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 * *
사파의 군소방파 출신인 임찰은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태였다.
그는 명성을 떨치기 위해 북벌에 참전했으나, 유명해지기는커녕 살아남기 바빴다.
심지어 북경을 나오는 날, 정파와의 대규모 싸움에 휘말렸을 때는 진짜 죽을 뻔했다.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진시황의 무덤이 진짜든 아니든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고, 사람이 모이면 눈에 띌 기회는 분명히 생기니까.
하지만 꿈에 나올까 끔찍한 괴물들이 튀어나왔을 때, 임찰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만둘래. 난 무의 재능이 없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런 삶……. 이젠 지겨워.’
또 어찌어찌 살아남았고, 분위기에 휩쓸려 황릉의 입구까지 왔다.
좁은 입구로 대규모 인원이 진입하다 보면 무조건 싸움이 났겠지만, 백호가 나타나서 입구를 막아 버렸다.
수왕의 분신이라는 영수는 콧대 높은 매화검수들조차 진입을 포기할 만큼 막강했고, 그 후로 이런 대치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저 범 덕분에 살았어. 여기서 칼부림이 났으면 다 죽었을 거야.’
별비를 기준으로 좌측엔 정파가, 우측엔 사파가 뭉쳐 있었다.
그들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서 칼을 빼 들고 서로를 노려봤다.
양측의 수장들이 전부 무덤에 들어간 상황이라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다.
‘제발 이대로 끝나라. 누구든 저 결계만 없애줘. 그럼 뒤도 안 돌아보고 고향으로 내려가야지.’
어머니가 보고 싶다.
무인이 돼서 입신양명하겠다고 떠나던 날, 울며불며 말리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들을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이나 잡을 거냐며 매정하게 뿌리치고 나왔다.
하지만 수년 간 칼밥을 먹으며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은 재능이 없다는 것과 강호 무림은 힘이 없는 자가 꿈을 꾸기엔 너무나 가혹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모시면서 농사나 지어야지. 참한 여자를 만나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고 오순도순….’
임찰이 소박하지만 행복한 미래를 그릴 때였다.
사파 진영의 후미에서 황색 무복을 입은 남자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몸이 안 좋은지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그는 비틀대며 정파 진영으로 걸어갔다.
‘……외팔이? 아냐, 한쪽 팔목만 없어. 저건 이번에 잘린 게 아닌데….’
한데 비틀대는 이유는 뭐며, 왜 정파 쪽으로 걸어간단 말인가.
‘술이라도 퍼마셨나?’
난데없이 걸어 나와 정파 진영으로 향하는 사내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금 뭐 하는 건가? 다가오지 마라. 몸이 불편한 것 같은데, 너희 쪽으로 돌아가.”
종남의 제자가 사내를 제지했다.
임찰에게는 뒤통수만 보이는 의문의 사내가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저, 저분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사내가 멀쩡한 손으로 화산파 무복을 입은 자를 가리켰다.
지목된 자는 이십대 중반쯤 되는 여인이었다.
“……저 말인가요?”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검 손잡이 끝에 매달린 붉은 수실.
매화검수였다.
임찰은 보는 순간 그녀의 정체를 짐작했다.
‘매화검수면서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옥매화(玉梅花) 홍진설!’
화산제일미이자 섬서제일미.
매서운 검술을 자랑하는 검객이면서 강유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진 여인이었다.
갑자기 지목을 받은 홍진설이 눈썹을 찌푸렸다.
“저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꼬,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
종남의 제자가 검을 들이밀며 외쳤다.
홍진설은 사내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현 소협. 나서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 말이 있다니 어디 한번 들어보죠.”
그녀는 사파라고는 하나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대를 다짜고짜 핍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불의의 상황이 닥쳐도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수백 명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화산의 제자답게 의연한 대처를 보이고자 했다.
사내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더니 홍진설에게 다가갔다.
“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소저가 꼭 들으셔야만 하는….”
“대화를 나누기에 충분한 거리 같군요. 더 이상 오지 말고 거기서 말씀하세요.”
지나치게 거리를 좁히는 사내에게 홍진설이 경고했다.
그리고 임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 나 이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임찰이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때였다.
검의 사정거리까지 다가간 사내가 작게 속삭였다.
그는 더 이상 비틀거리지도, 말을 절지도 않았다.
“흐흐. 너 무지하게 예쁘다고. 얼굴 한번 만져보자.”
사내는 음침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대비하고 있던 홍진설은 검을 뽑았다.
“미친놈이었군.”
