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투도. 련주님께서 부르시네.”
마른 비 일행은 야산에서 사슴을 잡아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함윤 패거리가 도시에만 들어가면 소란을 피우는 통에 마른 비는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서 다녔고, 일주일째 노숙을 하는 중이었다.
무표정한 사내는 식사 중인 철중구에게 다가왔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으엉? 당신 뭔데? 갑자기 뭔 개소리야?”
사슴 뒷다리를 뜯던 철중구는 눈을 부라렸다가 뒤늦게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고 사내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사도련? 련주? 날 부른다고?”
철중구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더니 그는 손에 쥔 뒷다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려, 련주…! 패군께서 날 부르신단 말이냐?!”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중구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더니 포효를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진짜냐?! 해, 해냈어! 해냈단 말이다!”
마른 비는 철중구가 그토록 좋아하는 걸 처음 봤다.
철중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출 기세였다.
“어떻게 된 거냐? 설명을 해봐!”
패군이 보낸 사내는 무공 경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흔쯤 돼 보이는 그는 바위처럼 굳건한 눈빛과 사내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느껴지는 분위기가 천생 무인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철중구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차분히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대도, 아니 이제는 북경(北京)이지. 논공행상이 끝난 후 북경에서 싸움이 벌어진 건 알고 있나?”
금시초문이었다.
삼십 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고 있지만, 정보에 깜깜한 건 여전했다.
마른 비와 철중구가 놀란 눈을 하자,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문유화. 만난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네.”
자신들의 행보가 보고되고 있었던가.
철중구는 눈빛으로 재촉했고, 사내는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삼 일 만에 북경을 빠져나온 자네들과 달리 대부분의 무림 세력은 최대한 머물 만큼 머물다가 철수했네. 황성에 발 들일 기회는 흔치 않고, 그토록 많은 무림인이 한자리에 모인 건 백 년 만이지.”
거기 있었기에 잘 알고 있다.
북벌 이후의 북경은 말 그대로 세력을 막론한 총집결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친교를 다지고, 적의 힘을 확인하며, 소속이 없는 자들을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였지. 조용히 머물다 간 자네들과 달리 다른 곳에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회와 탐색, 영입, 모략이 이뤄졌네.”
이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황실의 눈치를 보느라 칼을 뽑지 못했을 뿐 당시의 북경은 혼돈 그 자체였고, 태풍이 비껴간 건 마른 비 일행이 거의 유일했다.
“황성에 있을 때도 정파와 사파는 충돌할 뻔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네. 북경 밖으로 나오자 거리낄 것이 없어졌지. 발단은 우리 측의 무인들이었어. 아니, 그런 쓰레기들을 우리 측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화가 나는군.”
사내는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지었다.
그는 슬며시 눈썹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듣도 보도 못 한 쓰레기들이 서문유화에게 수작을 걸었지. 강호초출이라 서문세가를 몰라본 건지, 아니면 천하제일미의 미색에 정신이 나간 건지, 지저분한 음담패설과 함께 손목을 잡았다가 그대로 팔 하나가 날아갔어.”
“잘했네! 그 소저, 무공도 상당한 데다 여린 외모와 달리 한 성격할 것 같더라고! 그따위 짓을 했으면 팔 하나는 잘라야지, 암 그렇고말고!”
철중구는 진영 논리 따위 무시하고 서문유화의 편을 들었다.
인상적인 건 말을 하는 사내도, 함윤 패거리도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었다.
성향이 어떻든 제정신 박힌 사내라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마른 비는 그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문제가 커진 건 그 후였네. 련의 인물들은 잠자코 있었지만, 다른 놈들이 문제였어. 힘을 자랑하고 싶었거나, 단순히 정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 쓰레기들의 지인이었거나. 아무튼 근처에 있던 놈들이 날뛰기 시작했네.”
그건 정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 있는 문파나 세가, 정도맹의 무인들은 조용히 있었으나 위의 세 가지 이유에 해당하는 자들이 가만있지 못했다.
아, 한 가지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천하제일미에게 마음을 둔 수많은 사내가 앞 다투어 몰려나왔으니까.
“선공은 정파 쪽이었네. 과장되게 서문유화를 걱정하던 어린놈이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지. 피가 튀었고, 난전이 벌어졌어. 정도맹과 본련은 말리려 했으나 군중은 이미 눈이 돌아간 뒤였지.”
정파도, 사파도 서로에 대한 증오가 쌓일 만큼 쌓여 있었다.
원 치하, 중원 각 지역에서 고립된 채 다투어온 자들과, 실체를 접하지도 못했지만 세뇌되다시피 한 적의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양측은 명군이 개입해 싸움을 말릴 때까지 수천의 사상자를 내고야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나중에는 맹이고 련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어. 더 어이가 없는 건 싸움을 촉발한 당사자들이 사라졌다는 거야. 싸움에 휩쓸려서 죽었던지, 도망을 쳤던지, 아무튼 시체도 찾을 수 없었지.”
“정말 말릴 수가 없었어? 내가 본 당신들과 정도맹의 정예들은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던데?”
마른 비였다.
조용히 듣던 그는 갑자기 끼어들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사내는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수왕, 자네의 짐작이 맞네. 처음에는 자제하며 말리려 했지만, 나중에는 양측 다 감정에 몸을 내맡긴 게 사실이야.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잘됐다고 여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한판 붙게 될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백 년간 웅크리며 축적한 힘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대로 놔두면 내부에서 곪아 들어갈 정도로.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결국은 살인 기술을 연마한 무인들의 집단.
정도맹도, 사도련도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이유로든 충돌이 일어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솔직하네.”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는 철중구를 바라봤다.
