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제가 먼저 갑니다! 뒤를 따르세요!”
그건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미카엘은 누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수직으로 솟구쳤고, 손바닥만 하게 내리쬐는 빛을 향해 돌진했다.
하늘을 뒤덮고 쏟아지는 흙더미와 암석들.
판금갑을 걸친 미카엘은 금빛 기운을 둘러친 채 몸으로 그것들을 뚫었다.
“오오오오!”
잠깐 모습을 비췄던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방향을 잡았고, 뢰창의 음파가 흙과 암석을 잘게 부숴놓았다.
남은 건 돌파뿐이었다.
“뒤를 따라와!”
두 번째로 도약한 건 마른 비였다.
그는 미카엘의 뒤를 따랐고, 푸른빛을 뿜으며 날아올랐다.
그때, 미카엘은 빛이 보였던 곳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마어마한 압력을 밀어내며 여기까지 왔다.
산 전체가 내려앉았고, 굴착이나 다름없는 일을 해내며 탈출로를 뚫었다.
이제 흙더미를 헤치고 지상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런! 힘이…!’
몸이 덜컥하며 밀렸다.
쏟아져 내리는 흙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때, 발밑을 받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계속 가! 내가 올려줄게!”
마른 비였다.
그는 어깨로 발을 지탱한 채 하강하는 미카엘을 밀어 올렸다.
흙더미에 밀렸던 그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마른 비는 흙더미만이 아니라 미카엘과 판금갑의 무게까지 감당하고 있었다.
“으, 으윽…!”
하지만, 역시 벅차다.
느낌상 지상에 가까워진 것 같은데,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새카맣고, 흙으로 뒤덮여 호흡도 가빠 왔다.
‘안 되는 건가…!’
마른 비와 미카엘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다급한 외침이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수왕! 우리가 도울 테니 몸을 보호하시오!”
후와아악―!
눈길을 내리니 강기 덩어리 두 개가 치솟고 있었다.
초패와 강유.
힘이 모자랄 거라 판단한 두 사람이 다짜고짜 강기를 쏘아 올린 것이다.
“이 미친놈들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강기를…!”
밑에 남은 일행도 한데 뭉쳐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설지굉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외쳤다.
“비아야! 몸을 보호해라! 전신에 내공을 둘러쳐!”
“……!”
상황을 파악한 마른 비가 자연기를 분산했다.
미카엘을 밀어 올리는 한편, 몸을 보호한다.
극한까지 끌어낸 교룡갑이 철골과 강피의 강도를 높였다.
쿠콰카카캉!
지반이 내려앉는 가운데, 땅속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푸아아악―!
흙이 엉겨 붙어 엉망이 된 팔뚝.
본래는 찬란했을 금빛 갑주가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허어억…!”
지면이 들썩이더니 육중한 체구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미카엘은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투구를 벗어 던졌고, 입을 크게 벌리며 공기를 들이켰다.
“허, 허억…! 하아, 하아…….”
폐에 공기를 채워 넣은 사내는 곧바로 몸을 뒤집어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비, 비아…! 비아야!”
미카엘은 마른 비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땅을 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릿빛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아야! 정신 차려! 괜찮으냐!”
얼마나 급했는지 항상 말을 높이던 미카엘이 평어를 쓰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날 만큼 흙을 덜어내자, 파묻혀 있던 마른 비가 몸을 움찔거렸다.
푸아아악―!
“헉! 허어억…!”
마른 비가 땅속에서 기어 나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미카엘이 그랬듯이, 지상의 공기를 만끽할 새도 없이 엎드려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아저씨…! 누나! 금벽아…!”
마른 비는 온 힘을 다해 땅을 파헤치며 일행을 불렀다.
하지만 따라붙는 게 늦었는지, 아무리 파내려 가도 보이지 않았다.
마른 비가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 어떡해……. 설마 모두….”
“비아야!”
미카엘의 외침에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다.
둘이 나온 곳과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삐죽 솟아 있었다.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붉은 금속!
마른 비의 눈이 커졌다.
“거기야! 그 아래를 파!”
둘은 구르다시피 달려갔고, 미친 듯이 흙을 파내려 갔다.
“푸, 푸하아아…!”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민 건 차유람이었다.
