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19화 (319/463)

319화

타오를 듯한 적색 무복과 가슴에 수놓인 분홍빛 매화.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의 기세는 정파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웠다.

사방 천지에 투기를 흩뿌리며, 삼십여 명의 검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화검수…!”

뒤에 있는 이십여 명의 검에 노란색 수실이 매달려 있는 데 반해, 선두에 선 일곱 명의 장식은 붉은색이었다.

그 붉은색 수실이 바로 화산을 대표하는 매화검수의 상징이었다.

화산파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후기지수이자 차세대를 견인할 검객들.

사파 무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많은 분들이 모여 계셨군요.”

일곱 명의 매화검수 중에서도 가장 거센 기운을 뿜는 사내가 포권을 취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세 명의 수장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철혈검(鐵血劍) 강유…!’

정파의 후기지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별호지만, 그의 성정은 별호 그대로였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검을 쓰길 주저하지 않으며, 냉철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호전적이었다.

무자비하다는 소문이 돌 만큼 화산의 적에게는 가차 없기로 유명했다.

사파의 수장들은 차기 화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남자를 마주하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하필 저 새끼가…! 타협이나 거래가 아예 불가능한 놈이잖아?’

장삼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평범한 매화검수라면 골통을 부숴놓을 수 있지만, 강유라면 다르다.

저건 일대일로는 답이 안 나오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섯 명의 매화검수와 스물이 넘는 이, 삼대 제자.

산채의 정예가 팔십이라지만, 병력의 질에서 밀리기 때문에 견적이 나오지 않는 승부였다.

“음하핫! 먼발치서 뵌 적은 있는데,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요. 나 유림채의 채주 장삼이오!”

장삼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우렁차게 외쳤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누가 봐도 주눅이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증자 선배께서 놀라운 발견을 하셨다 하여 나와 독 방주, 서 문주가 이리 모였소. 평생 외길을 걸은 선배께서 마침내 성과를 내셨으니, 후배들이 축하해드리는 게 마땅하지 않겠소이까?”

산적 두목이 축하?

강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누가 봐도 어림없는 소리였으나 강유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먹히고 있다고 여긴 장삼은 빠르게 덧붙였다.

“하여 겸사겸사 친목을 다지는 자리를 마련했소. 본채와 흉사방, 대혈문이 워낙에 각별한 사이라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꺼지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던 놈이 이런 뻔뻔한 소릴 늘어놓다니.

유림채 혼자서는 화산파를 감당하기 힘드니 은근슬쩍 다른 둘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이었다.

독문철과 서구식은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장삼이라면 타협할 여지라도 있지만, 강유와는 그런 게 아예 불가능하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좋은 시간 되시길.”

강유는 피식 웃었으나 장삼의 말에 딴지를 걸진 않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화산의 제자들을 인솔해 만금당의 막사로 다가갈 뿐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장삼이었다.

“자, 잠깐! 강 후배… 아니지, 강 소협? 화산파도 만금당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거요?”

“채주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고증자 선배님의 업적을 축하드리러 왔지요.”

제가 해놓은 말에 자기가 걸린 꼴이었다.

축하하러 왔다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장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다가 황급히 다가갔다.

“와하핫! 그럼 같이 가도록 하세! 뭐 하시오, 두 분? 어서 이리로….”

장삼을 멈춰 세운 건 강유였다.

“같이요? 저희가 그럴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영이 엄연히 다른데 그건 불편하군요. 솔직히 언제든 칼부림이 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까? 저희가 먼저 방문할 테니 세 분께선 회포를 푸시지요.”

노골적인 거부였다.

장삼의 눈썹이 꿈틀했고,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로서는 이만하면 많이 양보한 셈이었는데, 강유가 적대적으로 나오자 인내심이 끊어졌다.

무엇보다 장삼에겐 믿을 만한 패가 있었다.

“흐흐. 이 애송이가 화산파 장문인의 얼굴을 봐서 양보를 좀 해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언제든 칼부림이 날 수 있다라……. 지금 그렇게 해주랴?”

