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뭐야? 왜 그래? 할아버지?”
금복인은 허겁지겁 다가와서 수로에 흐르는 물을 살폈다.
그리고 마른 비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 녀석아! 이건 물이 아냐! 수은이란 말이다! 수은에 중독되면 뇌 손상, 마비, 섬망(譫妄) 등의 증상을 겪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절대 먹어서는 안 돼!”
“수은?”
왕문도 큰일 날 뻔했다는 듯 혀를 찼다.
“상온에서 유일하게 액체 상태로 있는 금속이다. 철장들이 합금을 만들 때 사용하지. 독성이 있어서 대단히 유해한 물질이야. 이걸 손으로 떠먹으려 했다니……. 수왕이 수은 때문에 중독사하는 걸 볼 뻔했군.”
대량의 수은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것.
야광주와 벽에 그려놓은 무늬도 그렇지만, 진시황이 무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금복인은 왜 굳이 수은인지를 알아챘다.
“진시황은 수은을 불로불사의 영약이라 여겼다지. 그가 마흔아홉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유를 수은 중독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정말 그렇다면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영생을 꿈꾸었던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독을 스스로 들이마셔서 죽었다니.
“만지는 건 괜찮지?”
“굳이 그걸 만질 이유가…….”
마른 비는 수은을 살짝 떠서 손에 담았다.
영롱한 은빛을 띠는 액체는 과연 불로불사의 묘약이라 믿을 만큼 신비로웠다.
“끄응…. 수은을 처음 본 모양이군. 그럼 신기할 만하지. 옜다. 손 깨끗이 씻고 따라와.”
왕문은 수통을 건네고 먼저 나아갔다.
마른 비는 수은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며 감탄하다가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가 멈춰 있는 사이, 미카엘과 차유람은 통로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역시 같은 종류의 술법입니다. 특정 피를 지닌 자만이 통과할 수 있게 돼 있군요.”
탐사대는 벽면을 꽉 채운 석문 앞에서 멈췄다.
미카엘은 눈을 감고 술법의 흐름을 느꼈고, 차유람은 기관의 구동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벽면을 더듬었다.
두 사람은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서 서로를 마주 보며 양옆에 섰다.
“물러나십시오.”
기하학적인 무늬로 덮인 외벽.
문을 여는 누름 쇠는 일반인은 도저히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위장돼 있었다.
그그그긍―
동시에 누르자 문이 열렸고, 미카엘은 잽싸게 입구를 막아섰다.
그가 대검을 전면에 세우자마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비수가 튀어나왔다.
채채채채챙―!
재질을 알 수 없는 대검과, 서방과 동방 제련술의 정화가 담긴 갑주.
미카엘은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 덫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우와아아~! 진짜 멋져! 아저씨, 나도 저거 만들어주면 안 될까?”
마른 비의 외침에 왕문은 눈썹을 찌푸렸다.
“너 놀러 왔냐? 까딱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곳에서 그런 말이 나와? 금 영감, 이놈 이거 왜 데려온 거요?”
대답은 설지굉이 해주었다.
“원래 그런 놈이다. 일일이 신경 쓰면 화병에 죽을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해.”
왕문을 기막히게 만드는 사람은 또 있었다.
“왜요? 쾌활해서 보기 좋은데요, 뭘. 수왕 님 없이 우리끼리 왔다고 생각해봐요. 다들 숨 막히게 진지하기만 해서 질식사했을걸요?”
차유람은 너스레를 떨더니 마른 비에게 눈을 찡긋했다.
마른 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의 판금갑을 더듬었고, 금복인과 금벽파라는 둘이서 쑥덕이며 문에 담긴 기호들을 해석하느라 바빴다.
전흠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금복인의 곁을 지켰으며, 설지굉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왕문의 눈에는 모든 게 총체적 난국일 뿐이었다.
“하아……. 어쩌다 이런 희한한 인간들만 잔뜩….”
저마다 관심사가 다른 일행의 시선을 끌어당긴 건 문 건너편의 풍경이었다.
화아아악―!
문이 열리자 술력이 발동되고, 멈춰 있던 기관이 가동됐다.
원형의 벽을 따라 빛을 내는 수백 개의 야광주.
