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마른 비는 동문 앞에 서서 차유람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문에 연결된 기관에 술법을 덧씌웠어요. 지속력은 뛰어나지만, 고차원적인 술법은 아니에요. 조건만 맞추면 열릴 거예요.”
동서남북에 자리한 문들과 그 옆에 설치된 누름 쇠.
그걸 동시에 누르는 것이 조건이며, 누르는 시점이 어긋나거나 어느 한 곳이라도 빠뜨리면 문은 영영 폐쇄될 거라고 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고대의 술법입니다. 원시적인 힘이 느껴지더군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조건이 그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술식은 피에도 반응하게 돼 있어요.”
“피라고요?”
미카엘은 놀란 얼굴을 한 차유람에게 설명했다.
“네. 서방에도 비슷한 술법이 존재합니다. 고대의 신을 섬기는 이교도들. 그들의 은신처에서 왕왕 볼 수 있는 종류더군요. 아, 그렇다고 술법 자체가 부정한 힘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선별된 자들, 예컨대 고위 인사들이 은밀한 곳에 출입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지요.”
“특정 인물의 피를 인식하여 통과시킨다, 그런 뜻인가요?”
“맞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자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술법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진시황의 핏줄.
철혈의 황제도 후손에게만은 비궁을 개방할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술법의 흐름과 기관의 구조를 보면 모든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동문.”
선수를 친 건 차유람이었다.
피에 반응한다는 건 놓쳤지만, 그녀도 파훼법은 꿰뚫고 있었다.
“맞습니다. 누름 쇠를 누르면 동문이 열리고, 나머지 세 곳은 폐쇄될 겁니다. 아마 화살 같은 살상무기가 튀어나올 수도 있겠죠.”
왕문은 제법이라는 눈으로 미카엘을 봤다.
“정확하군. 기관에 대해서도 아는 건가?”
“어르신만 하겠습니까. 그저 얕은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미카엘은 겸손하게 웃었지만, 왕문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피라니……. 술법이란 게 실존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런 것까지 가능한 건가? 술법과 기관에 대한 그 해박한 지식……. 자네,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왕문이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미카엘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럴 만도 한 게, 차유람은 중원 최고의 해체 전문가였고, 그녀가 놓친 부분을 미카엘이 잡아내자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겉만 훑어보고 기관의 작동 원리를 깨우치는 건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왕문의 의심은 타당했다.
“그저 독특한 분위기와 굉장한 힘을 지닌 무인인 줄 알았거늘. 자네, 정체가 뭔가? 금 영감의 손님이라는 두루뭉술한 말 말고, 진실을 말하게.”
눈치로 보아 미카엘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안 한 모양이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말로는 부족할까요? 과거를 언급하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원하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문이 눈빛으로 재촉하자,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하제일의 철장 어쩌고 하더니만, 그냥 한심한 놈이었군.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거늘, 사십 줄에 이른 놈이 굳이 남의 과거를 꼬치꼬치 캐물어야겠나? 못 믿겠으면 꺼져라. 우리끼리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막말의 제왕다운 위용이었다.
설지굉이 늘어놓은 비난에 왕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모욕을 받은 그는 쇠망치를 집어 들었고, 설지굉도 엄지손가락으로 검 손잡이를 밀어 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해소한 건 마른 비였다.
“그만해, 둘 다. 저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여기서 우리끼리 싸울 거야? 아저씨는 정 궁금하면 나중에 미카엘에게 따로 물어. 할아버지도 말 좀 부드럽게 하고. 그럼 부딪칠 일 없잖아.”
그제야 주변을 의식한 설지굉과 왕문은 헛기침을 하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마른 비는 손바닥을 탁탁 치며 말했다.
“그럼 화해하는 거다? 친하게 지내, 친하게. 비슷한 사람끼리 왜 그래?”
둘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원래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맞추려 했으나, 마른 비와 별비 덕에 일이 쉬워졌다.
입구가 비좁아서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남게 된 별비는 지상에서 사방의 입구 중앙쯤에 자리 잡았고, 신호를 기다렸다.
탐사대가 모두 자리를 잡자, 마른 비가 언령을 터뜨렸다.