스각―!
눈부신 쾌검이 뼈를 잘랐다.
핏물이 튀며 깔끔하게 분리된 팔목이 하늘을 날았다.
하지만 사내는 웃었다.
“크흐흐! 흐흐! 하하하하!”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달려들었다.
홍진설은 움찔했으나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스각! 피슛! 스거걱―!
공격에 나선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화검수들이 그녀를 도왔고, 사내는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땅에 나뒹굴었다.
“미친놈이 어딜 감히…….”
“사저. 사파의 쓰레기들에게까지 인간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자가 고수였다면 위험했을 겁니다.”
화산파 제자들이 죽어 널브러진 사내를 내려다볼 때였다.
임찰은 기억을 되살리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때와 같아!’
북벌 이후, 연회가 끝나고 북경에서 나왔을 때.
정파와 사파가 대규모로 충돌한 그날.
서문유화에게 수작을 걸다가 팔목이 잘린 놈이 딱 이런 행동을 보였었다.
‘잠깐……. 팔목?!’
맙소사! 그놈이다!
방금 토막 나서 죽은 놈은 천하제일미를 희롱해서 싸움의 빌미를 만들었던 자가 틀림없었다.
‘그때 놈은 제 일행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어. 시체도 찾지 못했다던데……. 전쟁 중에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거야?!’
그럼 왜 이런 일을 벌이는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굳이 이런 상황에서….
거기까지 생각한 임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이런! 설마…!’
평생 가도 보기 힘든 미인을 보고 욕정이 끓어올라서 실수를 한 게 아니었다.
이건 철저히 계획된 행동이었다.
정파와 사파를 충돌시키기 위한.
임찰은 고개를 홱 돌려서 사파 진영 내부를 돌아봤다.
‘황색 무복…!’
있다. 같은 옷을 입은 놈들이!
사파 진영 곳곳에 위치한 놈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자의 사문이 어디인가! 누가 이런 쓰레기를 보내서 사저를 욕보이려 한 것이냐!”
매화검수 하나가 분개하여 외쳤다.
정파 진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임찰은 눈이 마주쳤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황색 무복을 입은 자와.
「흐흐흐. 무공은 형편없는 놈이 눈치 하나는 제법이구나.」
그자는 임찰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음을 보내왔다.
그는 양손을 늘어뜨린 채 손에 쥔 무언가를 비볐는데, 그럴 때마다 백색의 가루가 날렸다.
콧속으로 달큼한 향기가 들어오는 걸 느끼며, 임찰이 외쳤다.
“이, 이놈들…! 아니요! 우리가 아냐! 이, 이건 음모…!”
퍼어억!
가슴을 뚫고 들어온 검날.
임찰은 말을 마치지 못한 채 피를 뿜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찌른 사내가 외치는 걸 들었다.
“더러운 사파 놈들! 쓰레기들이 감히 옥매화에게 수작을 부려?! 다 죽여 버리겠다!”
황색 무복 사내의 목소리는 비장했고, 분개에 차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알아챈 건 임찰뿐이었다.
‘우, 우리가 한 게 아니야…. 아아, 어머니…….’
사방에서 칼 뽑는 소리와 욕설이 터져 나오는 걸 끝으로, 귀향을 바라던 청년의 숨이 끊어졌다.
* * *
“오, 오해 마시오. 훔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보기만 하는….”
대혈문주 서구식이었다.
그는 마른 비 일행이 강유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로 슬쩍 빠져서 보물의 산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무인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보검이었다.
“이 멍청한 작자가…! 여기 있는 걸 하나라도 건드리면 기관이 작동한단 말야!”
그그그긍―
차유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굴 전체가 진동했다.
서구식은 화들짝 놀라서 검을 제자리에 꽂았지만, 이미 발동된 기관이 멈출 리 없었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다 죽게 생겼군.”
설지굉이 얼굴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는 잿빛 눈동자에 살의를 담고 서구식을 노려봤다.
“금은보화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못 하나?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길래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야?”
서구식은 그 와중에도 울컥하며 소리쳤다.
“난 대혈문의 문주다! 넌 뭐 하는 놈이길래 그런 망발을…!”
“대혈? 이름부터 병신 같군. 어차피 죽을 거 화풀이라도 하고 죽어야겠다. 너부터 뒈져라.”
잿빛 검강이 치솟았다.
설지굉은 진심으로 화가 났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서구식 또한 검강을 구사할 수 있지만 그는 지쳐 있었고, 설지굉의 경지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의 목이 날아가기 직전, 철 뭉치가 날아들었다.
