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고대 병기…….”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왕문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양검(陽劍) 간장(干將). 음검(陰劍) 막야(莫耶).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도장(刀匠)인 간장이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붙여 제작한 희대의 명검들이다. 온갖 서적을 뒤적여 봐도 그 검들의 행방은 남아 있질 않아.”
왕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월왕(越王) 구천(句踐)과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검도 빼놓을 수 없지. 온갖 설화를 넘어 사서에까지 기록될 정도의 무구들이 이유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 그건 분명 어딘가에 묻혀 있을 거라는 게 내 결론이야.”
마른 비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릉에 그 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구나?”
왕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시 전장에도 출현했던 검들이 일시에 사라졌다면 한 가지밖에 있을 수 없지. 누군가 수집해서 내놓지 않은 거야. 당대에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는 진시황밖에 없고.”
왕문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난 그것들을 내 눈으로 보고, 나의 경지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가늠하고 싶다. ‘당대 최고’라는 수식어는 하찮을 뿐이야. 그런 건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거니까. 내가 원하는 건 ‘역대 최고’라는 칭호다.”
이 시대에 왕문보다 뛰어난 장인은 없다.
더 이상 비교할 대상이 없어진 그는 사서에 남은 명장의 손길을 느끼고, 자신과 견주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건 금복인이 역사에 남을 유적을 발굴하고 싶은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유사한 생각을 지닌 사람은 또 있었다.
“호호! 죽을 날이 살날보다 가까워진 남자들이 뜨겁게 불타오르네요. 저도 비슷한 목적으로 왔는데, 끼워주시겠어요?”
산중의 어둠을 걷어내는 목소리.
여인의 것이 분명한 음성은 흥미로움을 담고 한층 높아졌다.
“어머? 이건 뭐야? 설마… 수왕? 세상에! 이렇게 멋진 남자였어?”
교태 넘치는 목소리가 마른 비의 귀를 간질였다.
고개를 돌렸을 때, 무언가가 품 안으로 휙 들어왔다.
“어… 어?”
‘빨라…!’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여인은 마른 비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가왔다.
바람처럼 파고든 그녀는 어느새 마른 비의 가슴에 밀착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남자가…! 선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몸매! 이 흉근 좀 봐! 뭘 했길래 몸이 이토록 곱게 빠졌나요?”
여인은 허락도 없이 마른 비의 가슴을 더듬었다.
쌍꺼풀 없는 눈에 오뚝한 코, 앵두처럼 탐스러운 입술.
남자의 시선을 강제로 끌어당길 만큼 농염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마른 비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상체를 더듬었다.
“꽤 많은 남자를 봤지만 이렇게 완벽한 몸은 처음 봐. 수왕 님, 느껴져요?”
그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끈끈한 손길이 몸을 만져대니 ‘녀석’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 수밖에.
차유람은 달착지근하게 웃었고, 마른 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개를 내린 차유람이 깜짝 놀랐다.
“어머! 어머머! 얘 봐라? 짐승이네, 짐승.”
상체에 머물던 손길이 아래로 향했다.
화들짝 놀란 마른 비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당신! 미쳤어?”
차유람은 마른 비를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따라붙었고, 마른 비는 기겁하며 더욱 빠르게 물러섰다.
놀라운 일은 그때 일어났다.
스르륵―
낙엽 가누기와 구름 걷기.
차유람을 떼어놓기 위해 와족 고유의 체술이 동시 발동됐다.
하지만 그녀는 숱한 싸움에서 간격을 제압했던 신법과 보법을 단숨에 간파했다.
“어딜 도망가려구요?”
차유람이 발을 놀리자, 그녀의 신형은 마른 비가 움직인 동선을 정확히 따라왔다.
간파와 파훼를 동시에 해내는 신기.
보법과 경공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색광신투의 몸놀림은 가공했다.
“호호호!”
문제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려한 발놀림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는데, 두 손은 무언가를 붙잡을 듯이 앞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저 눈!
