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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23화 (323/463)

323화

그것은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분쇄할 신의 섬광이었다.

금빛의 십자가가 전면으로 뻗어 나가자 진시황의 전차대가 소멸했다.

성스러운 파멸의 빛.

홀리 크로스는 그 모순된 형용이 어울리는 기예였다.

“사라져라. 악의 부산물이여.”

미카엘이 양팔을 좌우로 확 벌렸다.

그가 팔을 잡아당긴 순간, 적진을 꿰뚫던 빛의 응집체가 폭발했다.

빛줄기가 비산하고, 눈부신 섬광이 전차대를 덮쳤다.

『카아아아아―!』

빛에 닿은 병사들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들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뭉클대며 솟아올랐다.

악기(惡氣)는 빛을 피해서 도망치듯 꿈틀댔으나 빛에 닿자마자 무력하게 소멸해 버렸다.

“물리적 타격과 술력의 제거! 두 가지를 동시에 해냈어…! 저 기운은 대체….”

마른 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포근하고 따스하며, 마음이 경건해질 만큼 고결한 빛.

육신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마른 비는 어둠을 사르는 성스러운 광파(光波)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아―!』

일행에게는 심신의 안정과 회복을 주는 성력이 적들에게는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냈다.

쿵- 쿠쿵- 후드득!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던 병사들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고꾸라졌다.

술력이 제거된 그들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 같은 게 솟았고, 이내 증발하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미카엘은 천천히 몸을 세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당신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을 짐작할 수도 없군요. 다 끝났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은 비틀대는 거한에게 닿아 있었다.

전차대장.

그의 머리 위에 머물던 희끄무레한 연기가 옅어지더니 결국 사라져 버렸다.

“자, 자네…… 지금 영혼과 대화한 건가?”

왕문이 불신 어린 어조로 물었다.

미카엘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닌 작은 능력입니다. 영혼과 교통할 수 있는……. 그가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더군요. 우리 덕분에 겨우 눈을 감을 수 있게 됐다고요.”

놀라운 일이었다.

영혼이란 호사가들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믿어왔던 왕문은 침음했고, 마른 비는 눈을 빛냈다.

“상단전. 방금 그거 상단전을 활용한 거 맞지?”

“그게 느껴지십니까?”

미카엘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대꾸했다.

“서방에는 중원에서 이야기하는 단전의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맞아요. 동방의 관념을 빌자면 상단전이 발휘하는 공능이 맞습니다.”

말을 잇던 미카엘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는데, 마른 비는 곧바로 이유를 알아챘다.

자신도 몇 번이나 겪어본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야수제어를 남발했을 때 나타나는 피로함.

미카엘은 뇌력을 전부 소진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표정을 본 그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상단전의 영향도 없진 않지만, 이건 성력이 바닥나서 그렇습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하군요. 제가 지친 가장 큰 이유는 중단전의 고갈 때문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하는 성력.

야수 제어가 그렇듯이 미카엘의 성력 또한 상단전과 중단전을 고루 활용하는 기예였다.

하지만 상단전에 큰 비중을 두는 야수 제어와 달리 성력은 중단전에서 발원하는 힘이었다.

여태껏 접하지 못했던 신비한 힘에 마른 비는 흥미를 느꼈고, 미카엘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뇌리를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게… 무엇이냐! 삿되고도 삿되도다!』

저 멀리 기마를 탄 무사가 토해낸 음성이었다.

그건 전차대장이 발한 목소리와 동일했는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료했다.

그 목소릴 듣는 순간, 일행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 설마 병사를 부리는 존재가?!”

군사들을 움직여서 일행을 공격한 술력.

그저 영혼에 각인된 일괄적인 명령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지를 지닌 채 술력을 발휘해서 병사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마 무사의 인형을 빌어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 있었다.

