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27화 (327/463)

327화

『폐하의… 적들을… 참하라!』

술력에 잠식된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허공을 가로지른 마른 비 일행은 수천 구의 병마용을 뛰어넘어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술사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범의 아가리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술사에게 가는 길은 여전히 꽉 막혀 있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마른 비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았다.

“야, 야 인마! 무턱대고 지키라고만 하고 자버리면 어떡해?! 우릴 다 죽일 셈이냐!”

왕문이 망치를 휘두르며 외쳤다.

그는 마른 비의 좌측에서 적들을 막으며 연신 뒤를 힐끗거렸다.

정면을 맡은 차유람이 혈랑조를 긁으며 타박했다.

“아, 꼰대 진짜…! 이 아저씨 처음엔 멋지더니 갈수록 별로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냥 입 닫고 싸우면 안 돼요?!”

설지굉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 기운…! 뭘 시도하는지 알겠군. 내 예상이 맞다면 믿어도 된다. 한데 이 꼬마, 정말 그걸 쓸 수 있는 건가?”

설지굉은 반신반의한 기색이었다.

마른 비의 힘과 잠재력을 알지만, 지금 그가 시도하려는 건 너무나 위험한 기술이었다.

허나 성공하기만 한다면 전세가 뒤바뀌리라.

핀잔을 들은 왕문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

“젠장, 내 편은 하나도 없구만! 알았소! 이 악물고 버티리다!”

세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싸울 때, 마른 비가 눈을 떴다.

그는 점창과의 전쟁 이후, 너른 하늘과 대련을 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연기란 결국 대자연의 기운을 빌려 쓰는 것이다. 육신을 매개로 자연기를 가다듬어 목적에 맞는 힘을 뿜어내는 것이지. 그리고 자연에는 다양한 속성이 존재한다.”

너른 하늘은 마른 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왼손과 오른손에 상반된 속성의 기운을 일으켰다.

불과 얼음.

붉은빛과 푸른빛을 띠는 그것들은 속성을 불어넣지 않은 자연기와 달리 난폭한 기운을 뿜어냈다.

“속성을 가진 자연기를 다루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다루는 건 둘째치고 끌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아. 할아범처럼 노련한 전사도 여기까진 이르지 못했다. 아마 내가 최초겠지.”

너른 하늘의 얼굴에선 자부심이 묻어났다.

중원과 북방 초원을 넘나들며 무수한 영웅들을 목격한 여휘가 천하제일일 거라고 확신한 남자가 너른 하늘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뽐내거나 내세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묻어났다.

“이 자체로도 강한 힘이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큰 의미가 없다. 세상에는 아마 처음부터 속성 하나만을 파고든 자들도 존재하겠지. 이것만으로는 그런 자들을 능가할 수 없어.”

너른 하늘은 거기까지 말하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극상성의 기운이 만나자 엄청난 반발력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한번 성공한 그는 어렵지 않게 둘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전쟁 중에는 유립이란 청년과 싸우느라 제대로 못 봤지? 잘 봐라, 비아야. 이것이 애비가 일생에 걸쳐 완성시킨 비기다.”

콰우우웅―!

어둠이 내린 청죽림.

별들이 보석처럼 박힌 밤하늘로 새하얀 섬광이 솟았다.

‘속성을 다루는 건 이제 익숙해.’

대지에 내리꽂히는 뇌전의 기운.

검치호를 쓰러뜨리기 위해 스스로 창안한 뢰창은 한 가지 속성에 집중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건 속성을 띤 자연기에 익숙해지기 위한 수련이자 최종적으로는 이 기술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었다.

‘떠올려! 화산열해의 화기와 설산의 냉기를…!’

중원으로 나오기 전, 두 곳을 방문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마른 비는 온몸으로 그때의 느낌을 되살렸고, 불과 얼음의 기운을 양손에 응집할 수 있었다.

‘융합…!’

아버지조차 무수히 실패만 하다가 할멈의 주술을 받은 상태에서 처음 성공한 기술이다.