투콰카캉!
폭음이 터지고, 회설검강이 가로막혔다.
자연기를 주입한 권갑.
마른 비는 한쪽 주먹만으로 전력을 다한 설지굉의 검격을 멈춰 세웠다.
“할아버지. 성질 좀 죽이라고 몇 번을 말해? 우리 아직 안 죽었어. 싸우지 말고 달려.”
설지굉이 입술을 씰룩였으나, 마른 비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주에게 물었다.
“살막. 맞지?”
“…….”
천장을 올려다보던 막주가 고개를 내렸다.
절망에 빠진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거칠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나가서 얘기하자.”
퍼어억―!
“커, 커억…!”
일격. 막주가 반응할 틈도 없이 마른 비는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매고 일행을 재촉했다.
“광장으로 달려! 이렇게 죽을 순 없잖아!”
무의미한 몸부림이었다.
천장은 벌써 내려앉기 시작했고, 일행 중 가장 빠른 차유람이 경공을 펼쳐도 절반도 못 가서 생매장될 터였다.
하지만 마른 비의 말처럼 이대로 죽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탐사대와 사파의 수장들은 진시황의 방을 나와 강유 일행에게 합류했다.
강유와 오무양은 피 칠갑을 한 운가주와 함께 있었다.
“……돌아가셨소.”
강유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허탈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검날 위에 살아가는 인생,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각오를 다졌소. 허나 이런 최후를 맞을 줄이야.”
아쉽다는 투였다.
허나 그의 말처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는지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과연 화산파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될 만한 남자였다.
“포기하지 마. 우린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잘하면 나갈 수도 있을 거야.”
마른 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강유는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림없소. 지반 전체가 무너지고 있으니 작은 산 하나가 내려앉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오. 이걸 부수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오.”
마른 비는 막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수는 게 아니야. 뚫는 거지. 다들 준비해. 일점에 집중해서 모든 걸 쏟아 붓는 거야.”
마른 비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고, 이판사판이라는 걸 깨달은 자들이 표정을 바꾸며 힘을 끌어올렸다.
“한꺼번에 명중시켜. 파괴력이 극대화되도록. 미카엘, 우리가 후속타야.”
미카엘은 이미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어지간한 수라장을 겪어왔는지 전혀 포기한 기색이 아니었다.
“제일 센 놈이 까라면 까야지! 간닷! 오오오오!”
왕문이 망치를 붕붕 돌리더니 내력을 집중해서 집어 던졌다.
금복인과 금벽파라를 제외하면 여기 있는 자들은 전원이 강기를 구사하는 강자들이었고,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왕문의 망치가 향하는 경로로 강기를 쏟아냈다.
“카아앗!”
“오오오오!”
병마용들이 널브러진 광장.
그 한복판에서 오색 빛깔의 강기가 솟아오른다.
구파의 절기와 사파의 비전이 공기를 가르고, 천하 팔대 병기가 뿜어낸 괴공이 석판을 찢었다.
마지막으로 잿빛 검강이 합류하니, 절정을 넘어선 강자 아홉 명이 뿜어낸 필생의 절기가 천장에 작렬했다.
쿠콰아아아앙―!
운석이 거꾸로 치솟은 것처럼 깊숙한 구덩이가 파였으나,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침입자를 매장하기 위해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먼저 갑니다!”
미카엘은 있는 힘껏 대검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창을 찌르듯 내뻗었다.
“하아아압!”
여규의 사일검을 닮은 찌르기다.
하지만 훨씬 무겁고 강렬했다.
날카롭게 다듬은 금빛 강기가 천장으로 솟구치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깊숙한 균열이 생겼다.
우르르릉―
마른 비가 선택한 건 뢰창이었다.
그가 눈을 뜨니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얼굴을 수놓았다.
전투화장. 그리고 훨씬 짙어진 푸른빛.
속성보다는 물리적 피해와 음파에 집중한 하늘의 창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꿰뚫어버려!”
뢰창은 미카엘이 만들어 놓은 균열을 타고 지상으로 용솟음쳤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암석과 흙더미들.
음파가 여산을 울린 건 그때였다.
우르르릉―!
뢰창의 음파는 지저를 뒤흔들며 흙더미를 낱낱이 해체했다.
강줄기를 거스르는 연어처럼 땅을 뚫고 올라간 창은 마침내 지표면에 도달했다.
푸화하아악―!
빛.
하늘을 뒤덮고 쏟아지는 흙더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