『준비됐어, 별비야!』
“커허허허헝!”
산중을 쩌렁쩌렁 울리는 백호의 포효.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른 비가 누름 쇠를 밀었다.
그그그그긍―!
문이 열리고, 새카만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가 튀어나오리라 예상하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마른 비가 중얼거렸다.
“뭐야? 조용하네?”
이변이 벌어진 건 다른 세 방향이었다.
쿠르르르릉―!
이 지형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화살? 비수? 낙석?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바닥이 꺼지는 함정?
하지만 진시황은 무단 침입자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서문에 있던 설지굉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욕설을 뱉었다.
“빌어먹을! 진시황, 이 미친 새끼가…!”
통로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화살을 내쏘는 기관을 뚫고, 문 앞까지 온 다수를 일거에 생매장하려는 덫!
“통로 전체가 함정이었나! 침입자를 한꺼번에 파묻으려고 이런 짓을…!”
설지굉은 미친 듯이 경공을 펼쳐서 밖으로 내달렸다.
남문을 맡은 미카엘과 북문을 담당한 차유람도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쳐나갔다.
쿠르르르릉―!
경공을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꼼짝없이 깔려 죽었을 거다.
세 사람은 완전히 매몰된 입구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곧 정신을 차렸고, 마른 비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동문으로 향했다.
* * *
“저 소리…!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만금당의 발굴단이 여기 있는 게 맞았어!”
대혈문(大血門)의 문주 서구식은 휘하 문도들을 모조리 이끌고 여산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젊은 시절 매서운 검 솜씨로 명성을 날린 그는 위남(渭南)에서 개파를 했고, 그때만 해도 대혈문을 섬서 제일의 사파로 키울 자신이 있었다.
군소 문파들을 모조리 흡수하여 위남을 접수하고, 사도련에 가입할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해야 했다.
내로라하는 사파의 세력이 섬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파가 강세인 섬서에서 사파는 기를 펼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위남 일대를 삼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의 꿈을 고이 접어서 묻은 지 오래였다.
‘진시황릉이 발굴된 게 사실이라면,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진시황에 대한 기록이 절반만 사실이어도 그런 욕심쟁이는 또 없을 것이다.
그런 자가 제 몸만 달랑 뉘었을 리는 없을 터.
서구식은 이게 하늘이 준 기회라고 믿고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뭐냐, 이 잡것들은?!”
소리의 진원지로 달리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만 장밋빛 미래를 그린 게 아니라는 듯 숲 사이사이로 달리는 인파가 보였고, 그건 대충 봐도 물경 삼백에 가까웠다.
짜증이 난 그는 내력을 돋은 뒤 우렁차게 외쳤다.
“멈춰라! 내가 바로 대혈문의 문주 서구식이다!”
놀랍게도 달리던 자들이 일시에 멈춰 섰다.
대혈문이 섬서의 사파 중 손꼽히는 문파임을, 자신의 이름이 여전히 먹힌다는 걸 확인한 서구식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이 변한 건 좌측에서 달리는 자들을 본 후였다.
“저 새끼들은 뭔데 들은 척도 않는단 말이냐!”
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달리면서도 귀를 열어놓고 있었고, 선두에 선 자가 이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엔 서구식이 멈출 차례였다.
“서 문주가 아니신가? 오랜만이구려. 근데 방금 그거, 본인에게 한 말이 맞는지?”
‘흉사방(凶邪幇)?! 심지어 방주인 독문철이 직접?!’
대혈문이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면, 흉사방은 섬서에 위치한 사파 중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방파였다.
둘 다 사도련의 휘하였지만, 엄연한 힘의 차이가 존재했으며, 사파에서 힘은 곧 암묵적인 서열이었다.
급격히 쭈그러든 서구식이 독문철의 눈치를 살폈다.
“도, 독 문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제를 모르고 꼬인 날파리들에게 한 말이지요.”
“그럴 거라 생각했소.”
독문철이 피식 웃으며 길을 재촉할 때였다.
서구식을 또 한번 쭈구리로 만들 음성이 우측에서 들려왔다.
