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비슷해!’
노인을 보는 순간, 마른 비는 그렇게 느꼈다.
백수교, 천인회, 그리고 향을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집단.
콕 집어 설명하긴 힘들지만, 셋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정, 사, 마……. 전통적인 무림 세력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근본부터 다른 자들이야.’
중요시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은 다를지언정 정파든 사파든 마교든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간다.
무림이란 특수한 세계에 몸담았지만, 그들은 범인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다르다.
여정 중에 만난 세 집단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 원리를 가지고, 기이한 짓을 일삼는다.
가장 큰 문제는 놈들이 힘을 지녔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백성이 피해를 입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괴수를 만들어낸 백수교가 그랬으며, 영령의 의사 따윈 무시한 채 데려가려는 천인회가 그랬다.
그리고 황색 무복을 입은 놈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벌였다.
이들은 백수교, 천인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만, 맛이 갔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었다.
‘살려둘 이유가 없는 놈들이야. 전부 죽인다.’
왜 이러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마른 비가 그답지 않게 몰살을 결심했을 때였다.
꼽추 노인이 마른 비를 보며 괴소를 흘렸다.
“클클. 네가 수왕이란 애송이렷다? 스스로 짐승이 되려는 놈들과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네 이야기를 하더군. 독특한 기운을 지녔다지?”
‘백수교와 천인회를 알아?!’
천인회 또한 백수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미친놈들끼리 무슨 관계인 거지?
마른 비가 의문을 떠올릴 때,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호오, 제법이군. 죽지 않았나?”
그는 싸움터의 좌우를 번갈아 봤다.
광기에 휩싸인 자들 속에 우뚝 선 두 사람.
강유와 초패였다.
강유의 주위엔 다섯 명의 매화검수가, 초패의 곁엔 녹색 견장을 단 네 명의 무인이 버티고 있었다.
화산에 매화검수가 있듯 녹림에도 정예가 있었으니 초패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들은 녹림이 자랑하는 녹전단(綠戰團)의 무인들이었다.
“남은 자가 이것뿐이라니…….”
초패가 침통하게 중얼댔다.
꼽추 노인은 칭찬하듯 말했지만, 그의 심정은 참담했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을 데리고 왔는데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만이 남았다.
그 외의 수하들은 죽거나, 눈앞에서 광인처럼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초패가 으드득 소리 나게 이를 깨물었다.
“감히 녹림에게 싸움을 걸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십팔채의 식구들이 너희를 찾을 것이다. 과거의 망령이든 뭐든 연관된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영혼까지 탈탈 털어주마.”
강유도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장문인께서 맡기신 제자들을 지키지 못했다.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사제들을…!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너희는 실수한 것이다. 이 시간부로 화산은 너희의 씨를 말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화산과 녹림.
황색 무복을 입은 놈들은 하나만으로도 벅찬 집단을 동시에 건드렸다.
흉사방과 대혈문은 멸문한 거나 다름없지만, 종남은 여전히 건재하니 구파의 두 문파와 척을 진 셈이었다.
당장 짐 싸서 중원을 벗어나도 모자란 판에 노인이 웃었다.
“흐흐흐, 요즘 것들은 참으로 물렁하구나. 본문은 정파와 사파 연합군을 상대로 싸웠었다. 고작 그따위를 겁낼 것 같으냐?”
노인은 보기 싫을 정도로 긴 손톱을 따각 거리며 말했다.
“행여나 착각하지 말거라. 너희가 선전 포고를 하는 게 아니다. 본문이 백 년 만에 중원에 나온 걸 기념하기 위해 맛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니.”
검지와 엄지를 비비던 노인이 딱 소리 나게 손톱을 부딪쳤다.
그리고 수평으로 손을 털었다.
“보여주마. 백 년에 걸쳐 개량한 환희문(歡喜門)의 비술을.”
마귀처럼 긴 손톱에서 백색의 가루가 풀려나왔다.
