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 * *
“비, 비켜라! 우린 여길 들어가야 한단 말이다!”
운가의 무인들이 절규하듯 외쳤다.
가주의 안위가 걱정된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무덤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집채만 한 백호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별비가 이빨을 드러내자 그들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고작 짐승 따위에게…!’
평범한 범이라면 일검에 두 쪽을 냈겠지만,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무인의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했기 때문이다.덤볐다간 뼈도 못 추릴 거라고.
“음……. 대사형을 놓쳤다.”
강유와 떨어진 매화검수들도 침음을 흘렸고,
“장로님께서 진입하셨다. 사파의 수장들은 둘째치고 초패가 안으로 들어갔어. 무조건 뒤를 쫓아야 한다.”
종남의 제자들도 다급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쥐었다.
그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강행 돌파를 떠올릴 때였다.
참을성이 없는 데다 별비의 힘을 가늠할 능력이 안 되는 사파의 무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늦으면 몽땅 빼앗길 거다! 바로 들어가야 해!”
“보물, 비급, 신병이기…! 뭐가 있을지 몰라! 난 간다!”
“그래! 제까짓 게 으르렁대봤자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니냐!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려!”
추아아아악―!
날아올랐던 무인들이 여섯 조각으로 나뉘며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별비는 가볍게 휘두른 앞발로 열세 명의 인간을 토막 쳐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발끝에 힘을 주던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삐걱대며 멈췄다.
경공을 펼치려다 기겁하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엎어지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경악 어린 눈으로 별비를 바라봤다.
‘말도 안 돼! 짐승이 강기를…!’
찰나에 번뜩인 새하얀 기운.
그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한 강기 덩어리였다.
바깥에 남은 정파의 무인들 중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매화검수들도 침만 꿀꺽 삼키며 움직이지 못했다.
“크르르르…….”
별비는 죽어 나자빠진 사파의 무인들을 흘깃 본 뒤에 온몸으로 경고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놈은 이렇게 될 거라고.
인간들이 갑자기 내달리는 바람에 몇 놈은 놓쳤지만, 별비는 마른 비가 있는 곳으로 정체 모를 자들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었다.
“커허허헝!”
“히, 히이익…!”
자연기를 실은 포효가 꿈틀대는 욕망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대자연이 낳은 하얀 포식자는 수백 명의 전의를 일거에 꺾으며 황릉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마른 비 일행이 지나간 통로.
황릉의 내부로 들어선 운종혁이 눈썹을 꿈틀댔다.
“지하에 이런 환경을 조성해 놓다니?”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새겨진 벽면과 좌우로 흐르는 은빛 수로.
그건 복수에 눈이 먼 노인조차 멈춰 세우게 할 만큼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벌써 지나간 것인가!”
어둠을 비추는 야광주들.
통로의 끝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잠시 멈칫했던 노인은 다시 경공을 끌어올렸다.
“구조로 볼 때 여긴 외길이다! 네놈은 독안에 든 생쥐나 마찬가지야!”
운종혁이 앞서 나갔을 막주를 압박하기 위해 노호를 터뜨릴 때였다.
우측 발아래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촤아아악―!
“아니?!”
수로에 은신하고 있던 막주였다.
설마 수은에 몸을 파묻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터라 그 암습은 치명적이었다.
군중 속에 숨었을 때 챙겼는지 그의 손엔 검이 들려 있었고, 최단거리를 치고 들어온 검은 심장을 노렸다.
허를 찌른 한 수.
이건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이노오오옴!”
운종혁은 회피를 포기했다.
살수와 같이 죽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손자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그는 가슴을 활짝 연 채 검을 휘둘렀다.
노가주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채 오직 막주를 죽이는 데만 집중했다.
“……?!”
노가주의 투지 앞에서 막주는 검의 궤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청부였다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표적을 죽이겠지만, 이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늙어빠진 노인네와 동귀어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어깨를 틀어서 운종혁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옆구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치명타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운신이 힘들 정도의 중상이었다.
“크헉…!”
운종혁이 옆구리를 움켜쥐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으로 앞을 막은 채 막주와 눈을 맞췄다.
온몸이 수은으로 뒤덮인 사내가 날카로운 눈동자를 번뜩였다.
