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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25화 (325/463)

325화

“뚫린다! 화산의 제자들은 태극의 위쪽을 보강하라!”

강유가 내공을 담은 목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화산과 종남의 진법조차 백골들을 완전히 차단하진 못했다.

그들은 검문의 검사들이었으며, 공격을 위한 검진이라면 모를까 퇴마를 위한 결계는 그들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간이 진법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는 백골들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가릉. 그라랑?”

〔봤냐. 이 몸의 위대함을?〕

철중구와 한참을 붙어 다녀서일까?

별비는 허세 충만한 말을 늘어놓으며 턱을 하늘로 쳐들었다.

아무도 녀석의 의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찌 짐승이 퇴마용 결계를…!”

“저쪽은 괴물들이 아예 다가가질 못해!”

“과연 영수라 이건가…….”

정파의 무인들은 경외심이 담긴 얼굴로 별비를 힐끗거렸다.

물론 별비가 퇴마용 결계 따위를 알 리 없었다.

녀석은 그냥 자연기를 흩뿌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게 괴물들을 밀어내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무인들에게는 오연히 버티고 서서 인부들을 지키는 백호가 하늘이 내린 영수처럼 보였다.

“초, 초 호법님. 우린 저런 거 없습니까?”

장삼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초패의 대답은 짤막했다.

“없다. 그저 자력갱생할 뿐.”

이 순간만큼은 녹림의 일원이라는 게 서글퍼지는 장삼이었다.

결계가 없는 대신 초패는 명성에 걸맞은 지휘력으로 병력을 추슬렀다.

“사파의 무인들은 이곳에 집결하라! 한곳에 모여 괴물들을 대적한다! 따로 싸우면 각개격파 당해서 죽을 뿐이야! 힘을 모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초패의 외침에 흉사방, 대혈문을 위시한 사파의 잔존 인원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녹림을 중심으로 둥글게 뭉쳤고, 초패가 지정해준 위치에서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했다.

세력별로 한 방향을 담당하며 교대로 싸움과 휴식을 취하자 충분히 버틸 만했다.

괴물들은 끝없이 되살아났으나 무력이 강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진형을 이루자 피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해볼 만해! 이놈들, 별거 아니잖아?”

소름 끼치는 외형도 적응이 되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자 실수가 없어졌고, 그들은 짚단을 베어 넘기듯 괴물들을 처리했다.

“크헤헤! 손맛이 있구만! 이거 인간을 상대로 칼질을 연습하는 기분인데?”

기세가 오른 사파의 무인들이 진형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점 앞으로 나가며 칼을 휘둘렀고, 삽시간에 원형 방진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 멍청한 놈들이…! 뭣들 하는 거냐!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해?!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 지금부터 자리를 이탈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감히 대들 엄두도 나지 않는 강자.

흉사방주와 대혈문주도 고분고분 초패의 지시를 따랐다.

사파의 무인들이 버티는 건 오직 초패 덕분이었다.

“우린 여산을 둘러친 결계를 깰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놈들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아! 최대한 힘을 아껴라.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니까.”

초패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사기 때문에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문제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교대로 싸우며 체력이야 어떻게든 안배한다고 쳐도 탈출이 불가능했다.

음식과 물도 없으니 장기전이 되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정파와 별비 쪽도 마찬가지였다.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초패가 발밑을 내려다보며 진시황의 무덤을 떠올릴 때였다.

먼 곳에서 인간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히이익! 이 괴물들은 뭐야?!”

“크아아악!”

“투명한 벽이…! 언제 이런 게 생긴 거야! 내보내줘! 끄아악!”

“사, 살려줘! 살려…!”

뒤늦게 여산에 진입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내부의 상황을 모른 채 산에 올랐고, 투명한 결계를 넘었다.

그리고 괴물들을 맞닥뜨린 게 틀림없었다.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밖에서 들어오는 자들은 막지 않는 건가?! 이런! 그럼 저 괴물들이 점점…!”

초패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뼈가 완전히 살점으로 뒤덮인 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 예뻐요?』

저주를 퍼붓는 것도 아니고, 악을 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초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초패가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다른 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흉측한 괴물들이 사방을 조여오자 사파의 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다, 다가오지 마…….”

