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양도받았다고? 혈랑조(血狼爪)를?!”
왕문이 웃기지 말라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고 침을 튀겨가며 삿대질을 했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그건 내가 만들어준 것이야! 그가 혈랑조를 얼마나 아끼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양도는 얼어 죽을! 솔직히 말하게! 그거 어디서 났어!”
차유람은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어물쩍대다가 도리어 화를 벌컥 냈다.
“아, 진짜 꼰대같이 굴기는! 뭘 자꾸 캐물어요, 캐묻길! 이래서 당신 앞에서는 안 꺼내려고 했는데! 뻔한 거 아냐? 도둑이 훔쳤지, 제 돈 주고 샀겠어? 억만금을 준다고 팔 리도 없고 말야! 아무튼 이건 이제 내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왕문은 이런 답변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중얼댔다.
“훔쳤다고? 혈랑조를? ……그에게서?”
“왜? 그것도 거짓말 같아요? 이거 훔치다가 죽는 줄 알았어!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니까 이젠 무조건 내 거야!”
차유람은 양손에 착용한 혈랑조를 꼭 끌어안았고, 왕문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그래도 곱게 미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렇게 맛이 간 여자였다니…! 세상에, 훔칠 게 없어서 그의 물건을 훔친단 말인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거요?”
차유람은 안 그래도 걱정이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도둑맞았으면 ‘아, 잃어버렸구나.’ 할 것이지, 그렇게 집요한 남자인 줄 몰랐지 뭐예요? 현상금까지 걸어가면서 날 찾겠다고 길길이 날뛰는데 아주 피곤해 죽겠어. 쪼잔해! 아~ 완전 쪼잔한 남자야!”
적반하장도 유분수란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일 거다.
설지굉도 흥미가 이는지 차유람을 흘깃거렸다.
“혈랑조라면…… 혈조(血爪) 군길산. 저 유명한 용병왕의 성명병기가 아닌가. 그걸 훔쳤다고?”
설지굉은 새삼스런 눈으로 차유람을 바라봤다.
정사지간의 인물이자 용병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절대강자.
군길산은 철저히 돈에 움직이는 무림의 이단아였다.
그는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피해를 끼치진 않는데, 오래 전 혈랑조를 탐낸 사파의 거대 문파 요화문(妖火門)이 그에게 시비를 건 일이 있었다.
자신의 힘을 믿은 건지, 사도련을 믿은 건지, 뒈지고 싶지 않으면 혈랑조를 내놓으라고 깝죽대던 요화문은 하룻밤 새 멸문 당했다.
“크크큭. 자살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야. 그치?”
군길산이 요화문주의 몸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내고서 남긴 말이었다.
고작 십여 명의 용병만을 데리고 사파에서 손꼽히는 문파 하나를 박살 낸 그는 그날로 십좌에 이름을 올렸다.
“패군이 복수에 나섰다면 죽었겠지만, 그가 시시비비에 밝은 인물이라 다행이었지. 요화문을 멸문시키고 더욱 유명해진 군길산은 용병계를 완전히 거머쥐었어. 지금에 와서는 정도맹이나 사도련도 웬만하면 기피하는 존재가 되었지.”
한데 그런 자의 애병을 훔치다니?
중원 제일의 대도라더니 차유람의 도둑으로서의 능력은 굉장한 모양이었다.
간도 크고, 뻔뻔하며, 내일을 생각지 않는다.
왕문의 말처럼 미쳤다는 표현을 들을 만한 여걸이었다.
“아주 제법이야. 마음에 드는군.”
설지굉은 차유람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고, 설지굉 식의 칭찬을 날렸다.
하지만 차유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전 선배님 별로예요. 쌀쌀맞고 무표정한 데다가 말투는 진짜 최악. 혹시나 절 넘보는 거라면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뭐 이런 미친….”
끝까지 욕을 버는 차유람이었다.
그들이 짤막한 담소를 나누는 동안 병마용의 군사들은 뭉개졌던 군진을 복구한 뒤였다.
“위험해. 뒤로 가 있어, 누나.”
마른 비가 다시 전면으로 나섰을 때였다.
차유람이 발개진 얼굴로 꺅꺅거렸다.
