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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13화 (313/463)

313화

마른 비가 천진운을 배웅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낸 천진운은 마른 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세상은 넓구나. 대단한 사람이 정말 많아.”

자신이 천진운의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겠지만, 영토를 점유하고 나만의 세력을 키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건 거대 집단의 수장이나 왕이 될 자질을 갖춘 자들이 할 법한 발상이었으니까.

친구를 사귀고, 동료를 만들며, 많은 사람을 아우를 자신은 있지만, 그건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물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마른 비의 장기는 주원장이나 천진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둘이 마른 비를 보며 감탄했듯이 마른 비 또한 자신과는 다른 능력을 갖춘 자들을 보며 깨닫는 바가 컸다.

“왔구나, 비아야.”

마른 비의 상념을 깬 건 여규였다.

하루 종일 정원에서 자빠져 자고 있는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를 지나자, 여행 준비를 마친 여규가 마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여규는 차분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단정히 앉은 그의 무릎 위엔 보자기에 싼 목곽이 놓여 있었다.

주검을 화장하고 남은 뼛가루.

여휘의 유골함이었다.

“아! 그거 아저씨의…!”

천진운을 만나기 위해 나설 때, 여규가 입궁했다는 건 시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깨우지 않고 간 것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른 비는 여규의 손을 잡고 어깨를 다독이며 슬픔을 나누었다.

“삼년 전의 약속……. 난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비아야.”

여규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이 와중에도 마른 비를 걱정했고, 여정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보를 알리고 장례를 치러야 하니 여규의 중원행은 여기까지였다.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저씨 일이 먼저지. 같이 따라가지 못해서 내가 미안해.”

약속만 아니었다면 마른 비도 여규와 함께 운남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영령의 안전을 위해 빙궁을 찾아가기로 했으니 고향 땅을 밟는 건 그 다음이었다.

“괜찮아. 보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내 몫까지 전부 경험하고 와. 좋은 사람들도 더 많이 만나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중원으로 나오자.”

족장의 자리를 양보한 마른 비와 달리 여규는 돌아가면 문파의 핵심 전력으로 중용될 터였다.

지금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중원을 돌아보는 건 까마득한 훗날의 일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여규는 마른 비를 힘껏 끌어안은 뒤 숙소를 나섰다.

“별비야. 비아를 부탁해. 이 덜렁이 어디 가서 다치지 않게 잘 돌봐줘.”

우두커니 서 있던 별비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리고 여규의 얼굴에 머리를 비볐다.

별비의 흔치 않은 애정표현에 여규는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조심히 가, 규야. 운남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들를게.”

마른 비의 말에, 여규는 다시 한번 마른 비를 안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천천히 와. 령이를 괴롭히는 놈들 혼줄을 내주고! 절대 방심하지 말고 몸조심해.”

마른 비는 여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움찔했다.

“어? 중구랑은 인사했나?”

“의리라곤 별비의 코딱지만큼도 없는 시벌 새끼. 같이 지낸 게 얼만데 나한테는 인사도 안 하고 가버려?”

잠에서 깬 철중구는 온종일 투덜댔다.

소속과 출신을 넘어 끈끈하게 맺어진 사이라고 믿었는데, 서운할 만도 했다.

여규가 부고로 정신이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함은 가시지 않았다.

“서신을 남겼잖아. 중구 네가 탈진해서 뻗어 있는 바람에 일부러 깨우지 않은 건데 그쯤하고 이해해줘.”

둘은 뒤늦게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발견했다.

여규는 정성스런 필치로 철중구에 대한 우정과 고마움을 적어 놓았는데, 철중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서신 쪼가리랑 직접 인사하는 거랑 같냐? 어떻게 미리 얘기도 안 하고 휙 가버릴 수가 있어! 이건 배려가 아냐! 하여튼 정파 새끼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든다니까…….”

그러면서도 서신을 곱게 접어서 품에 넣었다.

마른 비는 그게 왠지 귀여워서 픽 웃어 버렸다.

“왜, 왜 인마! 그럼 버리냐?! 버려?!”

“에이,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철중구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다가 삿대질을 했다.

“넌 또 왜 혼자 가는데?! 구칠 그 새끼 정체를 밝히는 자리면 나도 불렀어야지! 봐라! 내가 뭐랬냐?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너 완전히 탈진해서 뻗어 있었잖아. 그리고 소교주를 만나는 자린데 안 불편했겠어?”

구석에서 얼굴을 문지르며 대화를 듣던 사내가 중얼댔다.

“전부 대장을 까먹는군. 무리에서 대장의 인지도는 이 정도였나.”

옆에 앉아 있던 함윤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다. 젠장, 왜 갑자기 전부 눈이 뒤집혀서……. 이럴 줄 알았으면 수왕과 내기를 할걸. 어차피 수하로 들어갈 거면 수왕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을 텐데.”

밤새 싸운 결과, 철중구는 혼자서 함윤 패거리를 전부 눕혀버렸다.

절강성의 내로라하는 싸움꾼들이 그의 수하가 된 것이다.