『……안 예뻐요?』

뭐라고 답하든 결론은 하나뿐이지 않나.

무인 하나가 악을 쓰며 핏대를 세웠다.

“그래, 이 괴물아! 징그럽다! 끔찍해!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십 년 전에 먹은 고기가 올라올 것 같아! 당장 저리 꺼져어어어!”

사내는 공포에 질려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정적이 찾아온 건 그 뒤였다.

『…….』

휑한 동공과 살점뿐인 얼굴.

지옥도에나 나올 법한 면상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건 징그럽다는 소릴 들은 개체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괴물들 모두가 같은 표정,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왜 궁에 들인 거야? 예쁘다면서? 후궁이 될 수 있다고 했잖아.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그래 놓고… 평생 일만 시키다가 땅에 파묻어어어!!!』

무시무시한 사념이 휘몰아쳤다.

뒤이어 뇌리를 후벼 파는 듯한 괴성이 메아리쳤다.

『캬아아아아아!!!』

“크, 크아악…!”

“아아악! 골이 빠개질 것 같아…!”

무인들이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음파를 쏘아낸 괴물들은 빈틈이 보이자 곧장 달려들었다.

『카악! 죽어어어어!!』

변모한 백골들은 전보다 빠르고 강했다.

피와 살을 충분히 흡수한 녀석들은 오직 인간을 죽이는 데만 집중했다.

사파 진형의 전열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태극진 안에 들어가 있는 정파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쩡! 쩌정―! 쩌저정!

괴물들은 우리에 든 먹이를 노리듯이 집요하게 태극진을 두드렸다.

계속 되는 충격에 방어용 결계가 출렁이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라! 결계의 경계선까지 가서 놈들을 요격해!”

강유는 매화검수들을 이끌고 몸소 달려 나갔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흐드러지는 꽃봉오리를 피워 올렸다.

은은한 매화 향이 번지며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검격이 괴물들을 갈랐다.

『카악…!』

괴물들은 검을 피하기 위해 날뛰었지만, 화산의 검은 녹록지 않았다.

빠르며, 강하다.

그리고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변화를 담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검로는 적들의 이목을 속였고, 아차 하는 순간 급소를 가르고 지나갔다.

“대, 대단하군!”

“과연 화산파…!”

경지에 이른 화산의 검사는 검술로 매화를 꽃 피울지니.

강유는 일합에 일곱 송이의 매화를 개화시켰다.

변검(變劍)의 경지를 넘어선 환검(幻劍).

매화검 칠초식 매화빈분(梅花頻紛)이 펼쳐지자 괴물들의 피와 살이 솟구쳤다.

“이, 일곱 송이라니…!”

나이를 감안하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경지였다.

종남파 장로 오무양조차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화산이 키운 절세기재의 검술을 감상했다.

“음…! 매화 향…!”

매화 향은 검강에 다다랐다는 증거다.

다른 매화검수들이 검을 펼칠 때도 은은한 향이 났지만, 강유의 그것은 차원이 달랐다.

후각이 황홀해질 정도의 향기.

검강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후우욱, 훅…!”

전력을 쏟아낸 강유가 거친 숨을 토했다.

결계를 지키기 위해 무리를 한 그는 똑바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운지 다리를 후들댔다.

하지만 누구도 비웃지 못했으니, 그가 서 있는 일대엔 한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끼, 키익….』

목이 잘리고 얼굴의 절반이 날아간 백골이 꿈틀댔다.

그 지경이 되고도 여전히 살의를 불태우는 그것은 원한과 증오의 덩어리였다.

강유는 산산조각 난 괴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태가 되는 백골을 철저히 부숴라. 가루를 만들어 놓으면 재생하지 못하겠지.”

그나마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강유의 무위를 목격한 정파인들이 기세를 올릴 때, 초패는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나군. 전력을 다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어. 이십 대 후반에 불과한 놈이 저 정도라니……. 과연 구파라 이건가.’

수왕의 힘을 목격하진 못했으나 초패는 자신 있었다.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고, 제아무리 뛰어난 기재라 해도 이십 대 초반에 쌓을 수 있는 경험과 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허나 강유를 지켜본 그는 마른 비의 역량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본채의 인원을 끌고 올 것을. 예기치 못한 변수가 이토록 많을 줄이야.’