마른 비는 처음으로 여인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그만.”
마른 비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달려들던 차유람이 흠칫하고, 번개처럼 물러섰다.
훌쩍 거리를 벌린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장난이 심하잖아.”
마른 비는 살기를 거두고 꼿꼿이 섰다.
차유람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꾸했다.
“호호… 그랬나요?”
그녀는 몸을 옥죄는 살기가 흩어지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휴… 죽는 줄 알았네. 당신, 사람 맞아요? 무슨 놈의 살기가 이렇게….”
차유람은 놀라움과 감탄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녀는 광녀 같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을 싹 지우고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차유람. 무림의 친구들은 천녀신투(天女神偸)라고 불러요. 명성 자자한 수왕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정중히 포권까지 올리는 그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왕문은 ‘천녀는 얼어 죽을. 색에 미친 광녀겠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마른 비도 그제야 표정을 풀며 웃었다.
“나도 반가워. 깜짝 놀랐잖아. 방금 같은 장난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또 한 명의 칠대 기인을 조우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기인들에 비해 무척이나 젊었다.
궁금해진 마른 비가 나이를 묻자,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화를 냈다.
“숙녀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랍니다. 그런 것도 몰라요?”
“숙녀가 멸종했나 보군. 서른은 확실히 넘었다. 그냥 도벽 있는 노처녀야.”
“아아악! 단철공! 당신 미쳤어? 입 닥쳐요!”
왕문의 부연설명에 차유람이 고리눈을 뜨며 욕을 퍼부었고, 마른 비는 깜짝 놀랐다.
“서른이 넘었다고? 진짜로?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많이 쳐줘야 스물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다.
마른 비가 놀라워할 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아우야! 이게 얼마 만이냐! 드디어 왔구나!”
동굴과 이어진 소로에서 금복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아우의 이름이 여기까지 들려오더구나! 수왕이라니! 이 나이에 왕의 칭호를 얻은 남자는 무림 역사상 네가 처음일 게다!”
금복인은 활짝 웃으며 마른 비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마른 비가 명성을 떨치는 걸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반면 마른 비는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삼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늙었어……. 고생이 많았구나?”
노인이 늙는 건 한순간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금복인의 노화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항상 유쾌하게 펄펄 날아다니던 사람이 축 처져 있고, 얼굴엔 그늘이 졌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지 수척해진 그는 힘없이 말했다.
“내 실수로 아우들을 떠나보냈다. 나 혼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야.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
금복인은 애써 웃으며 마른 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녀석들이 보고 싶어 했던 풍경을 꼭 보고야 말 것이다. 그게 그들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 믿으니까. 수왕이 도와주는데 이런 낡아빠진 무덤 따위 들추는 건 일도 아니겠지.”
누군가 코웃음을 친 건 그때였다.
“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왕이라니. 하여튼 동부 놈들 요란 떠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회색의 눈동자와 휑한 왼팔.
설지굉은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말투와 표정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할아버지!”
마른 비가 활짝 웃자, 설지굉은 움찔하며 당황했다.
이렇게 반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어색한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마른 비를 살폈다.
“몰라보게 강해졌군. 역시 독림에서 숨통을 끊었어야 했어. 내가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았구나.”
주변에 있는 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왕문은 ‘저 성격파탄자 늙은이!’라며 욕을 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지굉의 꿍얼거림까지도 반갑기만 했으니까.
“할아버지도 더 세졌네? 엄청 노력했을 게 보여.”
육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팔 하나를 잃어서 운신도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집념 하나로 살아온 노인은 삼 년 전 검강을 구현했던 것처럼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설지굉은 마른 비가 자신의 노력을 알아본 게 기꺼운지 피식 웃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까칠한 노인네의 비웃음처럼 보였지만.
“금 형.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지 않겠소?”
금복인을 부르는 호칭이 바뀐 것도 눈여겨 볼만한 일이었다.
처음 대리에서 조우했을 때에 비해 설지굉은 정말 많은 면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이네. 입구 한쪽을 담당할 이가 오지 않았어.”
