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어, 어억?”
장삼은 배를 뚫고 튀어나온 검을 내려다봤다.
반사광을 막기 위해 숯을 문지른 칼날.
섬뜩하리만치 예리한 날을 타고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끔찍한 통증이 뒤따른 건 직후였다.
장삼은 떨리는 손으로 날을 붙잡았지만, 검은 곧바로 빠져나갔다.
스가각―
손가락이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갑작스런 통증만큼이나 그건 바로 와 닿지 않는 광경이었다.
장삼은 멍한 눈으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신체 일부였던 그것들을 바라봤다.
“세치 혀를 놀린 대가라고 생각해라. 네놈 때문에 내 수하들이 다 죽었거든.”
“사, 살막주…?!”
유림채의 산적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채주가 당했는데도 복수에 나서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모습에서 명문대파와의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채, 채주! 괜찮소?! 뭣들 하냐! 저 새끼, 죽여!”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산적들이 움직였지만, 막주는 한 박자 빨랐다.
그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장삼이 따라붙었다.
“너… 이 살수 새끼…! 칼을 꽂아놓고 어딜 가나!”
부아아앙!
덩치에 걸맞은 맷집이었다.
장삼은 복부가 뚫리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반격에 나섰다.
멀쩡한 손으로 휘두른 도끼는 거력을 담고 있었으나, 막주는 침착했다.
퍼어억!
그는 허리를 숙여서 도끼를 흘린 후에 또 한번 검을 꽂아 넣었다.
턱 아래에서 두개골을 관통한 검격.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쿠우웅―!
처음에 한마디를 뱉은 후, 막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죽어 나자빠진 장삼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
산적들이 기세에 눌려서 움찔대고, 막주가 장삼의 머리에 꽂힌 검을 뽑을 때였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막주를 긴장시켰다.
“살막…….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허나 이건 소문 이상이군.”
초패였다.
그는 장삼을 죽인 막주를 놔줄 생각이 없었고, 매섭게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막주는 검을 회수하는 걸 포기한 채 황급히 장삼의 도끼를 집어 들었다.
콰아아앙!
통짜 쇠로 된 철부가 산산조각 났다.
초패의 권격은 그에 그치지 않고 막주를 하늘로 날려버렸다.
막주는 입에서 피를 뿜어냈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이노오오옴! 죽어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노인.
운가주는 이쪽이 사파의 진영이라는 것도 잊은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왔다.
정파와 사파 진영 양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가, 가주님! 위험합니다!”
“뭐야?! 오, 오지 마! 이 노인네가 미쳤나!”
침착한 건 막주뿐이었다.
그는 아래를 힐끗 보더니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착지점을 바꿔서 괴물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캬아악?!』
“쥐새끼 같은 놈이! 또 놓칠 것 같은가!”
운가주의 검에서 백색 검강이 솟아올랐다.
백호참마검(白虎斬魔劍).
오래 전, 운이령이 시전하려다 마른 비에게 얻어맞고 펼치지 못한 운가 고유의 검식이었다.
스가가각!
노가주는 일검에 괴물들을 수평으로 절단했다.
후드득 날리는 피와 살점.
허나 막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이 도망치는 것 하나는 일품이구나!”
운종혁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노가주는 사파 무인들의 틈새로 은신하는 막주를 따라붙었고, 가차없이 검을 휘둘렀다.
“크악!”
“카아악…!”
검강에 적중된 사파 무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복수에 눈이 뒤집힌 운종혁은 주변 상황을 무시한 채 오로지 막주만을 쫓았다.
반격이 가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친 늙은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서 밀고 들어오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마침 그곳은 흉사방이 있는 곳이었다.
방도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검을 휘둘렀지만, 운가주는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날파리 같은 것들이! 비켜라!”
부아아악!
지금 여산에서 천북제일무가의 가주를 감당할 수 있는 무인은 극히 드물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휘두른 칼날에 흉사방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늙은이가 완전히 미쳤군.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채이잉―!