“징그럽게 쫓아오시는군. 덕분에 평생을 키운 조직이 괴멸했어. 이 빚은 당신의 목으로 대신하지.”
막주가 운종혁의 쩍 벌어진 옆구리를 보며 말했다.
중상을 입혀서인지 그는 정면으로도 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운종혁이 노기 어린 눈으로 외쳤다.
“누가 할 소리를! 네 놈의 목을 베어 이령이의 한을 달랠 것이다! 덤벼라! 이놈!”
노가주는 지혈도 하지 않았고, 뒤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하나뿐인 손주를 잃은 그는 오직 원수를 죽이는 데만 집중했다.
콰차창!
검이 부딪히는 순간, 막주가 튕겨 나갔다.
늙고 상처 입었지만, 천북제일무가의 가주는 살수 따위가 정면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여기서 끊으려 했거늘. 아직도 이런 힘이…!’
막주가 계획을 수정하려 할 때였다.
그를 잡아 죽이려는 자가 또 한 명 등장했다.
“거기 그대로 있어라! 장 채주를 죽인 것처럼 네놈의 턱에도 칼을 박아줄 테니!”
초패였다.
입구에 들어선 그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막주는 기겁하며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려고! ……응?”
막주를 뒤쫓던 초패가 우뚝 멈췄다.
파리한 안색으로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무릎 꿇은 운종혁을 봤기 때문이다.
망설이던 그는 한숨을 쉬더니 노가주에게 다가왔다.
“한 방 먹으셨군. 조심하시지 그랬소. 명색이 중원 삼 대 살수 집단의 수장이오. 방심하면 내 목도 딸 수 있는 놈이란 말이외다.”
초패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건넸지만, 운종혁은 바짝 긴장했다.
아무리 세간의 평이 좋다 해도 결국 그는 사파이자 도적 집단의 수뇌부가 아닌가.
몸이 정상이어도 힘든 상대인데 부상을 입은 지금은 초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초패는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경계할 필요 없소. 해를 가할 생각이면 주먹부터 날렸을 테니까. 상처 좀 봅시다.”
초패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운종혁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운종혁은 경계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날 도와주려는 거요? 무엇 때문에? 당신은 사파고 난 정파가 아닌가?”
초패는 품에서 금창산(金瘡散)을 꺼내더니 상처에 뿌렸다.
그리고 수은과 피, 약이 뒤엉킨 옆구리를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고 놔두면 죽을 것 같은 노인네를 놓고 가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 결국 다 같은 인간이 아니오. 도적으로 평생을 살아왔으나 인간의 도리 정도는 알고 있소이다. 싸우게 되면 얄짤없지만, 그전까지 할 도리는 하고 살자는 게 내 생각이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덧붙였다.
“아, 미리 말하건대 보물이 있다면 우리 거요. 총채주께서 무덤을 확인하고 번쩍이는 게 있으면 몽땅 가져오라고 했거든. 그것만 욕심내지 않으면 녹림과 운가가 부딪힐 일은 없을 거요.”
운종혁은 그런 거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시오. 난 막주만 잡으면 되니까.”
“어차피 살수 놈은 여기서 못 나가오. 이리 쭉 가도 결국 수왕 일행과 만날 테니까. 그보다 수은이 너무 많이 묻었군. 상처로 침투하기 전에 닦아냅시다. 아플 테니 이 꽉 깨무시오.”
초패는 옷을 북 찢더니 피와 뒤엉킨 수은을 닦아냈다.
상처를 후빌 때마다 운종혁이 신음을 흘렸다.
“크훅…!”
“이제 됐소. 지혈하고 갑시다. 나는 보물. 당신은 살수. 장 채주를 죽인 놈이니 잡는 걸 도와주겠소. 가급적 싸우지 말고 좋게 좋게 갑시다. 그게 서로에게….”
초패가 피와 수은으로 범벅이 된 천을 들어 올릴 때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호통이 날아들었다.
“네 이놈! 죽자고 따라붙을 때 이럴 줄 알았다! 기회를 잡자마자 가주님을…!”
이십사수매화검법.
퀴퀴한 동굴에 매화 향이 확 퍼지며 눈부신 환검이 펼쳐졌다.
