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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15화 (315/463)

315화

땅- 땅! 따앙―!

묵직하고 둔탁한 쇠뭉치가 또 다른 쇠붙이를 내리치는 소리.

숲을 헤치고 나온 마른 비는 이색적인 광경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땅! 따당! 땅―!

통짜 쇠로 된 받침 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쇠붙이가 올랐다.

중년의 사내는 왼손에 든 집게로 불에 달군 쇠붙이를 모루 위에 고정시켰고, 오른손에 든 망치로 내리쳤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눈에 띄게 발달한 상체 위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망치가 쇠붙이를 두드릴 때마다 시뻘건 불꽃이 튀고, 등허리의 땀이 비산했다.

그는 세상천지에 자신과 쇠붙이만 있는 것처럼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와… 멋져!’

마른 비가 철장(鐵匠)이 작업하는 광경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동굴과 그 앞에 설치된 화로.

사내는 불길을 간직한 화로를 배경으로 심혈을 기울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른 비는 그가 휘두르는 망치와 작열하듯 터지는 불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멋지죠?”

마른 비를 여기까지 안내한 사내가 속삭였다.

그는 작업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듯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단철공(鍛鐵工) 왕문. 중원 최고의 철장이십니다. 저분을 찾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죠.”

깡! 까앙! 깡―!

마른 비는 메질을 처음 봤다.

하지만 문외한인 그가 봐도 왕문이란 철장은 비범했다.

무인이 투로를 세심하게 갈고 닦는 것처럼, 그는 망치질 한 번 한 번에 심혼을 쏟아붓고 있었다.

망치 대신 붓을, 그리고 철편 대신 책을 들었다면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처럼 보일 만큼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저 사람, 강해…!’

골고루 발달한 근육만 봐도 알 수 있다.

직업상 상체와 팔뚝이 유난히 두껍지만, 저런 몸은 단순히 망치만 휘두른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왕문은 철장이자 무인이며, 어지간한 고수와 붙어도 단매에 때려눕힐 강자가 분명했다.

치이이익―

철을 식히는 소리가 마른 비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쇳덩이가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며 수증기를 피워 올렸고, 그제야 왕문도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는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찍 왔군. 네가 수왕이라는 풋내긴가?”

참으로 외모와 어울리는 말투였다.

세상과 담을 쌓은 듯한 분위기와 만사에 무심한 눈빛.

건방진 걸 넘어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눈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알 수 있었다.

저건 거만한 게 아니라 철탑처럼 쌓아 올린 자부심 때문이라는걸.

다른 사람을 낮게 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아예 없다시피 한 사교성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리고 웬만해선 눈치채기 힘든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경계심까지도.

마른 비는 활짝 웃으며 그가 쳐놓은 경계의 담장을 허물었다.

“응. 그렇게들 부르더라. 마른 비야. 반가워, 아저씨.”

마른 비의 호의적인 태도에 왕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마른 비의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왜, 왜 이래?!”

“역시. 생긴 것처럼 미련한 놈이로군.”

“미련하다니? 뭐가?”

왕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담금질한 철편을 꺼내서 쾅! 하고 모루에 내려놨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망치의 손잡이 부분을 마른 비에게 내밀며 말했다.

“해볼 테냐?”

“어? 진짜? 그래도 돼?”

마른 비는 곧바로 다가가서 망치를 건네받았다.

안 그래도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는 눈치였다.

마른 비의 옆에 있던 사내는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다, 단철공께서 작업 도구를 내주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가 작업할 때 가까이 오는 걸 허락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장비를 건네는 건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심지어 정련 중인 쇠를 다른 이가 두드리게 한다?

놀라 자빠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대로 쳐 봐라. 네가 가진 그 희한한 기운을 사용해서.”

왕문은 자연기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대답 대신 힘차게 망치를 내리찍었다.

“합!”

콰아아앙―!

그건 메질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부수는 것에 가까웠다.

허나 왕문이 정련하던 쇠붙이는 놀라운 세기와 질김을 지니고 있었고, 마른 비의 힘에도 버텨냈다.

“더 세게! 수왕이란 놈이 이것밖에 안 되나! 정신과 힘, 기운을 일점에 집중해! 망치가 쇠붙이를 내리치는 순간에 내공을 폭발시켜라! 너의 모든 걸 쇠붙이에 때려 박는다고 생각해!”

마른 비를 안내한 사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작업을 시작한 두 사람이 주변도 잊은 채 완전히 몰입했기 때문이다.

“하앗!”

콰아앙―!

마른 비의 메질은 서툴렀다.

하지만 그는 왕문이 시키는 대로 했고, 쉼 없이 쇠붙이를 두드렸다.

그건 철을 가공하는 작업이라기보다 두들겨 패는 일에 가까웠지만, 왕문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깡! 까앙―! 깡!

착시일까?

원래 뭘 만들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금속은 망치질이 계속될수록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자연기가 쇠붙이에 전이된 느낌이었다.

철편의 표면에 머물던 빛은 망치질이 계속될수록 점점 안으로 흡수됐고, 종국에는 완전히 스며들었다.

바로 그때, 왕문이 마른 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 이제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해.”

“어? 벌써? 나 더할 수 있는데…….”

마른 비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쇠를 두드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한 느낌이었다.

왕문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흡족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작업은 끝났다. 이 이후부터는 전문적인 장인의 몫이야.”

망치를 건네받은 왕문은 모루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저리 가 있어라. 시우쇠가 기를 머금었을 때 단숨에 작업을 끝내야 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저쪽에서 보고 있어.”