“날파리? 설마 거기에 본좌가 포함되는 건가?!”
“어떤 시건방진 놈이 본좌 운운하는…!”
고개를 돌린 서구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 장삼! 저 무식한 놈도 이 일에 끼어든 건가?!’
흔하디흔한 이름과 달리, 그의 무공은 흔하지 않다.
칠 척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력과 쌍부를 다루는 실력은 무지막지한 성정과 어우러지며 그를 섬서성 북부, 유림(楡林)의 지배자로 굳혀 놓았다.
더 골치 아픈 건 그의 배경이었다.
강호의 무뢰한, 산도적들의 연맹체인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
그가 이끄는 유림채는 녹림의 열여덟 산채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음…….”
흉사방주 독문철도 미간을 찌푸렸다.
장강수로연맹이 그렇듯이 녹림십팔채도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거대 집단이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뒷배를 감안하면 유림채는 섬서에 위치한 사파 중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다.
“묻지 않았나? 본좌가 날파리냔 말이다!”
장삼의 외침에 서구식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채주께서 계신 줄 몰랐기에 한 말이었소. 오해가 있다면 풀길 바라겠소이다.”
“그럼 그렇지. 거 말조심합시다, 서 문주. 입을 열기 전에 뇌를 좀 거치란 말이오. 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우리 애들만 있었으면 칼부림 났을 거요. 수틀리면 일단 칼부터 뽑고 보는 놈들이라서.”
장삼의 뒤에는 자신이 산적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는 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식이 저자세를 보이자 대놓고 비웃으며 낄낄댔다.
도끼날을 핥는 놈이 있는가 하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놈도 있었다.
‘이런 쳐 죽일 새끼들이…!’
일개 산적 나부랭이가 일문의 문주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지만, 서구식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파의 세계에서 고하를 결정짓는 건 결국 힘이었으니까.
“크흐흐. 피차 같은 목적으로 온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심합시다. 입이든 목이든 뒤통수든.”
장삼은 기분 나쁜 웃음을 남기고 앞서 나갔다.
그 뒤를 어금니를 깨문 독문철이 따랐고, 서구식은 세 번째였다.
서구식의 일갈에 멈췄던 자들도 주춤거리다가 뒤를 따랐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진시황릉은 일생에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로 여겨졌다.
“채주! 저것 보십시오! 만금당의 깃발입니다!”
장삼이 멈춘 건 발굴단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복인이 놓고 간 만금당의 인부들.
장삼은 그들을 보자마자 뒤돌며 길을 막아섰다.
“대충 정리할 때가 됐구만.”
장삼은 쌍도끼를 어깨에 척 올리며 말했다.
“독 방주, 서 문주. 예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지금부터 여산은 이 장삼이 접수할 테니 돌아들 가시게.”
반발이 터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허…!”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장삼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굳히며 눈을 사납게 떴다.
“같은 사파인 걸 감안해서 한 번만 더 말해준다. 당장 꺼져. 여긴 내 거니까. 이제부터 입 여는 새끼는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라.”
유림채의 객관적인 전력은 흉사방에 못 미친다.
한데 뭘 믿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대는 걸까.
독문철이 살기를 퍼뜨리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지금…… 녹림을 믿고 까부는 것이냐? 그럼 본방의 뒤에는 련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가?”
독문철의 엄포에도 장삼은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비웃음을 띠었다.
“이래서 밑바닥 따까리들은 안 되는 거야. 천하 돌아가는 정세를 모르니 평생 그러고 살 수밖에. 나중에 어르신 말씀을 듣지 않은 걸 눈물 콧물 흘리며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줄 때….”
의기양양하던 장삼이 움찔한 건 그때였다.
그는 독문철과 서구식의 뒤를 보고 있었는데, 부리부리한 눈을 치뜬 채 말을 멈췄다.
“어… 어엇?”
“무슨 개수작이냐! 계속 말해봐라! 뭐가 어쩌고 어째?”
독문철이 칼을 뽑아 들던 말던 장삼은 어깨에 올렸던 도끼를 내리며 앓듯이 중얼댔다.
“화, 화산파…?! 저놈들이 여길 왜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