널찍한 광장에는 진시황이 남긴 찬란한 결과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문도(天文圖)…!”
탐사대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엔 중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초대형 천문도가 양각돼 있었다.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나타낸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만큼 웅장했다.
천문을 공부하는 자라면 눈이 뒤집히리라.
동굴의 어둠과 야광주의 푸르스름한 빛은 광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발상의 규모가 달라. 정말 대단하군…….”
대단한 건 바닥에도 있었다.
산과 강, 평원과 숲 등을 세밀하게 조각한 그것은 천하의 지형을 본뜬 지도였다.
동굴의 바닥을 통째로 깎아서 지형의 높낮이까지 구현한 중화전도(中華全圖)는 혀를 내두를 만큼 정교하고 세밀했다.
최초로 중원을 제패한 자가 남겨놓을 만한 걸작이었다.
“미친……. 인부들을 갈아 넣었겠군.”
철저하게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설지굉은 그다운 감상평을 내놨다.
금복인도 마냥 감탄할 수만은 없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이런 규모의 건축물이라니……. 셀 수도 없는 사람이 죽었겠어. 작업 중에 실수한 자들을 가만히 놔둘 성격도 아니었을 터.”
일행은 감탄과 씁쓸함을 버무린 얼굴로 나아갔다.
초입부에 이런 게 있다면 안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또다시 나타난 문을 열기 위해 미카엘과 차유람이 나설 때, 마른 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음?”
신경을 건드리는 묘한 기운.
심층부에 가까워져서일까?
술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감각에 잡힌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좀 더 순수하고 근원적인….’
자연기가 절로 반응할 만큼 강대하고도 순정한 무언가였다.
또한 전혀 상반된 기운도 동시에 느껴졌다.
소름이 돋을 만큼 끈적한 기운.
그건 전에 마주쳤던 괴생물체를 떠올리게 했다.
‘……마라! 그 괴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과 흡사해. 여기에 왜 이런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마가 제조하던 부정한 생명체와 비슷한 기운이 왜 여기서 느껴지는 걸까.
마른 비의 생각을 멈춘 건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꺄아악!”
고개를 돌리니 차유람이 팔뚝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차 소저…!”
미카엘이 놀라서 다가갔고, 마른 비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차유람은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외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벽의 틈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름 쇠를 찾고 있었는데 칼날이 튀어나왔어요. 한 방 먹었네.”
무늬로 뒤덮인 벽 속에 숨겨진 칼날.
누름 쇠를 찾아내며 여기까지 온 자들을 노린 덫이었다.
문을 연 뒤에야 기관이 발동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침입자가 방심한 틈을 노린 게 틀림없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안배였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뻔했잖아. 오기 생기네, 이거.”
차유람은 상처를 핥은 후 피를 퉤 뱉었다.
독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지혈이 끝나자마자 벽에 달라붙었다.
“모조리 파훼하고 만다. 낱낱이 파악해서 전부 해체해주겠어. 당신 무덤을 안전한 유적 관람지로 만들어줄 테니까 기대해.”
차유람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묘한 승부욕이 발동된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글대는 눈동자로 고인에게 선포했고, 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맛이 갔어. 정상이 아냐, 정상이.”
하지만 차유람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등짐에서 희한하게 생긴 철제 도구들을 꺼냈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번쩍이는 눈으로 해체 작업에 몰두했다.
“니들, 다 죽었어…….”
술법의 흐름을 읽고, 기관의 구동 원리를 파악한다.
그리고 해체한다.
단순히 조건에 맞춰 누름 쇠를 누르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기관 자체를 멈춰버리고, 영원히 못 쓰게 만드는 적극적인 공략이었다.
마른 비로서는 배워도 흉내를 못 낼 솜씨가 펼쳐졌다.
“와… 저 누나, 멋진데?”
중원 최고의 도적이자 해체 전문가라더니 과연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심처에 가까워질수록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덫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바닥이 꺼지는 함정이 나타나자 보이지도 않는 틈새를 찾아내어 발판을 들어 엎었고, 강침이 튀어나오는 기관은 용수철의 연결부를 끊어버렸다.
출구가 닫히며 사방의 벽이 조여 오는 공간에선 훌쩍 뛰어오르더니 손에 든 도구로 천장 여기저기를 쑤셨다.