금복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지막 일행이 합류했다.
그리고 그는 등장만으로 마른 비를 소리 지르게 했다.
“우와아아아~! 저게 뭐야?!”
황금빛을 띠는 갑옷.
검을 찌를 틈을 찾기 힘들 만큼 엄밀한 전신보호용 갑주였다.
척 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그것은 중원에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갑옷과도 달랐다.
투구가 얼굴 전체를 덮어서 착용자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검을 흘리기 위한 곡면 세공까지 되어 있어 하나의 예술품이라 봐도 무방했다.
철컹- 철컹.
심지어 그는 마른 비보다도 컸다.
거인이나 다름없는 자가 전신갑주를 걸치고 자신의 어깨만 한 길이의 대검을 들고 오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마른 비는 갑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대번에 알아챘다.
“미카엘…!”
만금당 사천지부에서 만났던 색목인.
모종의 이유로 서역에서 넘어온 그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운을 흘리는 남자였다.
완전 무장을 갖추니 특유의 성스러운 분위기에 묵직함이 더해졌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감히 마주 볼 엄두도 내지 못할 위용이었다.
“처음 저 갑옷을 보고 꽤 놀랐지. 표면이 엄청나게 단단하다. 철을 저런 식으로 제련하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 저런 걸 걸친 중갑 기마대가 있다면 전쟁의 판도가 뒤바뀔 거다.”
“완전 멋져…!”
왕문은 입을 쩍 벌린 마른 비에게 말했다.
“금강판금갑(金剛板金甲)이라 한다. 저자가 서역에서 가져온 판금 갑옷에 내 정련기술을 녹여냈지. 검강이라면 모를까, 검기 따위는 내공을 주입하지 않아도 버텨낸다.”
자부심 어린 표정이었다.
마른 비는 알 수 없었지만, 금복인이 왕문을 초청한 이유 중엔 미카엘의 전용 무구를 손봐줄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대보다 더욱더 훌륭하게 작업을 완수해냈다.
“오랜만입니다, 친구여. 몰라보게 강해졌군요.”
마른 비가 그렇듯이, 미카엘도 마른 비에게 호감을 지닌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투구를 벗어서 옆구리에 끼며 악수를 건넸다.
마른 비는 생소한 인사법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의 옆에는 마른 비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금벽파라도 있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이름이 들리더군요. 노야를 돕기 위해 달려와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건 금벽파라의 인사법이었다.
위아래로 손을 맞잡는 와족식 포권을 건넨 것이다.
마른 비는 ‘아…!’ 하고 감탄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믐 할아범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더니, 이런 것도 배운 거야?”
분위기가 점점 밝아졌다.
탐사대가 다 모였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마른 비는 언제 어디에서나 인간을 끌어당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존재였다.
완전체가 된 탐사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진시황릉…….”
탐사대가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눌 때, 별비의 후각으로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는 어둠에 녹아든 사내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번쩍였다.
“만금당이 여산에 깔려 있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사내가 중얼대자, 또 다른 사내가 물었다.
“막주님. 계획대로 진행합니까?”
수하로 보이는 자의 질문에 막주라고 불린 자는 대꾸했다.
“살아남을 방법이 그것뿐이잖나. 다만… 한 가지를 더하지.”
그는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중원 전역에 소문을 내라. 고증자가 진시황릉을 발견했다고.”
수하가 물러가는 걸 느끼며, 막주는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보이는 금복인을 바라봤다.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은데, 미안하오. 이쪽도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밤이 깊어지고,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어도 사내는 몸을 숨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부적인 논의를 마치고, 장비를 갖추는 데만 꼬박 보름이란 시간이 걸렸다.
탐사 준비를 마친 일행은 여러 번 반복한 예행연습대로 동서남북의 입구에 자리했다.
“커허허허헝!”
별비의 포효가 여산을 뒤흔든 순간, 마침내 천오백 년간 잠겨 있던 황릉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