『중원을 떨게 만든 천하 최강의 용사들이여! 탐욕스런 침입자들이 폐하의 안식을 방해하려 하는구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암살자를 들였던 실수를 되풀이할 셈인가!』

그 존재는 이제 명료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느낌.

그의 말을 들으며, 금복인은 병마용이 만들어진 전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진시황이 일만 명의 친위병을 몰살한 이유가….”

이어진 음성이 금복인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죽어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라는 어명을 상기해라! 폐하를 위험에 빠뜨렸던 너희는 영면에 들 자격이 없도다! 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임무를 수행할 뿐…! 전군, 진격하라!』

군세로 진시황을 누를 수 없었던 열국들은 암살로써 그를 저지하려 했다.

숱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진시황은 황궁에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와 수십 개에 이르는 침실을 만들어 매일 다른 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도 형가(荊軻)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암살자의 칼날은 그의 안위를 위협했다.

“살수를 놓친 친위대를 죽인 게야! 전부 죽여 버리고, 그들의 영혼을 붙들어서 천년만년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한 거다!”

화가 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걸 명분 삼았다는 추측이 그럴듯했다.

멀쩡한 정예병을 무덤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몰살하면 엄청난 반발을 살 테니까.

영혼의 구속은 당연히 비밀리에 행해졌을 터였다.

치 떨리게 잔인하고, 지독히도 자신밖에 모르며, 섬뜩할 만큼 영악한 자였다.

“미카엘. 뒤로 가.”

마른 비가 권갑을 낀 주먹을 소리 나게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병마용의 탄생 비화를 알게 된 그는 무섭게 분노하고 있었다.

“지배자라는 족속들은 원래 이런 거야? 사람의 목숨을 뭐로 아는 거지? 자신이 소중한 만큼 타인도 귀중하다는 걸 왜 몰라!”

어린 시절, 점창과의 전쟁에서 본 공지량이 스친다.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천진운을 내버렸던 주원장이 떠오른다.

세상엔 선한 사람도 많지만,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을까 싶은 괴물들도 존재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마른 비가 눈을 매섭게 떴다.

“혼이 깃들 몸뚱어리를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겠지. 전부 다 부숴놓을 테니 뒤를 부탁해. 미카엘.”

소멸이라면 모를까, 혼을 정화시키는 일은 자연기로도 불가능하다.

여울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자신은 술사가 아닌 전사였다.

마른 비가 선택한 건 일단 모조리 부수고, 미카엘의 성력으로 혼을 성불시키는 거였다.

혼자 전부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지금 그의 옆에는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그가 치고 나가기 위해 번갯불을 준비할 때였다.

병사를 움직이는 술사의 혼이 이변을 감지했다.

『뭐냐, 이것은? 이놈들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기마대장의 인형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간의 기척.

수백 개에 이르는 생기가 저 높은 지상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대체 몇 놈을 끌고 온 것이냐! 버러지 같은 것들이 신성한 황릉을 잡스런 기운으로 더럽히는구나!』

“……?”

마른 비가 따라서 고개를 들었으나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그보다는 술력이 무덤을 외부와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마른 비는 아무리 기감을 끌어올려도 지상에 있는 무인들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감히…! 일어나라! 폐하의 시종들이여! 생생한 살코기를 뜯어 너희의 피와 살을 채워라!』

음험하고도 사악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구역질이 나는 시기(屍氣)가 광장을 가득 메우더니 눈에 보일 정도로 검게 응축됐다.

마른 비가 잔뜩 긴장하며 자연기를 끌어올렸을 때, 시기는 하늘을 향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뭐, 뭐야?”

당연히 공격을 할 줄 알았던 일행은 당황했다.

허나 금세 상황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위! 지상에 남은 인부들이…!”

금복인이 아연한 얼굴로 외쳤다.

만금당의 식구들과 섭외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발굴 작업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금복인은 외부에서 무인들이 들어왔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술사의 혼이 인부들의 생기를 감지하고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고만 여긴 것이다.