마른 비는 스승의 명을 받은 제자처럼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얼떨결에 작업에 뛰어들었지만, 지금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왕문에게선 평생토록 한길에 정진한 자만이 지니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마른 비는 그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물러서서 작업을 지켜봤다.

까강! 깡! 까앙―!

불꽃이 튀기고, 쇠가 형태를 잡아간다.

섬세하게 세기를 조율한 내공이 망치에 깃드니 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쇠붙이의 외형은 시시각각 변모했다.

놀랍게도 왕문은 거푸집을 쓰지 않고 망치만으로 원하는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투박한 망치만으로 이런 작업을 해낸다는 건 말 그대로 신기나 다름없었다.

까강, 깡깡깡― 깡!

그는 거의 모든 작업을 망치로 끝냈다.

작고 앙증맞은 망치로 세세한 부분을 다듬고, 미리 만들어둔 봉 형태의 부속품을 연결하여 손잡이를 만들자 공정이 끝났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

그건 일견 투박해 보이는 주먹 형태의 쇳덩이였다.

“아까 살펴보니 너는 무기란 걸 아예 써본 적이 없는 것 같더군. 만약 그렇다면 실로 미련한 짓이다. 사용자에게 꼭 맞는 병기는 공격과 방어의 효율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내공의 소모를 줄여준다.”

왕문은 마른 비의 몸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극한까지 육체를 단련한 박투술의 달인 같은데, 지금까지는 딱히 병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겠지. 내가 봐도 네 몸은 흉기 그 자체니까. 넌 나 같은 철장들에게 있어 가장 보람이 없는 부류다.”

그는 쇠뭉치를 들어서 마른 비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껴 봐라.”

얼떨결에 한 쌍의 쇳덩이를 받아든 마른 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맙기는 한데, 솔직히 왕문이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른 비는 우물쭈물 대다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음……. 아저씨, 일단 선물은 고마워. 이래서 나보고 두드리라고 했구나? 근데 아저씨, 나는 맨손이 편한….”

“닥치고 일단 껴 봐.”

왕문은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껴 보고 별로면 버려라.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물품이라도 사용자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원치 않는 걸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 허나….”

왕문은 십 할의 확신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껴 보면 마음에 들어서 다시는 그런 말 내뱉지 못할 거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실력과 결과물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리라.

마른 비는 전쟁에서 기마전을 할 때를 제외하곤 병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일단 착용해 보기로 했다.

“이 부분을 쥐는 거지?”

따로 연결한 짧은 봉 형태의 접합부를 쥐자 두툼한 철판이 주먹을 감쌌다.

재어본 것도 아닌데 마른 비의 주먹에 딱 맞았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 느낌…!’

놀랍게도 자연기가 쇠붙이를 타고 막힘없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정련의 과정에서 미리 길을 들인 결과였다.

그건 마치 무쇠로 된 장갑이 주먹을 보호하는 감각이었다.

“권갑(拳甲)이라 한다. 권사들을 위해 발명한 병기지. 권사들은 날카로운 병장기와 부딪힐 때마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내공을 불어넣지 않느냐. 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거지? 그럴 경우 실력이 비슷해서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가 아니냔 말이야.”

“어. 이게 있으면 범의 앙심이나 교룡갑을 일일이 쓰지 않아도 되겠어. 착용감도 의외로 괜찮고. 그냥 두드리기만 해도 뼈가 부서지겠는데?”

왕문은 마른 비의 감탄한 표정을 즐기다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원래는 금벽파라라는 녀석이 쓸 소형 방패를 만들려던 참이었다. 무쇠에 한철을 섞어서 강도를 올렸을 뿐 딱히 공을 들인 건 아니라서 재질이 썩 좋진 않아. 그래도 이번에 한해서는 쓸 만할 거다.”

“응? 이번에라니? 그리고 웬 방패?”

마른 비의 질문에 왕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무덤에 들어가는 것 아니었나? 금복인, 그 정신 나간 노인네 일을 도와주러 온 거 아냐?”

“그건 맞는데 이런 무기나 방패가 필요해?”

왕문은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무것도 못 들은 거냐? 설마 딸랑 불알 두 쪽 차고 맨몸으로 온 거야?”

“응. 알아야 할 게 따로 있어? 그냥 할아버지가 무덤을 발굴하는 걸 도와주면 되는 거 아냐? 보물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막아주던가.”

왕문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른 비를 안내한 사내를 째려봤다.

“그, 그렇게 보지 마십쇼. 저는 그냥 안내만 맡은 거라서. 당연히 전달이 된 줄 알았습니다.”

왕문은 이마를 짚더니 발로 땅을 쾅쾅 밟으며 외쳤다.

“그런 거면 지금 인원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뭐 하러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겠나? 잘 들어라. 이건 그냥 땅에 묻힌 무덤을 찾는 한가한 일이 아냐! 이 밑!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산 전체가 무덤이란 말이다!”

“산? 이 산이 무덤이라고?”

마른 비가 놀란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자 왕문은 인상을 찡그렸다.

“입구를 찾는 과정에서만 인부 칠십 명이 죽었다.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 입구만 찾으면 될 거라는 건 크나큰 오산이었어. 만금당에서 날 찾은 이유다. 어설픈 장비를 차고 들어갔다가는 몰살이 예상되기 때문이야.”

그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산중을 넓게 둘러봤다.

“정신 차려라, 애송아. 이건 땅이나 파고 보물을 찾는 단순한 발굴이 아냐. 넌 빛 한 점 없는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탐사대의 일원이다.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 입구가 있고, 넌 그중 한쪽을 맡게 될 거야. 네가 실수하면 진입하지도 못하고 전멸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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