“어머나! 수왕 님! 지금 나한테 누나라고 한 거예요? 세상에나! 하아… 몸이 달아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 여긴 이 사람들한테 맡기고 우리 어디 으슥한 데 갈래요? 조명도 적당한데 쌈 구경이나 하면서 이 누님이 어른의 놀이를….”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였다.
왕문은 단언컨대 칠대 기인 중에서도 차유람보다 미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설지굉이 쌍욕을 토해 내려 할 때, 차유람이 헤살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달아올라도 동료를 버리고 갈 순 없겠죠? 수왕 님은 힘을 아껴요. 저놈한테 가려면 수왕 님의 힘이 필요하니까.”
차유람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이 됐다.
무덤의 기관 장치를 뚫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혈랑조를 고쳐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긴 저희가 뚫죠.”
스파앗―!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기동.
중원 최고를 논하는 경공 대가의 몸놀림은 가공했다.
순식간에 적진을 파고든 차유람이 양팔을 휘둘렀다.
“마침 이런 것들을 박살 내는 데는 혈랑조만 한 게 없죠.”
추아아아악―!
핏빛 늑대의 발톱.
혈랑조가 붉은 섬광을 토하자 병마용 기마대의 전열이 찢겼다.
술법으로 강화된 육체가 물 먹은 종이처럼 갈가리 해체되는 건 놀라운 광경이었다.
“얘들아. 받아보려무나. 혈조난풍(血爪亂風)이라고 해.”
휘아아아악―!
시뻘건 섬광이 돌풍처럼 일어났다.
사방팔방을 휘갈기는 무시무시한 광격에 진시황의 병사들이 찰흙처럼 부서져 내렸다.
마른 비는 예상외로 강한 차유람의 무공에 탄성을 흘렸다.
“누나가 저 정도였어? 저건 내 돌개바람에 맞먹겠는데?”
망치를 휘둘러 보병대 여섯을 으깨 버린 왕문이 말했다.
“혈랑조의 공능이다. 저건 북방 초원에서 유명했던 악수의 힘이 깃든 신병이야. 내가 만들고, 뛰어난 술사가 늑대의 힘을 깃들였지. 내공의 증폭은 물론이고, 혈랑조로만 쓸 수 있는 무공들이 존재한다. 직접 써보진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설지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댔다.
“무기를 지닌 것만으로 강해진다고? 웃기는 소리! 그게 사실이면 신병의 주인들이 천하를 제패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려면…!”
왕문은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며 대꾸했다.
“쓰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로 천하팔병의 주인들은 예외 없이 이름을 날리고 있잖소. 그리고 모든 신병이 저런 공능을 지닌 건 아니오. 혈랑조는 아주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덧붙이듯 말했다.
“본인의 경험이 전부가 아니란 걸 잊지 마시오. 세상엔 믿지 못할 일이 비일비재하지. 이 무덤만 해도 그렇소. 여기 오기 전에 이런 걸 상상이나 했겠소이까?”
고대의 술법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들.
믿지 못할 일은 눈앞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설지굉은 입을 꾹 다물고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힘을 아끼며 기회를 보던 마른 비는 차유람과 그녀가 휘두르는 혈랑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기…!’
대충 급조한 권갑도 이토록 쓸 만한 데 자신에게 꼭 맞는, 제대로 된 무기가 있다면 얼마나 강해질까.
마른 비는 처음으로 무기에 대한 욕심이 이는 걸 느꼈다.
“아악…!”
상황이 급변한 건 그때였다.
중원 어디에 내놔도 고수 소리를 들을 인원 구성과 희대의 신병으로 초전의 우위를 점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적들은 강했고, 또한 너무나 많았다.
혈랑조에 기대어 적들을 휩쓸던 차유람이 빈틈을 드러내자, 날카로운 창검이 그녀의 몸뚱이를 할퀴었다.
그녀가 위험해진 순간, 마른 비가 튀어 나갔다.
“누나! 뒤로 빠져!”
와족의 체술이 빛을 토하자 적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른 비는 늦지 않게 그녀를 구할 수 있었지만, 위태로워진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꽈아아앙!
“이, 이것들이…!”
중장갑 방패병.