마른 비는 제어가 쉽도록 힘의 크기를 낮췄고, 화기와 냉기의 균형을 조절했다.

그리고 하나로 합쳤다.

그그그긍―!

“으윽…!”

절로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의 반발력.

포갠 주먹이 당장이라도 튕겨 나갈 것 같다.

아니, 이대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범의 앙심! 교룡갑…!’

육체의 힘과 강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모든 신경을 가슴 앞에 맞댄 주먹에 집중했다.

『이 불길한 힘…! 혼이 일그러질 것만 같구나! 무얼 준비하는 것이냐! 막아라! 저 녀석을 저지해!』

기운에 민감한 술사는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육신을 녹여버릴 것 같은 화기와 혼을 얼릴 듯한 냉기.

뭘 준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막아야 했다.

『장군용(將軍俑)들이여! 당장 달려 나가서 녀석을 죽여라!』

술사가 끝까지 아껴놓은 패였다.

전국시대를 호령하던 진의 장군들.

병마용보다 배는 커다란 무장들이 진영을 헤치고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중 맨 앞에 선 자의 검에서 찬란한 광채가 솟았다.

“검강?! 저토록 선명하고 강렬한 기운을…!”

저 정도라면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설지굉이 그자의 무위에 놀랐다면, 왕문은 다른 것 때문에 기절초풍했다.

“저, 저 형태는 간장검(干將劍)?!”

왕문의 예상이 맞았다.

시공을 넘어 회자되는 전국시대 최강의 명검.

갑자기 역사에서 종적을 감춘 희대의 무구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빌어먹을 꼬맹이! 멀었느냐! 저건 못 막는다!”

설지굉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마른 비는 땀만 뻘뻘 흘리며 대꾸하지 못했다.

“으으윽…!”

예전에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지만, 항상 실패였다.

월등히 강해진 지금은 가능할 거라고 여겼는데, 오산이었다.

와족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리는 아버지가 사십이 넘어서야 완성한 기예.

기운의 반발력에 밀린 주먹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안… 돼…! 내가 실패하면 모두가…!”

성공시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모두를 죽게 할 거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언령을 발했다.

『제발……. 실패하면 끝장이야. 그만 뻗대고 말 좀 들어!』

휘아아악―!

그건 마른 비조차 염두에 두지 못한 힘이었다.

애뢰산에서 얻은 자연기의 정수.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와 백원 의원에서의 시술, 부단한 노력과 참오 끝에 녹여낸 기운이 마른 비의 언령에 응답했다.

주먹으로 치달은 기운은 마른 비의 힘을 감싸 안았고, 화기와 냉기 사이의 균형을 조율했다.

그그그긍―

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 끝에 떨림이 잦아들었다.

미쳐 날뛰던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안정된 기운.

하지만 마른 비는 그 안에 깃든 파멸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됐어. 다들 앞에서 물러나.”

주먹의 틈새로 새어 나오는 백색의 광휘.

와족 무(武)의 역사를 새로 쓴 필멸의 기예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서리불꽃.”

콰우우우웅―!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섬광이 적진을 관통했다.

빛의 기둥이 지나간 자리엔 완전한 소멸만이 남았고, 진공 상태가 됐던 그곳에 뒤늦게 공기가 들어찼다.

광장의 끝까지 다다른 섬광은 적을 낱낱이 분해하는 걸로도 모자라 결계까지 찢어발겼고, 진시황에게로 향하는 출구를 박살 냈다.

쿠아아앙―!

모든 게 소멸한 뒤에야 터져 나온 굉음.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뻥 뚫린 통로가 보였다.

“후욱, 훅….”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힘을 극도로 낮췄는데도 이 정도다.

서리불꽃은 지금의 경지에서도 두 번 시전하는 게 불가능한 기예였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왕문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름이 돋았는지 팔뚝을 쓸어내리던 그는 무언가를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마, 막야… 막야검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도 소멸해 버렸다.