기겁을 한 건 독문철과 서구식이었다.

그들은 장삼이 세력의 차이를 이용해 적당히 어르고 달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막 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도련을 등에 업고 있지만, 화산 또한 뒷배에 정도맹이 있었고, 각개전투로 들어가면 화산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얗게 질린 그들에게 장삼의 전음이 들렸다.

「며칠 전, 패군의 전령이 총채주께 당도했소. 머지않아 녹림은 사도련과 연합하게 될 것이오. 장강의 수적 놈들도 그럴 테지. 명이 들어서고, 천하각지가 꿈틀대고 있는 건 알고 있을 거라 믿소. 좋으나 싫으나 전쟁은 곧 터지오. 정확히 삼등분. 긴말하지 않겠소이다.」

선택하란 뜻이었다.

어차피 전쟁은 발발할 것이고, 그렇다면 싸우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오늘 한몫 단단히 챙겨서 전쟁을 대비하겠는가, 아니면 빈손으로 돌아가서 쭈그리고 있다가 줘 터지겠는가.

다행히 화산파의 숫자는 삼십에 불과했고, 그 정도면 흉사방을 빼고 대혈문과 유림채의 연합만으로도 찍어 누르는 게 가능했다.

「빌어먹을……. 선택권이 없군. 그래도 가급적 죽이진 말고 위압해서 돌려보내는 쪽으로 갑시다.」

「약속은 지킬 거라 믿소. 장 채주.」

빠르게 결단을 내린 둘은 장삼에게 합류했다.

그들이 앞으로 나서자 수하들도 눈치를 채고 뒤를 따랐고, 삼백에 가까운 사파 연합은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유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조그만 이익에도 서로 칼을 휘두르는 놈들이 설마 즉석에서 손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치하던 놈들이 말이다.

하지만 강유 또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기다리던 아군이 도착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남색의 무복을 입고 군문에서 쓸 법한 장검을 든 그는 오십여 명의 검사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구파일방의 하나이자, 화산파와 함께 섬서성을 정파가 강세인 지역으로 만든 명문.

“조, 종남파?!”

사파 수장들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심지어 노인은 종남파의 장로 중 한 명인 천성검(天星劍) 오무양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지금 그대들이 화산파를 핍박하고 있던 게 맞소이까?”

매서운 일갈에 흉사방과 대혈문 무인들이 움찔댔고, 화산파 문도들은 안심한 표정이 됐다.

종남파가 다행히 시간을 맞춘 것이다.

기세가 뒤집힐 뻔한 순간, 유림채 쪽에서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렇다면 어쩔 것이오? 다 죽이기라도 할 건가?”

사내의 키는 작았다.

하지만 칼날도 튕겨낼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이 돋보였고, 양손에는 녹색의 광택을 띠는 권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성명병기였으니, 산적들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정파 쪽이 술렁였다.

“호, 호살권(虎殺拳) 초패?!”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녹림 총채주의 호법을 담당하는 거물이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초패야말로 오늘 장삼이 안하무인으로 들이댈 수 있었던 원인이자 숨겨둔 비장의 패였다.

‘초패라니…! 종남과의 연합이면 사파 놈들이 얼마가 오든 압도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건…!’

강유는 처음으로 오늘 여산에서의 행보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패는 녹림 총채주의 오른팔로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권법의 달인이며, 녹림 산적들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경망스레 굴던 장삼이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만 봐도 녹림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진시황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오. 천오백 년 전에 죽은 자의 무덤을 뒤지겠다고 이 많은 인원이 모인 걸 보면 말이오.”

초패는 여유로운 태도로 주위를 둘러봤다.

양측이 대립하는 사이, 큰 세력이 없거나 정사지간에 속한 인물들도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주위를 빼곡히 메운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강한 세력과 거물들이 등장하며 상황은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커지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싸움에서 물러선 적이 없소. 원한다면 화산이든 종남이든 시원하게 붙어드리지. 허나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겠소이까?”