그러자 벽들이 덜컹 멈췄는데,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좌측 벽의 구석을 발로 툭 쳤다.
퍼서석― 그그그긍!
벽면이 부서지며 기어서 지날 수 있는 작은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유람은 숫자를 맞춰야 열 수 있는 원형 자물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른손에 든 도구에 내공을 주입하여 경첩을 잘라버린 것이다.
왼손으로는 강제로 열 경우 작동되는 기관을 동시에 해체해 버렸다.
여규의 사일검이 부럽지 않은 쾌속한 손놀림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제가 할 일이 없네요.”
진가를 드러낸 그녀의 솜씨에는 미카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술법으로 착란을 일으키는 함정은 요상한 그림이 그려진 부적을 태워서 술력 자체를 해소시켰고, 극독이 살포된 곳에선 작은 병을 바닥에 던져서 깨뜨렸다.
그러자 독분이 퍼진 방이 청량한 공기가 감도는 쾌적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뭘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덕분에 일행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위험 지역을 돌파할 수 있었다.
“후우… 이런 지독한 곳은 처음 봐. 나중에 비용 청구할 거예요. 평생 모은 밑천 다 날아가겠네.”
뚝딱뚝딱 해치우는 겉모습과 달리 만만치 않은 작업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본격적인 공략에 나선 이후 웃지도 않았고, 눈을 돌리는 법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등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뻥 뚫린 공간 앞에 다다른 그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제길. 이건 목숨을 걸어야겠는데…….”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냥 저 앞에 작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침없이 전진하던 그녀는 발을 떼지 못했다.
“……설 선배님 말씀이 옳았어. 진시황은 미친놈이야. 이건 그냥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관이잖아!”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며 진시황의 피를 이은 놈을 여기다 던져 넣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왜? 어떻게 해야 지나갈 수 있는데?”
마른 비가 묻자 차유람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냥 가서 튀어나온 손잡이를 돌리면 돼요. 문제는 사방팔방에서 암기가 쏟아질 거란 점이에요. 그리고….”
“간단하네. 여긴 내가 열게. 밥값은 해야지.”
마른 비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기관 장치에 대해 충분히 관찰했고, 이제 대충 뭐가 튀어나올지 감을 잡았기 때문이다.
“자, 잠깐! 수왕 님! 그냥 가시면…!”
차유람은 판금갑을 두른 미카엘에게 부탁하려 했으나 마른 비는 마음이 급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기운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열린 공간에 들어선 순간,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 종류의 비수가 쏟아졌다.
후와아악― 쾌애애애액―!
“뭐야? 만천화우랑 비슷하네?”
움치고 뛸 공간도 허락지 않는 절대 사지.
최종 관문으로 추측되는 이곳은 인위적으로 구현한 암기 폭풍이 도사린 곳이었다.
마른 비는 삼 년 전 겪었던 당문휘의 암기술을 추억하며 팔을 휘둘렀다.
채채채채채챙―!
권막(拳膜)이 펼쳐졌다.
눈으로 잡을 수도 없는 손놀림은 상체를 완벽하게 방어했고, 하체를 노리는 비수는 풍압으로 밀어낸다.
주먹에 자연기를 밀어 넣을 필요도 없었다.
비수들은 왕문이 준 권갑을 뚫지 못했으니까.
“아저씨, 이거 굉장히 편해. 자연기의 소모를 확 줄일 수 있겠어.”
마른 비는 평온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감사를 표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비수의 폭풍 속에서 활짝 웃는 얼굴은 놀랍도록 이질적이었다.
“허…! 동부가 난리가 난 이유가 있었군. 수왕이라 불릴 만해. 괴물이구나…!”
왕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역시 어딜 가도 강하다는 소릴 들을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마른 비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알고 있나? 저 녀석, 삼 년 전에 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걸. 그냥 참고하라고.”
설지굉이었다.
그는 턱을 높이 올린 채 우쭐한 얼굴로 왕문을 바라봤다.
왕문이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을 때, 미카엘의 눈가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동방의 무예는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몸을 쓰는 방식, 기운을 활용하는 기법…….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배울 점이 많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대검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비아와 내가 싸운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