흉사방주 독문철이 운가주와 검을 맞댔다.
과연 섬서성에 위치한 사파의 방파 중 가장 큰 집단의 수장답게 그는 운종혁의 전진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허나 노가주의 분노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독문철.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내 눈도 못 쳐다봤을 애송이가…!”
운가주는 내공을 끌어올렸고, 흉사방주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
그러자 독문철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늙어빠진 노인네가 힘도 좋구나!”
독문철이 안간힘을 쓰며 버틸 때였다.
또 다른 검격이 날아들었다.
콰차차창!
대혈문주 서구식이었다.
그는 재빨리 가담하여 독문철을 도왔고, 운종혁도 섬서성에서 손꼽히는 사파 집단의 수장 둘을 홀로 밀어낼 순 없었다.
셋이 치열하게 대치할 때, 운가 무인들이 달려왔다.
“가주님…!”
“이것들이 누구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이냐!”
“전부 쓸어버려!”
가주가 위험하다고 여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운가의 무인들은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사파 진영에 난입하여 검을 휘둘렀다.
“운가 놈들이 복수에 눈이 멀더니 죄다 미쳤구나!”
“좌우로 협공해서 죽여 버려!”
흉사방과 대혈문의 무인들이 좌충우돌 날뛰는 운가를 좌우에서 찍어 눌렀다.
그들은 수장들처럼 이 대 일로 힘을 합쳐서 운가를 서서히 밀어붙였다.
운가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정파의 무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운가가 위험해! 사파 놈들을 저지하라!”
“말려야 한다! 지금 싸우면 공멸이야!”
화산과 종남이 나섰다.
그들은 태극진 안에서 뛰쳐나와 운가를 돕기 위해 달려갔다.
이성이 마비되지 않은 그들은 양측을 뜯어말릴 생각이었으나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구파를 두려워하는 사파의 입장에서 검을 뽑고 달려오는 화산과 종남은 공포 그 자체였다.
“화산과 종남이 온다!”
“빌어먹을! 다 죽자는 건가?!”
“더러운 놈들! 우리가 괴물들에게 습격당하는 틈을 노린 거야!”
결계가 없는 사파의 무인들은 직접 괴물을 베어 넘기고 있었는데, 화산과 종남이 달려오자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날뛰는 괴물들에, 인간끼리의 싸움까지 임박했다.
여산의 상황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정신 차려라! 진형을 수습해! 녹림의 형제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초패 정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화산과 종남이 싸우기 위해 다가온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상황이 변한 건 그때였다.
『캬아아아악!』
미쳐 날뛰던 괴물들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끔찍한 울음을 토했다.
영혼이 부서질 것처럼 포효하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덜컥 멈추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데다 끝없이 재생하던 괴물들이 쓰러지자 여산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뭐, 뭐냐? 갑자기 왜?”
엎어진 괴물들은 재가 흩날리듯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피와 살을 흡수하여 자신의 몸을 구성했던 것들이 죽어 나자빠진 것이다.
악몽의 한복판에서 헤매던 무림인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뭐야? 죽은 거야? 아무리 베어도 살아나던 괴물들이?”
“사, 살았어! 우린 살았다…!”
“진시황의 무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눈치 빠른 자들은 금복인과 마른 비 일행이 뭔가를 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충돌 직전까지 갔던 정파와 사파는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만하시오! 운가주!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수백 명을 죽일 셈인가!”
초패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운종혁에게 외쳤다.
그리고 직접 움직여서 뒤엉켜 있는 셋을 떼어놨다.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운종혁에게, 초패가 말했다.
“살수가 유림채의 채주를 죽였소. 내게도 놈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이오. 우리 진영에 숨어들었으니 내가 찾아주겠소이다. 당신이 이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게 놈이 바라는 것이오.”