미카엘과 마른 비를 뒤따른 일행은 흙더미에 밀려 궤도가 어긋나 버렸다.
그때, 차유람이 임기응변으로 혈랑조를 집어던진 것이다.
그 덕분에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질식하기 전에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무사히 지상으로 나온 일행은 바닥에 드러누워서 맑은 공기와 햇살을 만끽했다.
“망할.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
왕문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투덜댔고,
“그러게요. 다신 지하에 안 내려갈래요. 꽃다운 나이에 생매장 당할 뻔했잖아! 날 기다리는 남자가 쌔고 쌨는데.”
차유람은 그 와중에도 농을 던졌다.
미카엘은 금복인과 금벽파라를 가장 먼저 챙겼고, 마른 비도 일행을 일일이 살폈다.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서일까?
아니면 기력이 다해서일까?
죽일 듯이 싸우던 정파와 사파의 인물들도 서로 힐끗거리기만 할 뿐 주저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천천히 지상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겨우 정신을 차릴 때쯤,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 개새끼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강기를 쏴?! 비아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거냐?! 그랬으면 니들은 전부 내 손에…!”
설지굉이었다.
삼 년 만에 만났을 때도 심드렁했던 그는 무섭게 화를 내며 초패와 강유를 몰아붙였다.
표현을 못 할 뿐, 아마 이게 그의 본심이 아닐까?
마른 비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웃었고, 초패와 강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허나 다른 방법이 없었소.”
“사과드립니다. 어쭙잖은 변명이지만, 수왕이라면 버텨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그걸 말이라고 해? 니들도 한번 맞아볼 테냐?!”
설지굉을 말린 건 마른 비였다.
전투를 치르며 연이어 강기를 발출한 탓에 초패와 강유의 힘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멀쩡할 수 있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둘의 판단 덕분에 밖으로 나온 게 아닌가.
마른 비는 도리어 초패와 강유를 칭찬했다.
“둘이 아니었으면 못 나왔을 거야. 적절한 판단이었어. 난 괜찮으니까 화내지 마. 할아버지.”
그렇게 되자 당황한 건 초패와 강유였다.
아무리 급박했더라도 누군가 자신에게 강기를 쏘았으면 어땠을까.
활짝 웃는 마른 비를 보며 둘은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못 당하겠군. 무공과 성품, 모두 다…! 이 초패, 진심으로 탄복했소이다. 목숨을 살려준 은혜 절대 잊지 않겠소.”
“같은 심정이오. 솔직히 수왕의 소문을 들었을 때 얕잡아 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 우물 안 개구리였어. 뒤늦게나마 사과와 구명지은에 대한 감사를 전하오.”
녹림의 호법과 화산 최고의 후기지수가 마른 비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둘은 미카엘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종남의 장로 오무양 또한 감탄한 눈으로 마른 비를 보고 있었다.
“미, 미안하오. 내가 검을 뽑지만 않았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 서구식이었다.
그는 머리를 땅에 대다시피 하며 사죄했고, 맥이 빠진 일행은 잠자코 바라봤다.
“그 어마어마한 보물이 이 밑에 파묻혔단 말인가.”
독문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전처럼 흥분이 일지는 않지만, 보물에 대한 욕심이 꺼지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 말을 들은 자들이 각자 발밑을 내려다볼 때, 신음이 들렸다.
“으, 으윽…….”
배를 움켜쥔 채 기절한 남자.
마른 비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쓰러진 살막주였다.
그 때문에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는 걸 떠올린 자들이 낯빛을 굳혔다.
“저놈이 장 채주를…….”
“이 난리통 속에 팔자 좋게 기절해 있군.”
“아, 가주님…!”
죽은 자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손자의 복수를 갚고자 했던 운가주는 원을 이루지 못한 채 땅속 깊이 매장돼 버렸다.
“누가 저놈을 데리고 나온 거야?!”
빚이 있는 자들과 그에게 물을 것이 있는 마른 비가 막주에게 다가갈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앞을 막아섰다.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막주를 지상으로 끌어올린 자.
금복인의 호위무사인 전흠이었다.
“아저씨가 저 사람을 데리고 나왔어?”
전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금복인은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른 비가 눈으로 묻자, 전흠은 어렵게 답했다.
