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31화 (331/463)

331화

‘비슷해.’

지하 깊숙이 위치한 고대 제왕의 무덤.

삼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들어온 그곳에서 마른 비는 생각지도 못한 것과 조우했다.

‘자연기…!’

애뢰산 수직 동굴, 운남 지맥의 원류였던 그곳처럼.

진시황릉에는 거대한 힘을 품은 대자연의 기운이 잠자고 있었다.

‘애뢰산과는 달라. 이건 자연이 품은 게 아냐. 인위적으로 가둔 거야!’

섬서성은 중화의 중심에 있으며, 섬서의 중앙에는 여산이 자리 잡고 있다.

천하의 중심.

진시황이 여산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운남과 달리, 아득한 옛날부터 문명의 중심지로 기능해온 섬서는 자연의 기운이 쇠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뒤에 가두고, 봉했다.

일 만의 영혼을 붙잡아둔 것처럼.

천오백 년 동안 황릉의 술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눈앞에 있는 기운을 연료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빠져나간 게 이 정도야. 처음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끌어 모은 걸까?’

술법으로 그릇을 만들고, 물을 채워 넣듯 자연기를 가뒀다.

하지만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기운을 완전히 가둘 수 있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천오백 년 전, 이곳에 봉인된 기운은 제방에서 물이 새듯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막대한 양이 보존돼 있었고, 자신들이 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너끈히 유지됐을 게 틀림없다.

마른 비는 적어도 술법 측면에 있어서만큼은 고대가 현시대를 능가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급속도로 새어 나가고 있어. 우리 때문인가?’

기관이 작동했고, 술법이 파훼 됐으며, 영혼들이 승천했다.

황릉의 변화가 자연기를 가둔 술법에도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마른 비는 눈을 감은 채 푸른 기운에 손을 뻗었고, 물이 새듯 콸콸 쏟아지는 자연기를 느꼈다.

‘익숙해…….’

맑고도 거센 기운이 육신을 자극한다.

그건 마치 돌풍이 불어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철창이 깨지자 유폐되어 있던 자연기는 탈출하듯 세상 밖으로 내달렸고, 그 앞에 선 마른 비의 전신을 두드렸다.

자연기에 민감한 마른 비에게 그건 세례이자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내 기운이…… 상응하고 있어?’

미카엘이 느낀 게 맞았다.

감응을 넘어선 동조.

세차게 불어오는 기운에 마른 비의 자연기가 반응했다.

그러자 육신에 잠들어 있던 자연기의 정수가 고개를 들었다.

애뢰산에서 흡수한 이후, 아직도 완전히 녹여내지 못한 그것이 강렬한 자극에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휘아아악―!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마른 비는 바람이 집약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바로 지금, 두 번의 기연이 하나로 포개지며 자신에게 강대한 힘을 선사했다는걸.

번쩍!

눈을 떴을 때, 마른 비의 세상은 또 한번 달라져 있었다.

“어엇?”

“음?!”

“어라? 수왕 님, 방금…!”

설지굉, 미카엘, 차유람, 왕문, 전흠.

다섯 명이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광장 쪽을 보고 있던 그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뭐냐? 방금 뭔가 엄청난 게….”

설지굉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무공 경지가 높은 다섯 명은 지척에서 벌어진 이변을 감지했고, 달라진 점을 깨달았다.

“……퍼런 것. 불꽃같이 이글거리던 기운의 응집체. 어디로 사라졌지?”

잠깐 한눈을 팔았을 뿐이다.

한데 그사이 눈에 보일 만큼 유형화한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이번엔 차유람이 탄성을 질렀다.

“수왕 님, 눈이…!”

푸른 광채로 번쩍이는 눈빛.

그걸 보는 순간, 일행은 마른 비가 왜 이상 행동을 보였으며, 기운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미친…! 설마 그걸 흡수한 건가?!”

설지굉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온 마른 비가 작게 웃었다.

“아쉽지만 그건 아냐. 받아들이려 했는데, 뻗어 나가려는 힘이 훨씬 크더라구.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답답했나 봐.”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른 비는 의아해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그래도 얻은 건 있어. 그동안 소화하지 못했던 게 완전히 내 것이 되었거든.”

아리송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른 비가 지금 굉장한 힘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설지굉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투덜댔다.

“빌어먹을. 재수가 좋은 놈은 자빠져도 돈에다가 코를 박는다더니…….”

미카엘도 심유한 눈으로 마른 비를 보고 있었다.

‘절대량이 늘어난 건 물론이고,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안정됐다. 잠깐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지극히 평온한 기운.

실제 붙어보지 않으면 마른 비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게 미카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없었다.

“소란스럽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건가?”

마른 비가 광장 쪽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엉망으로 뒤엉킨 다섯 명이 방 안에 난입했다.

“카아아압!”

“뒈져라, 늙은이!”

“오오오…!”

호살열아가 권강을 내뿜고, 만개한 매화가 흐드러지게 휘날린다.

종남을 대표하는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이 공간을 제압하니, 흉사방주의 사흉검(邪凶劍)과 대혈문주의 대혈검식(大血劍式)이 도도한 검격을 찢어발겼다.

다섯 명의 무인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살벌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누구야, 당신들?”

마른 비가 물었지만, 그들은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관성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고, 실수 한 번에 목이 날아갈 상황이다 보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다섯 명에게, 마른 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 싸우고 멈춰 봐. 물을 게 있으니까.』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발했던 어떤 언령보다도 강력했다.

“흡…!”

“아, 아니?!”

초패와 강유, 오무양이 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꿈틀댔다.

반면 독문철과 서구식은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곤충마냥 꼼짝 못 했다.