괴물들이 쓰러졌고, 충돌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최악의 고비를 넘기자 양측은 겨우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건 운종혁 또한 마찬가지여서 여기서 자신이 난장을 부리면 막주를 놓칠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녹림의 초 호법인가……. 당신도 이곳에 와 있었군. 좋소.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놈을 넘겨주기만 한다면 유혈 사태는 없을 것이오. 그놈의 신병을 확보하는 대로 운가는 철수하겠소이다.”
운종혁은 이제야 초패를 알아봤고, 그에게 막주를 잡는 일을 맡겼다.
상황을 가늠한 결과 괴물들은 사라졌지만, 여산을 둘러친 결계는 그대로인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문제일 뿐 절대 놓칠 리 없었다.
삼 년에 걸친 추격 끝에 운이령의 복수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때, 사파 진영 끄트머리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동쪽으로 내달렸다.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잡힐 거라는 걸 깨달은 막주가 몸을 빼낸 것이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저놈이…!”
가장 먼저 운종혁이 몸을 날렸고,
“운가주…! 이런 빌어먹을!”
초패가 그 뒤를 따랐다.
녹림십팔채의 채주를 잃은 이상 그도 막주를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초패가 운종혁을 뒤따르자 녹림도가 우르르 움직였다.
장삼이 죽고 구심점이 없는 그들에게 믿을 건 초패뿐이었다.
그러자 사파 진영 전체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초패와 녹림 없이 정파를 상대할 수 없는 그들에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것들이 전부 다…! 안 돼! 가주님을 쫓아라!”
운가도 가만있을 리 없었다.
가주가 염려된 그들은 곧바로 몸을 날렸고,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는 화산과 종남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종국에는 정파 진영 전체가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살수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이냐!”
상황을 되새긴 자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발을 멈출 순 없었다.
괴물들이 사라지자 여산에 든 본래의 목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따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뒤를 쫓으며 황릉의 입구를 찾는다!’
수백 명의 무인이 둘로 나누어져 달리며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황릉의 입구를 발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으니, 그들이 향하는 곳에 바로 황릉의 입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계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정파와 사파 놈들이 전부 나를 잡으려 하고 있어!’
오고 갈 데가 없어진 막주가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그는 미리 봐두었던 황릉의 입구를 향해 달렸고,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안으로 진입했다.
“쥐새끼가 어딜 기어 들어가는 거냐!”
운종혁은 그게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 막주의 뒤를 쫓았다.
“이것…! 설마 황릉의 입구인가!”
지하에 조성된 돌기둥과 석조 구조물을 목격한 초패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최종 목적은 진시황릉이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초패는 씨익 웃으며 몸을 날렸고, 뒤이어 각파의 수장들이 도착했다.
“황릉…!”
무덤으로 진입하는 운가주와 초패를 본 강유가 오무양과 함께 뛰어내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도착한 독문철과 서구식도 질세라 뒤를 따랐다.
정파와 사파의 연합군이 서로를 견제하며 도착한 건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무덤이다! 이리로 내려간 게 분명해!”
“강 사형을 쫓아라!”
“장로님의 뒤를 따라라!”
화산파 매화검수와 종남의 제자들이 몸을 날리고,
“정파 놈들이 뛰어든다!”
“초 호법님도 들어가신 게 분명해! 녹림의 형제들은 무덤으로 진입하라!”
“대혈문은 흉사방과 함께 움직인다! 문주님과 흉사방주님을 지켜라!”
사파 연합군도 황릉으로 진입하려 했다.
수백에 이르는 인원이 서로를 견제하며 북적일 때였다.
휘아아악―! 쿠웅!
백색의 거체가 그들을 앞질러서 떨어져 내렸다.
입구를 막아선 별비는 허리를 세우고 황릉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을 노려봤다.
“크르르.”
‘못 들어간다.’
별비는 수백의 인간들을 가로막은 채 사납게 눈을 치떴다.
지상이 혼돈 그 자체일 때, 마른 비 일행은 시공을 초월한 경이를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