“살막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아네. 하지만 생매장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어. 왜냐하면 이 녀석은… 내 동생이거든.”
전흠은 청죽림을 방문했을 때 그믐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전? 성이 전 씨였는가? 어지간한 고수들은 찜 쪄 먹을 실력에 그 비범한 은신술. 게다가 전 씨라면……. 중원을 돌다가 어떤 단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네 혹시…….’
‘예. 짐작하시는 그게 맞을 겁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시길.’
전흠의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살막의 차기 막주로 추대받을 만큼 뛰어난 살수였으나 동생인 전제에게 자리를 넘기고 나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만금당의 핏줄을 호위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일행이 말을 잃은 가운데, 마른 비는 도강언에서 본 또 한 명의 호위를 떠올렸다.
‘귀진이 형의 호위. 그 사람도 살막 출신인가? 아냐, 이름이 일… 뭐라고 했었으니 살막은 아니겠네.’
만금당주의 아들이자 금복인의 조카, 금귀진.
그리고 그를 암중에서 호위하던 살수.
막주의 형제가 아니라도 살막 출신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전흠이나 막주 이상으로 뛰어났었고, 무엇보다 풍기는 냄새가 달랐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살막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살수일 확률이 높았다.
전흠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난 오래 전 살막과의 인연을 접었소. 그리고 동생이라고 해서 이놈이 저지른 일을 두둔할 생각도 없소. 애초에 그런 게 싫어서 막주의 자리를 버린 것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막주에게 볼일이 있었고, 전흠은 그걸 막을 생각도, 명분도 없었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핏줄이 핍박받는 걸 못 본 척 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내 어찌 그대들을 막을 수 있겠소. 다만….”
전흠이 말을 흐릴 때였다.
“커허허허헝!”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그들의 고개를 돌려세웠다.
산을 쩌렁쩌렁 울린 건 별비의 포효였다.
“이런…! 무슨 일이?!”
별비의 울음에는 엄청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각파의 수장들도 자신이 놓고 온 제자와 수하들을 떠올리며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 멍청한 놈들이…!”
가장 먼저 몸을 날린 건 독문철과 서구식이었다.
그들은 혹여나 수하들이 별비에게 달려들었을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별비가 아니라도 화산, 종남과 싸운다면 곱게 끝날 리 없다.
사색이 된 그들은 바닥 난 내력을 끌어올리며 죽자 살자 경공을 펼쳤다.
별비의 울음을 들은 마른 비도 마음이 다급해져서 몸을 날렸고, 인부들이 걱정된 금복인과 탐사대도 달리기 시작했다.
지상의 상황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 * *
마침내 당도한 황릉의 입구.
그곳은 난장판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이, 이게 대체…!”
주된 싸움은 정파와 사파 간에 벌어지고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백의 인원이 난마로 뒤얽혀서 죽고 죽이는 그곳은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그만둬! 싸움을 멈춰라! 당장 그만두지 못해!”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서구식의 대혈문이었다.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버린 그들은 눈이 벌게져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취해서 이성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서구식은 젊은 문도가 위험해지자 달려들어서 적을 베었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차 대주는 어디에 있는가!”
차 대주라 불린 자가 곧장 대꾸했다.
그의 검은 피로 물들었는데, 광기에 사로잡힌 다른 자들과 달리 제정신인 듯했다.
“무, 문주님! 돌아오셨군요! 지금 상황이…!”
보고를 하려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문주님! 조심…!”
푸우욱―!
서구식의 뺨을 관통한 검.
고개를 돌린 곳엔 그가 방금 목숨을 구해준 젊은 문도가 웃고 있었다.
“이, 이노이…! 네노이 미쳐느냐!”
참혹한 광경이었다.
수하에게 칼을 맞은 서구식은 혀가 잘렸는지 발음이 샜다.
하지만 분노가 너무 커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카아아…!”
그는 일검에 수하를 쪼개버렸는데, 정작 놀랄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크흐, 크흐흐, 크하하핫!”
상반신만 남은 청년이 죽어가며 웃었다.
그건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대혈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 대부분이 미증유의 광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마른 비 일행은 광란의 장 앞에서 아연한 얼굴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