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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34화 (334/463)

334화

“저것…! 결계가 없어졌다!”

일행이 싸움터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초패가 먼 곳을 보며 소리쳤다.

술법을 구동하는 근원인 자연기가 흩어지고 황릉이 무너지자 결계는 소멸해 버린 모양이었다.

“결계가 없어졌는데도 왜….”

초패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싸움이 났더라도 휘말리기 싫은 자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자들의 상당수는 괴물들에게 질려서 여산을 떠나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다.

여전히 황릉의 보물을 탐하는 자도 있었지만, 무리에서 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자들이 태반이란 뜻이었다.

“눈을 봐. 제정신이 아냐.”

답은 마른 비가 주었다.

지상에 몸을 토막 내도 재생하는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들었지만,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마른 비는 이와 비슷한 걸 경험한 적이 있었다.

‘운태산…!’

지독한 악기와, 그걸 증폭시키는 검은 말뚝.

백수교란 자들이 개입한 일이 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땐 짐승들만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인간이 이지를 상실하고 분노에 몸을 맡기는 건 마른 비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죽여라! 전부 죽여 버려!”

사파의 무인들이 눈을 까뒤집고 사납게 외쳤다.

정파의 무인들도 광기를 토하며 마주쳐 갔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오늘 너희를 전부 박멸해주마!”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끄르륵… 카하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자들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서구식을 공격한 청년처럼 아예 이성을 놔버린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여산에 모인 자들은 이제는 무너져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황릉의 입구에서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피아를 구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군에게도 검을 휘둘렀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적이라고 느끼는 듯했다.

“정신 차려라! 동 사제! 백 사제! 우린 적이 아니야!”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드문드문 제정신인 자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각파의 주축이 되는 무인들이었으며, 예외 없이 무공이 강한 자들이었다.

“힘…! 무공이 뛰어난 자들은 정신을 잃지 않았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휩쓸리지 않는 거야!”

소수의 강자들은 등을 맞댄 채 서로를 지켰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아군을 달랬다.

하지만 그들도 숫자에 밀려 하나둘 쓰러졌고, 종국에는 견디다 못해 동고동락한 사형제와 동료들을 살해했다.

여산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정파! 사파! 둘로 나뉜 채 끝도 없이 싸워대는 놈들…! 너희가 문제다! 네놈들 때문에 무림이 썩어버린 거야!”

정사지간의 인물들도 정신을 놓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파와 사파 가릴 것 없이 덤벼들었다가 나중에는 자기들끼리도 싸웠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이 사람들, 무언가에 취한 것 같아요. 술법 같은 게 아냐. 이건 마치….”

차유람이 나름의 추측을 내놓으려 할 때, 마른 비가 선수를 쳤다.

“향…! 이 냄새 느껴져? 달큼한 냄새가 나. 이건 자연의 향이 아냐. 인위적으로 퍼뜨린 거야!”

일행은 코를 킁킁댔지만 맡을 수 없었다.

오감이 유난히 발달한 마른 비만이 공기 중에 섞인 냄새를 구분해냈다.

“냄새라고요? 이성을 잃게 하고, 분노를 촉발하면서…… 폭력성을 드러내고, 흥분을 유발하는……. 그런 향이 있나요? 전 모르겠는데?”

차유람의 중얼거림이었다.

그 말을 듣자, 설지굉과 오무양, 초패와 같이 연륜 있는 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잠깐만. 그런 거… 어디서 들었는데?”

“백여 년 전에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혀 멸문했다는 문파의…….”

“도노산(挑怒散)?! 맞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문파라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들이 다룬 물건에 대해선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워낙 특징적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를 촉발하는 가루.

그들은 그것 외에도 자제 제조한 약물과 가루들을 흡입하고, 전투에 이용하는 특이한 자들이었다고 했다.

“하도 독특한 놈들이라 기억하고 있지. 그놈들, 무림 문파들을 이간질하고, 백성을 조종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정파와 사파의 합공을 받아 멸문했다고 하지 않았나?”

“맞소. 매우 드물게 정사가 연합 전선을 펼친 사례였지. 당시 놈들의 악행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했소.”

오무양의 말에 설지굉은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기어 나온 건가? 미친 약쟁이 새끼들이 하필 이 시점에….”

이런 때라서 모습을 드러낸 게 틀림없다.

북벌을 기점으로 이상 조짐이 나타나고, 제국이 교체되며 혼란이 극에 달한 때이니까.

실제로 지금 천하 각지에서는 듣도 못한 세력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했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릉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자들은 놈들에게 요리하기 안성맞춤인 재료로 보였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방법은? 저들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방법이 뭐요?”

왕문이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다손 치더라도 여기 있는 자들이 알 리 없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무언가 손을 쓴 모양이군. 이대로라면 상황이 심각한데….”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복부가 베여 장기가 삐져나와도, 팔 하나가 날아가도, 웃으며 칼을 휘두르는 자들 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도무지 해결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일행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크허허헝!”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건 별비의 울음이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지만, 그들이 여기로 달려온 건 각자 책임질 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퍼뜩 정신을 차린 일행은 각자의 동료와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미카엘! 할아버지를 부탁해! 그리고 만금당의 인부들을 찾아줘! 아마 여기로 오진 않았을 거야!”

마른 비는 막주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혈도에 자연기를 침투시키며 외쳤다.

그리고 곧장 몸을 날렸다.

황릉의 입구 앞, 완전히 매몰되어 버린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별비에게로.

녀석은 퇴로가 없는 곳에서 끝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크아아앙!”

