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21화 (321/463)

321화

그건 미카엘이 처음으로 느낀 호승심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예란 몸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권막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이 익힌 대검술과 마른 비의 체술을 견주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상의 싸움을 그리고 있었다.

‘대검의 거리 안에 붙들어 놓으면 해볼 만하다. 허나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필패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마른 비와 자신이 붙는다면 간격을 점유하는 싸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기회를 잡는 순간,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날 것이다.

지금은 현란한 손놀림을 보이고 있지만, 마른 비 또한 자신처럼 강렬한 일격으로 승부를 가리는 유형이 분명했으니까.

‘놀랄 일이군. 내게도 이런 승부욕이 있었던가. 주교님께서 아시면 즐거워하시겠어. 볼 때마다 참으로 다양한 자극을 주는 친구구나.’

미카엘의 상념을 깬 건 여인의 상기된 목소리였다.

“꺄악~! 너무 멋져~! 수왕 님! 여기서 나가면 내 꺼 해요!”

왕문과 설지굉이 혐오스런 표정을 짓든 말든 차유람은 발개진 얼굴로 열광했다.

마른 비가 문에 가까워지자, 그녀는 아차 하는 얼굴로 외쳤다.

“수왕 님! 다른 건 건드리면 안 돼요! 힘으로 부수거나 엄한 걸 건드리면 통로 전체가 매몰될 수도 있어! 손잡이를 우측으로…!”

“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마른 비가 툭 튀어나온 손잡이를 좌측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에구. 미리 말해 줘야지, 그런 건.”

푸화하하학―!

불길한 소음과 함께 녹색의 연기가 마른 비를 뒤덮었다.

차유람이 펄쩍 뛰며 소리 질렀다.

“독?! 아, 안 돼! 해독제를…!”

차유람이 품에서 병을 꺼냈지만, 그녀의 얼굴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저 정도의 독무라면 이미 한 줌 핏물로 녹아내렸을 테니까.

그녀가 자책과 슬픔으로 주저앉으려는 찰나, 태연한 음성이 들렸다.

“괜찮아. 진정해. 나 아무렇지도 않아.”

마른 비는 먼지라도 들이마신 것처럼 콜록대다가 손을 휘휘 저어서 연기를 흩어 버렸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더니 반대로 돌렸다.

문이 그르릉 소리를 내며 열렸다.

“……뭐, 뭐야, 저놈? 설마 만독불침?”

왕문이 어버버 대자, 설지굉이 대꾸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해라. 원래 저런 놈이니까.”

그는 오른손으로 휑한 왼팔을 쓰다듬었다.

“제길.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갑시다, 금 형. 거의 다 온 것 같구려.”

애뢰산에서의 일이 기억난 설지굉은 씁쓸한 얼굴이 됐다.

탐사대는 마른 비가 열어놓은 입구로 들어섰고, 또 한번 장엄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대규모 병력이 한바탕 전투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광대한 동굴.

그리고 그곳엔 실제로 병사가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흙을 구워 만든 인형이었지만.

“맙소사……. 족히 일만 개는 되겠어! 왜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거지? 설마 친위대를 구현한 건가?”

금복인은 보자마자 진시황의 의도를 짐작했다.

살아생전에 자신을 호위하던 군사들을 그대로 본 따 무덤에 들여놓은 것이다.

목제 전차를 끄는 전차병부터 보병, 궁노병, 말을 탄 기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사 편제가 모두 존재했다.

인형들은 실제 사람의 크기와 동일했는데, 갑주를 걸치고 있었으며, 청동제 무기와 철제 무기를 골고루 장비하여 굉장한 위압감을 주었다.

더욱 놀라운 건 한 명 한 명의 생김새가 전부 다르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갑옷 안의 옷차림과 두발 형식까지 세밀하게 구현해놓아서 친위대의 민족 구성을 짐작게 했다.

“역시 미치더라도 통이 크게 미쳐야 해. 미친 짓을 규모 있게 하니까 경이로움이 들 지경이로군.”

설지굉조차도 이번만큼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지하 광장을 채운 일만의 병사는 진시황 친위군단의 막강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병마용(兵馬俑)…! 그리 부르는 게 적당하겠군.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야! 이걸 발굴한 것만으로도 내 일생은 헛되지 않았네.”

금복인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진시황의 무덤을 찾았고, 발굴에 성공했다.