초패의 이름이 드높은 이유였다.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을 무력을 지니고 있지만, 무턱대고 손을 쓰지 않는 것.

그는 종남의 장로 오무양을 보며 말했다.

“우린 소문을 듣고 달려왔을 뿐 진시황의 무덤이 진짜 있는지 알지 못하오.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만금당의 인원들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물읍시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를.”

“음…….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끼리 난리를 피우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겠지. 동의하오.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합의를 이끌어 냈다.

물론 진시황의 무덤이 사실이고,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돌변할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현명하시군. 그럼….”

초패가 만금당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그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이, 만금당의 인부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고,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거지? 여기서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제까짓 것들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만금당의 힘이 막강하니 함부로 대할 순 없지만, 정파든 사파든 그들을 순순히 놔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인부들이 향하는 지점을 확인했을 때, 초패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뭐냐, 저건? 범?”

난 아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웅크리고 있는 짐승.

새하얀 털빛을 지닌 백호가 무료한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무덤 안은 눅눅했다.

그리고 불쾌한 냄새로 가득했다.

공기가 통하는 구멍이 있는지 숨을 쉬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환기까지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천오백 년간 가라앉은 지하 무덤의 냄새가 안으로 들어선 탐사대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횃불을 켜게.”

천하 상계의 삼분지 일을 주무르는 만금당의 적손답게 금복인은 야광주를 인원수대로 준비했다.

하지만 횃불만큼 밝을 순 없었고, 탐사대가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고오오오―

바람이 동굴을 휩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기운이 일어나며 무덤의 내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그건 문외한인 마른 비가 듣기에도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장치가 몸부림을 치는 소리.

그전에 느꼈던 기운의 흐름은 술력의 발동이 틀림없었다.

화아아악―!

일행의 앞으로 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성 셋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만한 넓이의 동굴은 천연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노동의 결정체였다.

그들이 앞을 볼 수 있었던 건 통로 양옆에 줄줄이 박힌 야광주 덕분이었다.

“허…! 이게 대체 몇 개야? 황제라더니 상상할 수 없는 재보를 모았나 보군.”

양옆의 벽과 천장에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탐사대가 걷기 시작하자 좌우의 바닥 틈새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세상이 그들과 함께 흐르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사였다.

“……대단하군요. 술법으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그나마 상황을 파악한 건 미카엘이었다.

갑자기 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며, 야광주가 꺼져 있다가 빛을 되찾은 듯이 일제히 켜진 것.

이건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는 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치… 누군가가 들어설 때까지 공간과 시간 자체를 멈춰놓은 듯하군요. 아니, 아무리 엄청난 술법이라도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밀폐라고 보는 게 맞겠어요. 기관과 술법을 융합하여 이 안의 모든 걸 막고 닫아두었다가, 입구가 열리는 순간 발동되게 한 것.”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상식 자체를 뒤집어야 했다.

천오백 년 전의 기술과 술법이 현재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니까.

“대단하긴 하지만, 기관은 특출 날 게 없다. 특별한 건 그 요상하기 짝이 없는 술법이야. 그게 기관에 덧씌워져서 이런 기막힌 현상을 만드는 거야.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군.”

왕문은 혀를 끌끌 찼다.

이론과 지식, 경험에 기초하여 물건을 만들어내는 장인에게 술법이란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일 뿐이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놔둬도 될 걸 왜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는 거죠? 들어간 노고가 상상을 초월할 것 같은데.”

차유람의 질문에 답한 건 설지굉이었다.

“그냥 미친놈이 분명해. 나중에 들어올 후손에게 내가 이 정도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보지.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을 통일한 자의 불꽃같은 허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게다.”

설지굉의 말이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술법이 무덤 내 장치가 풍화되는 걸 막아줬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탐사대가 감탄을 흘리는 사이, 마른 비는 주저앉아서 졸졸 흐르는 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봐! 물이 은빛이야. 진짜 신기하네. 마셔볼까?”

“안 돼! 그걸 마시면 안 된다, 비아야!”

금복인의 호통에 마른 비가 몸을 움찔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