그는 철중구를 데리러온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전쟁이 일어날 걸세. 련주께선 믿을 수 있고 즉시 전력이 될 만한 무인들을 영입하라 하셨지. 련주께선 자네가 흡족하게 잘 컸다 여기신 모양이야. 당장 불러들이라 하셨네. 자네가 거둔 이자들도 함께.”
철중구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련주께서 직접 날 지명하셨다고? 나, 나를… 기억하시는 건가?”
사내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일부라곤 하나 본인의 진신무공을 전수한 자를 잊을 리가 있겠나. 종종 말씀하셨지. 장사에 꽤 기대되는 녀석이 있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놈이라고. 아, 지나치게 말이 많은 것만 빼면.”
철중구는 감격에 휩싸여 부르르 떨었다.
은인이자 우상으로 여겨온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외쳤다.
“간다! 당장 가겠어! 일회용 칼받이로 사용돼도 좋다! 그분의 옆에 설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이토록 격앙된 철중구는 처음 본다.
그는 패군에게 신앙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함윤 패거리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그들 또한 최초의 목적은 사도련에 들어가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고, 사파의 무인들에게 패군은 신화적인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정됐군. 함께 가지.”
사내는 뚜렷한 미소를 내비치며 등을 돌렸다.
철중구가 마른 비의 손을 붙잡으며 갑자기 가게 돼서 미안하다, 꼭 다시 보자, 건강해라, 등등 작별 인사를 늘어놓을 때였다.
잘됐다며 축하 인사를 건네던 마른 비가 불쑥 물었다.
“근데 아저씨. 이름이 뭐야?”
사내는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사연문. 내 이름일세.”
마른 비는 그렇구나, 하고 눈을 껌벅였지만,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는 기겁을 했다.
중원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 사도련 제일 호법…!”
그는 패군을 지키는 방패였고,
“연무검(鍊武劍)…!”
정련된 무로써 련을 대표하는 절정의 검객이었다.
패군을 제외하면 사도련 최강을 논하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어… 이런, 시벌……. 제가 눈깔이 장식이라 하늘을 몰라뵙고 반말을 찍찍…. 죄송합니다, 형님.”
욕설과 비속어와 당황스러움이 섞인, 엉망진창의 사과였다.
심지어 마지막은 난데없는 형님으로 끝났다.
뒤늦게 자신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깨달은 철중구가 얼굴을 붉혔고, 사연문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둘도 없는 꼴통이 됐을 거란 련주님의 예상이 맞았군. 아니야. 하던 대로 하게. 그게 더 듣기 좋아. 다들 날 어려워만 하지, 자네처럼 편히 대하는 자가 없더군. 계속 그렇게 불러주게.”
사연문은 진심으로 유쾌해 보였다.
철중구는 그답지 않게 눈치를 보다가 어렵사리 대꾸했다.
“네… 반말한 건 죄송하고요.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사연문은 껄껄 웃더니 휘적휘적 걸어갔다.
철중구는 눈인사를 남긴 채 허겁지겁 쫓아갔고, 함윤 패거리는 마른 비에게 달려와서 눈시울을 붉히며 손을 붙잡았다.
“좀 더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님!”
“지금은 이렇게 가지만, 사내들의 의리는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수왕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킬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존경합니다, 형님!”
마른 비는 거칠지만 순수한 사내들을 한 번씩 안아주며 배웅했다.
“정신없지만 고마웠어. 잘들 지내고 또 봐. 아, 다음엔 그 형님 소리 좀 하지 말고.”
함윤도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인사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중구 형님과 함께 더욱 발전한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철중구를 부르는 호칭이 대장에서 형님으로 바뀌었다.
함윤이 이런 사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도, 그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가 철중구와 엮인 것도, 결국은 그의 복일 것이다.
마른 비는 멀어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후우… 중구가 삼십 명으로 늘어난 느낌이었어. 너무 힘들었다…….”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면 한동안 따로 움직여야 했다.
철중구와 함윤 패거리는 금복인의 초청을 받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여기서 헤어진 게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정이 들었나? 막상 헤어지니 아쉽네.’
그래도 홀가분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마른 비는 철중구 일당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피식피식 웃으며 나아갔다.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 사라지자 여행은 순조로웠다.
마른 비는 별비를 편히 돌아다니게 두고, 도시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누리며 길을 재촉했다.
처음 중원에 나왔을 때만 해도 노숙이 더 편했는데, 이제는 폭신한 침상이 좋았다.
중원의 문물에 몸이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으차차! 혼자 움직이니 빠르네.”
산서성을 통과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십 일도 안 되어 성 하나를 가로지른 마른 비가 섬서성의 경계를 밟았다.
“어디 보자… 여기가 합양(合陽)이고, 서안까지는…….”
만나기로 한 날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우 소협이시죠?”
눈을 드니 만금당의 문양을 단 사내가 웃고 있었다.
“아! 할아버지가 보낸 거야?”
금복인.
자신이 잊지 않았듯 그 또한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모양이다.
그에게는 일생의 염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갑게 웃는 마른 비에게 사내가 말했다.
“아, 이제는 수왕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일찍 도착하셨군요. 노야의 명을 받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로….”
사내는 친절하게 마른 비를 안내했다.
한참 동안 그를 따라서 걷던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쪽은 서안이 아닌데?”
사내는 걱정 말라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 노야께선 지금 서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소협께서 당도하면 이쪽으로 모시라고 하셨지요.”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예상외의 길로 접어들었을 뿐.
관도를 버리고 첩첩산중으로 들어간 사내는 반나절을 꼬박 걸은 뒤에야 멈췄다.
그리고 사내가 멈춘 곳에는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