말을 번복할 순 없으니까 따르긴 하는데, 그들은 아직 철중구에게 마음으로 승복하진 않은 듯했다.

“얘? 비아 밑으로 들어간다고?”

철중구는 ‘이것들이 뭘 모르네.’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서라. 이놈은 누구 위에 설 놈이 못 돼. 그리고 니들이 비아를 따라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 흉험한 곳에 기어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골로 갈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자신이나 여규였기에 망정이지, 어중간한 실력을 지닌 자들은 마른 비의 행보를 쫓다가 비명횡사할 게 뻔했다.

그리고 마른 비가 천진운을 보고 느꼈듯이 철중구도 그가 집단을 이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냐. 잠깐….”

자신이 한 말을 곱씹던 철중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장에서 지휘하는 거 보면 어지간한 장수보다 낫단 말야? 제 사람 챙기는 것도 그렇고. 아주 가끔 똑똑해지기도 하고. 재능은 있는데 성향이 안 맞는 건가…….”

철중구는 마른 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겠다. 대장질은 시켜줘도 안 할 놈인 게 분명한데, 혹시 모르지. 개 빡치면 돌변할지도. 아니면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거나.”

있어서는 안 되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상황이 올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배 채우고 쉰 다음에 한밤중에 나가자.”

마른 비는 이제 대도에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볼일은 다 봤고, 더 이상 만날 사람도 없었다.

또한 약속의 기한이 다가와서 어차피 움직여야 했다.

마른 비는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물었고, 철중구는 같이 가야지 당연한 걸 뭘 묻냐고 타박을 줬다.

“진짜 수왕과 같이 가는 거요? 그래도 대장 덕을 보긴 보네.”

함윤 패거리는 마른 비와 정식으로 일행이 되자 환호했다.

삼십여 명의 사내들은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한 뒤에 숙소를 나섰다.

마른 비를 찾는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을 쳤고, 지금 몰래 빠져나가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마른 비의 안이한 생각이었다.

마른 비는 물론이고, 전룡을 놓쳐 버린 사파의 방파들이 밤낮으로 대기하며 철중구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아, 시벌! 안 가! 안 간다고, 이것들아! 니들은 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또 다가오기만 해? 칼 맛을 보여 줄라니까!”

주원장에게 남긴 마른 비의 말이 인상 깊었는지, 철중구는 뻑하면 그 말을 인용했다.

함윤 패거리들이 ‘저건 좀 멋진데?’ 하며 수군대는 걸 보고 별비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영입 제의를 건네는 자들을 겨우 떼어놓긴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따라붙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은 마음대로 해라, 라는 심정으로 갈 길을 재촉했고, 하북성의 경계를 넘어 산서성에 진입했다.

진시황릉

『‘존재의 유무도 확실치 않은 무덤에 수많은 인간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몇 날 며칠간 지속된 기 싸움 끝에 심신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고, 작은 시빗거리가 도화선이 되었다. 서쪽 숲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는 순간,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름 모를 무인의 혈서로부터

홍무 원년, 섬서성(陝西省)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진시황.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불로불사의 꿈을 좇았던 고대 제왕의 무덤이 발굴됐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헛소리라 치부했지만, 그럼에도 발길을 옮겼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서안(西安)의 야산에 진입한 무림인의 팔 할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남은 자들도 고증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정신 나간 짓거리에 일생을 바친 한량.

고증자는 세간의 말처럼 자신의 작업이 가치가 있었음을, 자신이 해온 일이 헛짓거리가 아니었음을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광인이 계획한 희대의 사기극에 놀아난 자들은 그의 가문인 만금당에게까지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중략) 우리가 생각을 바꾼 건 한 사내의 말 때문이었다.

회합에 참여한 대원 중 한 명이 우스갯소리 삼아 ‘그때 고생 많았다.’고 하자, 수왕은 말했다.

“응. 무지 힘들었어.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었는걸. 근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경악을 동반한 침묵이 흐르자, 수왕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이거 비밀이었지? 취소, 취소. 방금 건 잊어버려. 그런 거 없어.”』

혼세록 지역총람

「섬서성, 진시황릉」

삭월 월목대원 태인 저

여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험악한 인상을 지닌 삼십 명의 사내들 때문이었다.

마른 비와 철중구의 뒤를 바짝 따르는 함윤 패거리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그게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형님! 이쪽입니다!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객잔 3층을 전부 비워 놨습니다, 형님! 꽥꽥 대는 놈들은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죠.”

“맛이 왜 이래? 지금 수왕 형님께 이딴 걸 드시라고 내온 거냐?! 네 살로 육회를 떠줄까?”

“형님! 저 소저 어떠십니까? 원하시면 ‘온건한 방법’으로 ‘정중히’ 모셔오겠습니다!”

“형님…! 형님…! 형님…!”

마른 비는 그들의 과잉 충성에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제발 하지 말래도 최선을 다해 모시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협박’을 하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다.

철중구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러는 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마른 비는 모조리 때려눕힐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홀가분해진 건 한 사내가 찾아온 뒤였다.

그는 말 한마디로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를 전부 마른 비에게서 떼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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