이건 당대의 군사편제와 무기, 갑옷 등의 연구에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미쳤다고 욕할 때, 굳은 신념으로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온 노인은 마침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음? 표정이 왜 그러느냐?”

묘한 기류를 감지한 건 설지굉이었다.

그는 마른 비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살폈는데, 누구보다 신이 나서 감탄사를 토해야 할 놈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마른 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병마용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일행이 돌아보자, 마른 비는 천천히 말했다.

“……저 끝의 말 탄 장수부터 좌우측의 보병대장. 그리고 이 앞의 전차대장. 이제는 백인대장급 인형들까지. 잘 봐. 이것들… 움직이고 있어!”

화아아악―!

익숙한 술력의 기운이 휘몰아치고, 일만 병사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끼리릭―

‘그것들’이 일시에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봤다.

일만 쌍의 눈이 번쩍이며 한곳을 주시하는 광경은 전율적이었다.

마른 비가 침을 꿀꺽 삼키며 경고했다.

“긴장해. 이놈들, 우릴 가만 놔둘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까.”

* * *

“체내에 강대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저게 정녕 짐승이 맞단 말이냐?”

초패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별비를 보았고, 보자마자 깨달았다.

무심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백호는 자신으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라는걸.

‘기운이 맑다. 요수나 마수 따위가 아니야. 영수…….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북벌을 기점으로 천하 각지에서 녹림 식구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숲이나 산을 거점으로 삼는 녹림도의 산채를 습격하는 짐승들.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그것들 때문에 녹림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눈이 벌게진 채 날뛰는 괴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산채로 난입하여 인간을 해쳤고, 사냥이나 약탈을 위해 나가 있던 식구들이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총채주까지 직접 나서서 소탕 작전을 벌인 끝에 사태는 진정됐지만, 기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산의 지기가 흐르는 곳에서 인위적으로 박아놓은 검은색 말뚝이 발견되는가 하면, 짐승처럼 행동하는 수인을 봤다는 목격담도 줄을 이었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초패는 최근 ‘힘을 지닌 짐승’에 대해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저건 식구들을 공격한 짐승과는 달라. 이토록 영험한 기운을 지닌 백호라면…… 최근 귀 따갑게 들리는 ‘그’의 상징이 아닌가!’

생각을 정리한 초패는 확신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수왕. 그가 여산에 와 있는 건가?”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왕? 북벌에서 날뛰었다는 이민족 사내 말이야?”

“마, 맞다! 엄청나게 강한 백호를 데리고 다닌다고 들었어!”

“그자가 왜……. 설마 만금당과 인연이 있었나?”

추측이 맞는 듯했다.

정파와 사파 무인들에게서 멀어진 만금당의 인부들이 마치 몸을 의탁하듯 백호의 뒤에 숨었으니까.

“벼, 별비 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저희를 좀 지켜주시면 안 될까요?”

“크르르앙?”

‘내가 왜?’라는 표정이었다.

무림인들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범을 보며 놀라워했고, 만금당의 식구들은 당황해서 말이 빨라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희가 저들에게 잡히면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겁니다. 금 노야와 수왕 님은 가까운 사이지 않습니까? 수왕 님도 무덤에 들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별비한테 말해.’라고.”

“그르릉…….”

〔비아, 이 망할 자식이 귀찮은 건 나한테 죄다 떠넘기고…….〕

별비가 짜증을 낼 때, 무림인들의 눈이 번쩍였다.

‘무덤에 들었다고?! 있다! 확실히 있어! 고증자가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한 게 맞아!’

확신을 얻은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은 눈알을 굴리며 전력을 가늠했다.

그중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장삼이었다.

‘병력의 질은 정파 놈들이, 숫자는 우리가 우위에 있다. 원래라면 승산이 희박했겠지만, 초 호법이 계시니 충분히 해볼 만해!’

만금당 인부들을 닦달해서 무덤의 위치와 내부 상황을 알아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난데없이 끼어든 백호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어졌다.

느껴지는 힘도 엄청나지만, 수왕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짐승을 건드렸다가 그가 정파 쪽으로 붙기라도 한다면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바투와 무칼리를 패퇴시키고, 황제와도 연이 닿아 있는 마른 비는 녹림으로서도 척을 지기 꺼려지는 상대였다.

‘무덤 내부에 수왕이 있더라도 그건 차후의 일. 일단 정파 놈들을 밀어내고 생각한다.’