마른 비는 서리불꽃을 술사에게 조준했고, 정면엔 장군급 정예들이 몰려 있었다.

막야검을 든 장수도 궤적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으니, 그가 들고 있던 검도 먼지가 됐을 게 분명했다.

『커, 커걱… 컥…!』

고통에 찬 신음이 일행의 주의를 끌었다.

눈길이 향한 곳엔 머리의 절반만 남은 기병대장의 인형이 나뒹굴고 있었다.

“빗나갔나?”

마른 비가 씁쓸하게 중얼댔다.

하지만 그건 마른 비의 실수가 아니었다.

서리불꽃의 제어가 미숙한 탓도 있지만, 기병대장은 진시황의 친위대를 지휘하는 전국시대 최강의 무장이었다.

그걸 일격에 날려 버렸으니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했다.

“저놈도 실체가 없는 혼 아니에요? 인형의 몸이 부서진 것뿐인데, 왜 고통스러워하죠?”

차유람의 의문을 풀어준 건 미카엘이었다.

「방금 그 기술에 영혼의 대부분이 소멸됐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몸통 전체가 날아가 버린 거죠. 저 인형과 같은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까마득한 뒤편에서 날아든 전음.

이 거리에서 차유람의 말을 듣고 대꾸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놀라움 섞인 전음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친구여. 방금 그건 무엇입니까? 소름이 끼칠 정도의 파괴력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순수한……. 저는 그런 걸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걸 물으려고 전음을 보낸 게 틀림없다.

마른 비는 고장 난 기계장치처럼 끼긱 대는 병마용 인형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냥. 우리 아버지가 만든 기술.”

왕문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 방금 그걸 개인이 만들었다고? 너희 아버지가 누군데?”

마른 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리운 얼굴로 답했다.

“저어기 남쪽 끝에서 빈둥대고 계실, 은퇴한 족장이야.”

* * *

‘괴물에 결계라니.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사파 진영에 섞여든 살막주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살기를 억누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삼 년 동안 기를 쓰며 살아남은 수하들이 몰살했기 때문이다.

‘산 채로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들!’

운가는 치가 떨릴 정도로 집요했다.

적손이 죽었다지만, 가문의 일을 삼 년이나 내팽개친 채 쫓아다닐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바람에 평생을 공들여 키운 조직이 와해되고, 제자나 다름없는 수하들이 전멸해 버렸다.

막주는 치솟는 살심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완전히 따돌릴 기회였거늘.’

운가는 금력과 무력, 인맥을 총동원해 살막을 섬서에 붙들어 놓았다.

하지만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포위망에도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시황의 무덤에 홀린 무림인들이 모이면, 혼란을 틈타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운가주를 이리로 끌어들인 후에 여산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허나 투명한 막이 모든 계획을 허물어뜨렸다.

심지어 인간을 기막히게 찾아내는 괴물들 때문에 은신이 풀렸고, 갑자기 들이닥친 운가에게 수하들이 전멸했다.

막주는 지금 미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의 이성을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노옴…!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운가주 운종혁.

정파의 진영에 합류한 그가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모든 걸 잃고 탈출할 수도 없게 된 막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이리된 거 늙은이의 모가지라도…!’

막주가 검 손잡이를 움켜쥘 때였다.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채주. 저 늙은이, 살수 놈을 놓쳤나 봅니다. 심지어 우리 진영에 들어와 있는 모양인데요?”

쌍부를 든 거한이 고개를 꺾으며 대꾸했다.

“뭐여? 진짜 동쪽에 있었나? 역시 이 몸의 육감이란…! 방향까지 알려줬는데 놓쳤단 말이지? 운가도 별거 아니구만? 고작 살수 따위를 못 잡아서, 쯧쯧.”

새카만 살기가 일었다.

“우리 위치를 알려준 게 네놈이란 말이지?”

푸우욱―!

막주의 검이 장삼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그건 누구도 손쓸 틈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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