“헛…!”
등을 돌린 초패가 황급히 주먹을 뻗었다.
투콰카캉―!
강유는 초패를 밀어내자마자 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일곱 송이의 매화가 허공에 피어나며 초패를 덮쳤다.
“근본 없는 도적놈이라 하는 짓이 저열하구나! 역시 사파 놈들은 태생부터 글러먹은 것들이야!”
“자, 잠깐! 강 소협! 지금 뭔가 오해가…!”
운종혁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외쳤지만, 강유는 듣지 않았다.
뇌리에 각인된 편견과 경험으로 쌓인 적개심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초패가 홀로 있는 지금이 그를 없앨 적기라고 여기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본? 저열? …글러먹어?”
초패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맹렬한 기운이 두 주먹에 응집됐다.
“어린놈의 새끼가 벌써부터 대가리가 굳었구나.”
할 도리는 했다.
그리고 가급적 피를 보는 걸 자제할 뿐 이런 말을 듣고도 물러선다면 호살권이 아니었다.
녹림 최강의 권사와 화산파 최고의 후기지수가 격렬하게 맞붙었다.
“강 소협!”
싸움이 시작되자 오무양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운가주의 반응으로 볼 때 뭔가가 있는 것 같지만, 강유가 밀리는 기색이 보이자 곧바로 달려들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사파의 떨거지들이 없는 지금이 초패라는 난적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것들이…!”
종남의 장로까지 가세하자 제아무리 초패라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가 통로 끝까지 쭉쭉 밀릴 때, 독문철과 서구식이 당도했다.
“초, 초 호법님!”
사파의 수장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를 쫓았다.
여기서 초패가 쓰러진다?
뒤는 볼 것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백아의 난입으로 외부 병력이 차단됐고, 둘만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강유와 오무양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운종혁도 내버려 둔 채 죽기 살기로 경공을 펼쳤고, 곧장 초패에게 가세했다.
“오오오오오!”
“죽어라! 정파의 잡것들아!”
쩌저저정! 콰차창! 투콰캉―!
야광주가 비추는 지하 동굴에서 각파를 대표하는 자들이 불꽃 튀는 접전을 벌였다.
힘이 가해진 방향도 그랬지만, 다섯 명은 의도적으로 점점 내부로 향했다.
그들이 여산을 찾은 목적은 같았고, 그렇다면 안쪽을 확인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천문도와 중화전도가 양각된 방을 지나 각종 기관 장치들이 즐비한 방을 휙휙 지나쳤다.
차유람이 해체에 성공하자 숨겨져 있거나 잠겼던 문이 열리며, 일직선으로 뻥 뚫린 그곳들을 지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광장이 나타났다.
마른 비와 미카엘이 신위를 선보였던 그곳.
다섯 명은 널찍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박살 나고 부서진 병마용 위로 날아오르며 더욱 살벌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헉, 허억…!”
옆구리를 움켜쥔 운종혁이 그들을 뒤따랐다.
화산파에서도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강유는 황릉에 들어서자마자 초패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생사를 건 혈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운종혁이 보기에 강유가 자신을 언급한 건 구실일 뿐 그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마, 말려야 한다…!”
다들 상대에 대한 적의와 황릉에 눈이 멀어 있다.
자신 또한 복수에 눈이 뒤집혔었지만, 중상을 입고, 초패에게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받자 찬물을 끼얹듯 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타인의 싸움을 옆에서 관찰하자 이성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우선 저들을 말리고 막주를 찾는다!’
운종혁이 싸움의 현장에 다가가기 위해 발을 뗐을 때였다.
푸욱―!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병마용의 뒤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배를 꿰뚫린 운종혁이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봤다.
“너, 네 이놈…!”
찢어 죽여도 모자란 원수가 싸늘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저들을 말리려고? 안 되지. 이 얼마나 좋은 상황인가.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여겼는데 덕분에 살아날 구멍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운종혁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막주가 병마용 사이로 스며들 때였다.
정사파의 수장들이 무아지경으로 칼을 주고받으며 광장을 거의 가로질렀을 때이기도 했다.
진시황이 안치된 방, 푸른 기운에 휩싸였던 마른 비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