장삼이 협박성 짙은 경고를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장내로 들어선 인물들 때문에 그의 입이 봉해졌다.

저벅, 저벅.

그들은 매우 초췌했다.

장기간 노숙을 했는지 꾀죄죄할 뿐만 아니라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은 듯 핼쑥했다.

옷에 피가 말라붙은 걸로 보아 오랫동안 전투를 치른 것 같았다.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이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살기.

켜켜이 쌓인 원한이 모공에서 흘러나오듯 그들은 지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 사천 운가?”

그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종남파의 장로 오무양이었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살피다가 선두에 선 노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황급히 다가서며 정중히 예의를 갖췄다.

“종남의 장로 오무양입니다. 가주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에….”

정파의 인물들에게 여산에서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장삼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나타난 게 운가이고, 심지어 그들을 이끄는 게 운가주라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북벌이 시작되기 전, 사천성에서 당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가문.

천북제일무가의 가주 운종혁이 칙칙하게 죽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오 장로……. 오랜만이구려. 종남과 화산도 여기에 와 있었는가. 무인의 기척이 느껴져서 와봤건만 ‘놈들’이 아니었군.”

영혼 없는 말투였다.

그는 누가 얼마나 모였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운종혁은 응어리진 살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무얼 찾는 거지? 아… 살막! 삼 년째 전쟁 중이라더니…!’

마른 비를 노렸던 사편 갈우영의 손에 하나뿐인 적손이 죽은 후, 운종혁은 살막과의 전쟁을 선포했었다.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게 된 두 집단은 어느 한쪽의 씨가 마를 때까지 싸우게 됐고,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느 문파끼리의 싸움이라면 벌써 결과가 나왔겠지만, 운가의 상대는 중원 삼대 살수 문파 중 하나인 살막이었다.

‘장안의 종루를 타격하는 걸 시작으로 살막의 드러난 세력은 몰살했다고 했다. 허나 막주를 잡지 못해서 여전히 섬서성을 들쑤시고 다닌다더니….’

하나뿐인 적손을 살수에게 잃었으니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혀를 내두를 만한 집요함이었다.

살막의 암습에 운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대일이라면 천북제일무가가 질 리 없었다.

실제로 살막의 구 할을 섬멸한 그들은 막주 하나만을 남겨놓은 채 추격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막주가 여산에 숨어들었다는 보고가 있었지. 혹시 보지 못했소이까?”

운종혁은 정파와 사파의 대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신경은 오로지 살막주에게만 쏠려 있었고, 운가의 등장으로 내심 기뻐하던 구파의 인물들은 난처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운가의 가주에 정예 팔십 명! 저놈들이 끼면 답이 안 나온다. 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

마음속으로 빌던 장삼은 퍼뜩 좋은 생각을 떠올렸고, 다급히 외쳤다.

“가주님! 유림채 채주 장삼이오! 혹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막주놈을 찾는 게 아니십니까?”

“……놈들을 보았나?”

원래라면 말을 섞는 것도 불쾌하겠지만, 운종혁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섬뜩한 살기로 번뜩이는 노가주의 눈빛에, 장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벌, 뭔 놈의 눈빛이….’

“보, 보았습니다. 산을 올라오는데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놈이 나무 위로 경공을 펼치는 걸 보았지요. 저, 저쪽이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장삼은 아무렇게나 동쪽을 가리켰고, 운종혁은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를 뿜어냈다.

“……거짓은 아니겠지? 만약 사실이어서 놈을 잡는다면 운가는 유림채에 막대한 포상금을 지불할 것이네.”

달리 말하면 거짓일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운종혁은 지금 유림채의 뒤에 있는 녹림을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가자. 오늘 기필코 막주 놈의 목을 잘라 이령이의 한을 달래줄 것이다.”

운가의 무인들이 동쪽으로 사라지자 화산과 종남은 한탄했고, 사파 연합은 쾌재를 불렀다.

“자… 그럼 슬슬 이 지루한 대치를 정리할 때가….”

장삼이 자신의 기지에 감탄하며 앞으로 나설 때였다.

그때는 병마용의 인형들이 마른 비 일행을 노려본 순간이기도 했다.

드드드드―

강대한 술력의 기운이 지하로부터 솟아오르며 대지가 요동쳤다.

슈아아아악―!

여산에 진입한 자들을 외부와 격리시키는 격벽.

진시황의 무덤에서 뿜어진 술력이 산 전체에 무형의 결계를 둘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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