왕문의 망치가 적을 부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
차키잉―!
“이럴 수가…!”
설지굉에게는 장군급의 무장들이 달라붙었다.
인형들의 검에 맺힌 유형화된 기운.
초입의 경지지만, 그건 검강이 분명했다.
“인형 따위가 검강을 구사하다니…!”
생전에 이름을 휘날렸을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결코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금 할아버지 쪽은…?!’
마른 비가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건 미카엘 덕분이었다.
출구를 등지고 선 금복인과 그 앞을 가로막은 미카엘.
제아무리 강한 병사들이라도 그를 뚫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마른 비의 이목을 끄는 광경이 있었다.
“핫!”
손가락을 쭉 펴서 일점에 모은 형태.
새의 부리를 닮은 수격이 적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너무나 반가운 그것은 그믐의 기예, 올빼미 사냥이었다.
‘제대로 익혔구나!’
금벽파라는 그믐에게 전수받은 와족의 기예를 구사하며 금복인의 우측을 지켰다.
좌측에선 일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암격이 번뜩이니, 전흠만으로도 어지간한 공세는 차단하는 게 가능했다.
‘좋아. 믿고 가도 돼!’
그렇다면 승부를 건다.
차유람은 장기전을 염두에 둔 모양이지만, 마른 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지상의 인부들도 걱정이 되지만, 시간을 끌면 결국 무너지는 건 이쪽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할아버지! 나한테 붙어!”
왕문과 설지굉은 마른 비가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힘을 끌어올려 적들을 물러서게 한 후 방향을 틀어 마른 비에게 합류했다.
“꽉 잡아!”
마른 비는 두 남자를 양손에 끼고, 차유람에게 자신을 안게 한 뒤에 다리를 굽혔다.
“아이참. 이 튼튼한 가슴팍 좀 봐. 수왕 님… 나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방금 전에 죽을 뻔했으면서도 차유람은 기죽지 않고 헛소리를 늘어놨다.
마른 비는 그녀를 힐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꽉 잡아. 말 그만하고. 까딱하면 혀 깨물어.”
꽈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발바닥으로 밀어낸 자연기를 대지에 충돌시키는 기예.
마른 비는 전력으로 번갯불을 터뜨렸고, 그의 눈은 적 술사의 머리 위를 향해 있었다.
“꺄아아악―!”
사선으로 솟구친 일행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수천의 병사를 무시하고 허공을 가로지른 그들이 정점에 달했을 때, 목소리가 터졌다.
『힘으로 안 되니 얕은수를…! 궁노대, 요격하라!』
쾌애애애액―!
허공에 떠서 날아오는 표적.
후방에 있던 진시황의 궁노대가 이천 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한곳을 노리는 일점 집중사는 식은땀이 흐를 만큼 위협적이었다.
“할아버지!”
자신은 손이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른 비는 외쳤고, 설지굉은 알아챘다.
“이런 일을 벌이려면 미리 좀 말해라! 빌어먹을 꼬맹아!”
마른 비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던 설지굉이 검을 휘둘렀다.
소싯적 사천과 귀주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쾌검.
잿빛 강기를 담은 검막이 날아드는 화살을 분질렀다.
“젠장! 자세가 불안정해! 전부 막진 못한다!”
이 상황에서 검을 휘두를 만한 고수는 설지굉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완전한 방어를 펼치진 못했고, 일점에 집중된 이천 개의 철시는 굉장한 힘을 담고 있었다.
“빌어먹을…! 밀린다…!”
설지굉이 힘겨워하자 마른 비는 계획을 변경했다.
술사에게 최대한 가까이 가려 했지만, 적의 대응이 너무 적절했다.
이러다간 공중에 뜬 채로 죽을 수도 있었다.
자연기를 발바닥에 응집하자 몸이 뚝 떨어져 내렸고, 마른 비는 거대한 질량을 지닌 바위가 되어 지면을 향해 돌진했다.
쿠콰아아앙―!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인 대지.
사방 오 장의 적들이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일행을 내려놓으며, 마른 비가 말했다.
“일격에 승부를 낼 거야. 날 지켜줘.”
우우우웅―
그의 양손에서 대자연의 속성을 담은 붉은빛과 푸른빛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