총채주의 명을 받은 데다 오랜만에 직접 나선 일인데 실패할 순 없다.

초패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할 때였다.

동쪽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며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는 자들이 다가왔다.

“우, 운가…!”

살막주를 잡으러 떠났던 사천 운가였다.

그들은 가주를 필두로 괴물들을 베어 넘기며 정파의 진형에 합류했다.

산발이 된 운종혁이 다짜고짜 외쳤다.

“이 잡것들은 뭐란 말이냐! 이것들 때문에 다 잡은 막주를 놓쳤다! 이령이의 한을 풀어줄 수 있었는데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어…!”

노가주는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산이 떠나가라 괴성을 질렀다.

누가 봐도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전쟁의 피로와 복수심에 잠식돼 버린 그는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치자 인내심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가, 가주님! 우선 결계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바깥은 위험합니다!”

오무양이 황급히 다가가서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결계 내부의 공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고, 뒤늦게 여산에 들었다가 괴물에게 쫓기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건 진형을 짠 사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코앞에서 놓쳤단 말이오! 찢어 죽여도 모자랄 원수를 겨우 만났는데, 놓쳐 버리고 말았어! 삼 년 만에 잡은 기회였거늘, 그 영악한 놈을 어디서 다시…!”

운종혁은 핏발 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뚝 멈췄다.

사파의 진영 최후미.

피폐한 몰골을 한 무인 하나가 슬그머니 합류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너, 너…! 네 이노오옴…! 괴물들 때문에 이리로 온 것이구나!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살막주를 확인한 가주가 노호를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 * *

“하아앗!”

수천 개의 야광주가 밝히는 어둠.

그 어슴푸레한 풍경 아래 강렬한 진각이 광장을 울렸다.

콰아아앙―!

힘껏 내리찍은 발끝에서 자연기가 타오르고, 전사의 맹격이 지저에 균열을 일으킨다.

유리에 금이 가듯 대지가 갈라지자 달려들던 병사들이 균형을 잃었다.

‘지금이야…!’

적들의 초격을 뭉개는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마른 비는 능숙하게 전선을 흔들었고, 틈을 만들자마자 돌진했다.

‘연, 천둥바위.’

힘으로 찍어 누르는 데는 이것만 한 게 없다.

기술의 창시자인 우둔한 땅조차 일격에 그치는 천둥바위를 마른 비는 연달아 펼쳤다.

푸캉―! 투콰카카캉!

좌, 그리고 우.

정면은 물론이거니와 삼방을 둘러싸고 달려들던 적들이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완파되어 나뒹굴었다.

“더럽게 강해졌군.”

이글거리는 잿빛 검강이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큰 기술을 쓴 직후의 틈을 보완하는 절묘한 합격.

회설강기를 뽑아든 설지굉이 마른 비의 우측을 막아섰다.

“카아압!”

역시 점창의 대장로를 노릴 만한 남자다.

삼 년 만에 검강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노인은 방패와 갑주로 무장한 보병대를 일검에 절단했다.

“좋아! 간만에 골통 좀 부숴볼까!”

설지굉이 검이라면, 왕문은 망치다.

창대만 한 길이의 자루에 인간 두개골의 두 배는 될 법한 머리.

그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초대형 망치를 붕붕 돌리더니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쿠아아앙―!

통짜 쇠로 된 기형 무기는 맞받을 수 없는 철퇴나 다름없었다.

무지막지한 강격에 병마용 보병대의 전열이 터져 나갔다.

“아, 이건 꺼내기 싫었는데.”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뒤에서 차유람이 훌쩍 튀어나오더니 마른 비의 앞을 막아섰다.

“수왕 님은 오늘 나랑 뜨거운 밤을 보내기로 했으니까 다치면 안 돼요.”

츠캉―!

차유람의 양손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그러자 왕문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아니?! 잠깐만…! 그게 왜 당신 손에?!”

“왜긴요. ‘양도’받았죠.”

천하팔대병기(天下八大兵器)의 하나.

오래 전 왕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절세의 무구가 아릿한 혈광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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