잘하잖아? 나랑 이야기할 때는 왜 그런 거야?”
“사고의 후유증이어요. 심신에 큰 충격을 받은 뒤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병’에 걸렸네요.”
생각보다 더 이상한 놈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이 ‘또 시작이다.’라며 이마를 짚었고, 마른 비는 ‘진짜 그런 병이 있어?’하고 되물었다.
후개가 마른 비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모든 게 수왕 덕이어요. 저는 제 위치를 되찾을 거고, 개방의 분열도 종지부를 찍을 거네요. 구 장로님께서도 이젠 편히 잠드실 수 있겠죠.”
개방의 제자들은 후개의 말을 듣고서야 구칠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가짜란 걸 직접 보고서도 이게 마교도들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열하며 주저앉았고,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구칠의 육신이 아니란 걸 깨닫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들 눈 감어요.”
뚜벅뚜벅 걸어간 후개는 머리가 터진 첩자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소도를 꺼내 그의 안면을 도려냈다.
부패하지 않도록 약물에 절여진 얼굴 가죽.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진짜 구칠의 일부였다.
“총단으로 복귀하네요. 미리 상황을 알리고 장례를 준비시켜요. 이제부터 바빠질 거네요.”
후개는 목례를 남기고 떠나갔다.
사고를 당하고 심신을 회복하는 동안 구칠이 일구어 놓은 세력은 전부 그에게 흡수될 것이다.
구칠과 대립하던 자들도 반목을 그치고 하나로 뭉칠 것이며, 개방은 후개를 중심으로 재편될 게 분명했다.
마른 비가 보기에 후개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자였다.
‘내가 곧 교이며, 나의 뜻이 곧 신교의 의지다…….’
후개는 폐 사찰에서 멀어지며 천진운이 남긴 말을 되새겼다.
아쉽게도 ‘그’라는 존재에 대해선 듣지 못했지만, 그 말 덕분에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천마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아무리 소교주라도 천마가 건재했다면 그런 말을 뱉을 순 없다.
교주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든, 그가 죽었기 때문이든 지금 벌어지는 마교의 내전이 그것 때문이라는 가정을 세워봄 직했다.
‘유익한 방문이었군.’
수왕에게 접촉하자마자 골머리를 앓던 부분들이 말끔해졌다.
후개는 마른 비를 힐끗 본 후 총단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 와주었구나.”
폐 사찰 안에는 간소한 술상이 준비돼 있었다.
마른 비와 마주 앉은 천진운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오라며? 술 한잔 하자고 했잖아.”
마른 비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진짜 올 줄은 몰랐지. 지금 나는 오갈 데 없는 처지잖나. 사방이 온통 적뿐이야. 말 그대로 고립무원인 상황이다.”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또한 이래도 괜찮겠냐는 걱정이기도 했다.
마른 비는 곧바로 대꾸하는 대신 술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것치고는 안주도 제대로 준비했는데? 말만 그렇게 하고, 올 거라고 확신했던 거 아니야?”
마른 비가 짓궂게 웃자 천진운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맞다, 맞아! 난 그랬지. 허나 수하들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야. 이런 상황에서 네가 오겠냐고 묻더군. 지금 우리와 엮이는 건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인데 네가 올 리 없다, 괜히 기다렸다가 실망하지 말고 바로 떠나자, 뭐 그런 뜻이었지.”
천진운은 술을 쭉 들이켜며 말했다.
“희한한 일이야. 난 네가 꼭 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말이야.”
그 말에서, 마른 비는 천진운의 진심을 느꼈다.
교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자신이 그렇듯이 천진운도 자신을 친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진한 마음을 받으며, 마른 비가 물었다.
“괜찮아?”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온 거였다.
위로든 격려든 응원이든, 곤란에 처한 친구의 곁에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온 것이다.
천진운은 자조적으로 웃었지만, 곧 그의 눈빛엔 힘이 깃들었다.
“괜찮을 리가. 수하들 앞에선 태연한 척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다. 지난 이틀간 주원장에게 달려가려는 몸을 붙드느라 여간 고생한 게 아니야.”
천진운은 잔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술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교의 소교주가 친구의 앞에서 솔직한 심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번 건 회심의 한 수였거든. 도무지 뒤집을 수 없는 판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패.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성급했던 모양이다. 주원장이란 인간의 됨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어쩌면 알면서 애써 무시했던 걸지도. 그만큼 초조했거든.”
천진운은 내공으로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술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인 그는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야? 방법은 있어?”
주원장이 소교주와 척을 지고도 놔준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이이제이.
마교의 반란분자들과 무칼리를 충돌시킨 것처럼, 주원장은 소교주를 이용해 ‘그’라는 존재를 견제할 생각이었다.
뻔히 알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수.
하지만 천진운의 눈에 힘이 깃든 건 예측을 벗어난 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아까 첩자에게 말하다가 새삼 깨달았지. 아버님께서 움직일 수 없는 지금, 내가 곧 교의 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라는걸.”
지금은 천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손길이 뿌리내린 그곳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사지였다.
중원을 정처 없이 떠돌 수도 없다.
여긴 아군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고, 마교라면 이를 가는 적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우선 사영과 합류한다. 일이 잘 풀린다면 난 상당한 힘을 얻게 될 거야. 그리고 나를 따르는 세력을 집결시킨다. 놈들의 예측을 비트는 의외의 수. 나는 남쪽으로 갈 것이다.”
천진운의 눈이 대륙의 최남단,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의 경계 어딘가를 바라봤다.
“십만대산(十萬大山). 십만 개의 봉우리와 천험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땅이야. 난 그곳에 나의 터전을 세우고 힘을 키울 것이다.”
천진운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곳이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곧 총단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