“구해야 해! 나만 믿고 평생을 손가락질 받으며 따라온 이들이다! 내가 죽더라도 아우들은 살려야만 해!”

운가에게 쫓기던 살막주가 여산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

그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지금 이 순간에도 천하 각지에서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금복인은 졸도할 지도 모른다.

그들의 욕심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많은 이가 위험에 처했다고 자책할 사람이었으니까.

“인부 아저씨들은 싸울 줄도 모르잖아?!”

마른 비는 일단 후퇴한 뒤에 지상으로 나가서 그들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 하나뿐인 출구는 막혀 있었다.

“이게 뭐냐! 기운의 응집체 같은 게 아냐! 이것도 술법인가?!”

왕문과 설지굉, 차유람이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투명한 막이었다.

건너편 통로가 훤히 보이는데 무언가에 가로막혀서 나가지 못하는 건 가슴이 콱 조일 만큼 답답한 일이었다.

‘자연기라면…!’

하지만 자연기라면 왠지 뚫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마른 비가 뒤돌아서 손을 쓰려 할 때, 귀청을 찢는 괴성이 들렸다.

『키아아아아―!』

좌우의 보병과 정면의 기병, 그 너머의 궁노병.

술사가 움직인 병마용의 병력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른 비는 보았다.

저 멀리서 기병대장의 인형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걸.

“……저놈을 부숴야 해. 저놈이 살아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놔줄 생각이 없나?

좋다. 어차피 나가지 못한다면 최단 시간 안에 네놈을 박살 내주마.

마른 비는 생각을 바꾸고 몸을 틀었다.

“전 아저씨와 금벽이는 할아버질 지켜. 미카엘은 힘을 회복하고, 다른 사람들은 날 따라와.”

미카엘이 성불시킨 전차대.

이천 구의 전투용 인형이 쓰러졌음에도 여전히 적의 숫자는 팔천에 달했다.

마른 비는 단 세 명만을 대동한 채 적들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무모했지만, 그의 등에선 패배가 읽히지 않았다.

* * *

드드드드―!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상대를 떨궈 낼 방법을 고민하랴, 별비를 탐색하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던 정사파의 무인들은 발밑을 내려다보며 웅성댔다.

“뭐냐, 이건? ……지진?”

이 시점에 난데없이 자연재해가 일어날 리 없었다.

이건 진시황의 무덤에서 이변이 벌어졌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을 때, 별비가 울었다.

“크르르르…….”

지저에서 꿈틀대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별비는 진지하고도 묵직한 표정으로 인부들을 돌아봤다.

“크르릉.”

‘저리 가 있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인부들이 주춤대며 거리를 벌렸다.

모두가 그들을 돌아봤고, 수백 명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별비는 땅에 귀를 가져다 댔다.

드드드득― 드드, 드…….

진동이 잦아들고, 사람들이 안심할 때였다.

영수다운 존재감을 뽐내던 별비가 눈을 확 찌푸렸다.

“크르앙?”

푸화아아악―!

지저에서 새카만 기운이 솟구쳤다.

술사가 내뿜은 사기가 지표면을 뚫고 분출하며 별비를 날려버렸다.

“키하앙―!”

개의 앞발에 얻어맞은 고양이의 울음소릴 흘리며 별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건 마치 돌풍에 휩쓸린 흰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크항…! 카하아앙!”

〔이런 씨…! 비아 이 새끼! 밑에서 뭔 짓을 하는 거야!〕

별비는 지상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하늘을 훨훨 날았다.

“이, 이럴 수가!”

“백아를 날려버릴 정도의 기운이라니…! 뭐가 튀어나온 거냐?!”

별비가 허우적대며 하늘을 나는 광경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검은 돌풍에서 흘러나온 소름 끼치는 악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산에 모인 무인들이 흠칫 떨며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키하아앙!”

투콰아아앙―!

벽력탄(霹靂彈)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별비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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