못 해도 백이 넘는 인간이 참혹하게 죽었다.

대호의 발톱과 이빨에 찢긴 시체는 넝마조각처럼 너덜너덜했고, 피에 절은 육편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인상을 찡그릴 틈도 없었다.

별비가 커다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강한 사람이 있었어?”

별비의 옆구리에는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장기가 상한 것 같지는 않지만, 몸 깊숙이 파고든 검은 상당한 통증을 줄 게 틀림없었다.

별비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별거 아니다. 몇 놈 강한 인간이 있긴 했지만, 문제없이 처리했어.〕

별비는 주변을 힐끔거렸다.

근처에는 유독 처참하게 찢긴 시체들이 있었다.

〔이놈들이다. 이런 놈들은 처음 봤어. 산산조각 나서 죽는 주제에 웃더군. 뭐 하는 놈들이냐, 이것들?〕

별비는 방금 전의 상황을 돌이켜 봤다.

앞발에 얻어맞으면서도 악착같이 달라붙던 황색 무복을 입은 이들.

놈들은 자신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이빨을 못 쓰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입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기회를 보던 놈이 결국 칼을 박아 넣었다.

별비는 짜증을 내듯 덧붙였다.

〔검은 기운이 치솟질 않나. 죽은 것들이 튀어나오질 않나.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덤비질 않나. 여기서 뭔 일이 벌어진 지 아냐? 밑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너?〕

자신이 황릉을 탐험하고 병마용과 싸우는 동안 별비도 많은 일을 겪은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별비의 몸에 꽂힌 검을 뽑으며 다독였다.

“미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상처는 괜찮아?”

마른 비는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놀라운 건 이지를 상실하고 달려들던 인간들이 주춤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별비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물었다.

〔비아, 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기운이 훨씬 강해졌는데? 나 빼고 혼자 좋은 거 먹었냐?〕

“아, 그것도 나중에 말해줄게.”

마른 비가 싱긋 웃자, 별비는 자존심이 상한 듯 투덜댔다.

〔나한테는 덤비던 것들이 네가 오니 주춤대? 이것들이 산중제왕이자 지상 최강의 생물인 이 몸을 뭐로 보고….〕

말투부터 구사하는 언어까지.

역시 철중구의 영향을 받은 게 확실했다.

마른 비가 사도련으로 간 그를 떠올리며 피식 웃을 때, 별비가 물었다.

〔근데 이렇게 여유롭게 있어도 되냐? 나야 저 인간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만 넌 친구 먹은 거 아냐?〕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른 비가 고개를 돌릴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크, 크아아아…!”

서구식.

젊은 문도에게 뺨이 꿰뚫렸던 그는 상처를 입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대혈문의 고수들을 추스르는 걸 보고 괜찮겠구나, 싶었는데…!

“뭐, 뭐냐! 네놈들…!”

서구식의 가슴에는 장검이 박혀 있었다.

그는 피를 울컥 뿜으며 자신을 찌른 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즐거운 듯 웃는 사내는 황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컥! 커거걱…!”

“방주님!”

흉사방주 독문철도 목을 움켜쥔 채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흉사방의 고수들도 피습을 당했다.

“크아악!”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은신을 수련한 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유히 다가와 암습을 날렸고, 사파의 거대 문파 두 개를 순식간에 침몰시켰다.

별비가 턱짓을 하며 의지를 전해왔다.

〔나를 공격한 놈들과 같다. 저것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아. 미친놈들 틈에 숨어서 조용히 다가오더군. 놈들에게선 묘한 냄새가 났다.〕

광기를 띤 자들에게서 벗어나는 나름의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마른 비는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진 수장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눈이 커졌다.

‘이놈들… 기다린 거야! 우리가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지는걸!’

틀림없다.

각파의 수장들이 고립된 동료와 수하들을 챙기러 흩어지길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각개격파 중인 게 틀림없었다.

단순히 군중을 싸움 붙여서 혼란을 유발하는 걸 넘어 세력을 가리지 않고 전력을 깎아 놓으려는 의도 같았다.

“대체 어떤 놈들이…! 다들 방심하지 마! 암습이 올 거야! 황색 무복을 입은 놈들을 조심해!”

그때, 종남파 진영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네놈들이 원흉이렷다!”

오무양.

종남의 장로는 서구식과 독문철이 쓰러지는 걸 보고 상황을 짐작했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덤비는 자들을 베고 종남의 제자들을 추스르는 와중에도 등 뒤에서 다가드는 적을 감지했다.

“차아앗!”

천하삼십육검이 매서운 검광을 뿌렸다.

군문에서 유래한 절기가 의문의 암습자들을 사정없이 절단했다.

“음?!”

회수 중에 멈춰버린 칼날.

즉사해야 정상인 자들이 악귀처럼 웃으며 달라붙었다.

그들은 오무양의 팔다리와 검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오무양은 떨쳐 내려고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그의 단전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이런! 무덤을 탈출하느라 힘이…!’

쿠아악―!

등허리에 꽂힌 단검.

검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 오무양의 몸을 난자했다.

“자, 장로님…!”

종남의 제자들이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으나 그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황색 물결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전장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클클클. 고작 여섯 명과 종남의 장로를 맞바꾼 건가? 수지가 맞는 장사로군. 아니면 노부가 구파를 과대평가한 건가? 이건 예상보다 너무 허약하지 않느냐.”

황색 무복을 입고, 손톱을 길게 기른 꼽추 노인이 음침한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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