무공 경지에 따른 차이였다.

그들은 곧 야수 제어에서 풀려났지만, 경악한 얼굴로 마른 비를 돌아봤다.

“뭐, 뭐냐?!”

“이자는…… 수왕?!”

“방금 그건 무슨 사술이냐! 당장 설명하지 못할까!”

옷이 찢기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데다, 머리가 산발이 된 그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그들의 흥분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른 비는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춘 뒤 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싸우고.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행동을 제약한 야수 제어와 달리 마음을 가라앉히는 목소리였다.

야수 친화에 노출된 다섯 명은 움찔 몸을 떨다가 또 한번 경악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강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이자가 수왕인가…!’

‘전신갑옷? 색목인? 뭐지, 저자는? 심지어 수왕에 못지않아! 어디서 이런 자가?’

‘여자? 저 독특한 분위기는…… 헉! 저건 혈랑조가 아닌가?! 설마 색광신투?!’

‘외팔이 노인과 살수로 보이는 자. 망치를 든 사내까지……. 이 여섯 명으로도 본파를 쓸어버리고도 남는다! 어떻게 이런 구성이?’

금복인이 조직한 탐사대는 정사파 수장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무공을 모르는 금복인과 성취가 부족한 금벽파라를 제외하더라도, 이 여섯 명에 별비가 더해지면 정파나 사파 진영 어느 한쪽을 몰살할 전력이었다.

어쩌면 여산에 든 무인 전체가 달려들어도 패할지 모른다.

처음 산을 오를 때만 해도 자신감에 차 있던 다섯 명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리고 겨우 주위를 돌아볼 정신이 든 그들은 기겁을 했다.

“어, 엇?!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이게 다 금은보화라니…….”

“헛! 맙소사! 저것, 진시황인가?!”

일행을 보고 놀랐고, 무덤을 보고 놀랐다.

연달아 가해진 충격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죽일 듯이 싸우던 것도 잊고 넋을 놓았을 때, 그들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발굴에 대해 외부에 알린 적이 없어. 자네들은 누구고,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나? 설마 밖에 있는 본당의 인부들을 해친 건 아니겠지?”

금복인이었다.

인부들이 걱정된 그는 다급하게 물었고, 엉망진창이 된 강유가 검을 거꾸로 들며 정중히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노야. 화산의 제자이자 매화검수들을 이끄는 철혈검 강유입니다. 저희가 여기에 온 건 진시황릉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강유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당당하고자 노력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건 금복인이 발굴한 황릉을 확인하고, 진시황의 유품을 확보하라는 사문의 명 때문이었으니까.

온건하냐 강압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강탈을 염두에 두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금복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이들이야 몰라도 정파의 대들보라는 화산과 종남까지……. 허허, 그래도 정파는 다를 것이라 여겼거늘. 덕분에 결국 강호인이란 칼 든 무뢰배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네.”

금복인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리고 거침이 없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건지 강유의 얼굴도 굳었다.

“지금 화산을 도적떼에 비유하신 겁니까? 여산은 화산과 지척이며, 섬서의 일은 크든 작든 본파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큰일을 화산의 허락 없이 추진하신 건….”

금복인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강유의 말을 끊었다.

“에둘러 표현하지 마라! 지금 너희가 하려는 짓이 도적떼와 다를 게 뭐란 말이냐! 그리고 허락이라니? 여산이 화산의 땅인가? 난 평생 이 일에 매진해왔다! 이제 겨우 세상에 나온 풋내기가 감히 내 앞에서 허락을 운운해?!”

항상 쾌활하게 웃으며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던 금복인이다.

하지만 정색을 한 그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강유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눈치를 보던 초패가 장난스레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했다.

“솔직히 말하지. 녹림은 보물을 가지러 왔소. 선배가 말을 안 들으면 약탈할 생각으로. 하지만 어렵겠군. 이런 자들이 모여 있는 줄 알았다면 난 총타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을 거요.”

그는 언령을 들은 후부터 지금까지 마른 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복인은 초패를 힐끗 봤다가 다시 강유에게 눈길을 돌렸다.

“차라리 녹림이 낫군. 솔직하기라도 하게. 뻔히 보이는 속내를 가당찮은 헛소리로 감추려 하지 말고.”

화산의 대제자가 어디서 이런 막말을 들어봤겠는가.

속내를 들키고 모욕을 당한 강유가 얼굴을 붉혔다.

명문의 제자답지 않게 호전적이고, 다소 편협한 측면은 있지만 그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사문의 명이라 나오긴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 행보가 탐탁지 않았다.

그가 수긍과 사과를 담고 살짝 고개를 숙일 때, 마른 비가 말했다.

“왠지 익숙한 기운이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나와.”

사람들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도저히 인간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벽면의 틈새에서 흐릿한 형체가 흘러나왔다.

살막주는 발각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가를 떨었는데, 이상한 건 그 와중에도 계속 다른 자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점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눈을 커다랗게 뜬 전흠이 있었다.

“아…! 가주님께서는?!”

막주를 본 오무양이 소리를 질렀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운종혁이 중상을 입었다는걸.

마른 비가 입구 너머를 보며 말했다.

“희미한 기운……. 광장에서 누군가 죽어가고 있어.”

강유와 오무양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죽어가고 있다고?!”

“안 돼! 그분은 운가의 가주님이요! 광장 쪽이라고 했소?!”

둘이 달려 나가고, 마른 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운가? 설마 사천 운가를 말하는 거야? 그 은신술… 살수 같은데. 당신 설마….”

살막의 살수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안 돼! 무슨 짓이야!”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차유람의 비명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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