그리고 노인이 일으킨 장풍이 그것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광인처럼 싸우던 자들은 가루에 닿자마자 코를 벌름거렸고, 경련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강유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들은 돌아섰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싸우던 그들은 새빨간 눈으로 화산과 녹림의 잔존 인원을 노려봤다.
“카아아악!”
이마에 새파란 핏줄이 선 자들이 쇄도하고 있었다.
“오, 저쪽도 잊으면 안 되지.”
노인은 여유로운 손길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건 마치 사냥개에게 토끼를 물어오라는 손짓처럼 보였는데, 노인이 가리킨 곳은 금복인 일행이 인부들을 찾으러 떠난 방향이었다.
“어림없는 짓을…!”
마른 비가 두고 볼 리 없었다.
별비와 날아오르려는 찰나, 노인이 킬킬대며 웃었다.
“잊을 리가 있나. 명성 자자한 수왕을. 아이야, 실은 네가 있다는 걸 들었을 때 병력을 물릴까도 생각했었다. 허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아무리 따져 봐도 노부가 질 리가 없거든. 게다가….”
따악―!
노인은 신호를 보내듯 손가락을 부딪쳐서 소리를 냈다.
그러곤 웃어 젖혔다.
“마침 쓸 만한 패가 나타났지.”
후우우욱―!
급속도로 커지는 살기.
울혈이 맺히듯 덩어리진 그것은 분노와 한, 복수심이 버무려진 살의의 응집체였다.
살기의 발원지를 확인한 마른 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운가?!”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건 눈이 벌게진 운가의 정예들이었다.
운종혁을 따라온 그들은 세가에서 엄선한 최정예였고, 본래라면 정신을 잃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삼 년에 걸친 전쟁 끝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차 있었다.
심지어 별비 때문에 무덤으로의 진입이 좌절되자 운종혁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었다.
“클클, 웬만해선 손에 넣기 힘든 인형들이야. 이래서 전장이 즐거운 것이다. 손끝으로 인간을 조종하고 분열시키는 희열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지.”
악(惡).
꼽추 노인은 흰 부분을 찾을 수 없는 새카만 악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백 년 전 정파와 사파가 이례적으로 힘을 합친 원인이기도 했다.
감정이 들끓을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 환희문의 비술은 최악의 난관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향을 흡입하고, 아차 하는 순간 정신을 놓게 된다.
그리고 아군에게 칼을 휘두른다.
환희문과의 전투에서 어중간한 무인들은 아군을 해치는 독이었다.
“카아아아!”
“이, 이런…!”
수백의 무인이 화산과 녹림의 생존자들을 덮쳤다.
서로 싸우는 걸 멈추고 한꺼번에 달려들자, 강유와 초패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클클클. 아이들아, 노부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부디 날 즐겁게 해다오!”
운가의 정예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마른 비와 별비에게 쇄도했다.
여산의 상황은 곧 정리될 것으로 보였다.
백 살에 가까운 노마이자 환희문의 장로인 추요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투콰아아앙!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으니, 바로 마른 비와 별비의 힘을 오판했다는 것이었다.
푸른 기운이 작렬하고, 전선이 터져 나간다.
번쩍이는 뇌광이 강림하니, 귀청을 찢는 음파가 운가 정예들의 육신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저, 저게 무엇이냐?!”
양팔을 벌리고 웃음을 터뜨리던 추요운이 그대로 굳었다.
뢰창이 일으킨 흙먼지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내겐 이걸 풀 방법이 없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덤비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능력도 없고.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줘.”
마른 비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가 앞으로 목숨을 빼앗을 자들에게 보내는 조의이자 사과였다.
“가자. 별비야.”
“커허허허헝!”
벗의 허가가 떨어지자 영수가 움직였다.
새하얀 몸체가 환영처럼 늘어나며 수십 개의 백광을 그렸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우가 지상에 구현되니, 푸른 눈 일족 고유의 기술이 여산을 수놓았다.
번쩍―! 투콰카카캉!
수백이 밀집한 전장에 수십 갈래의 길이 뚫렸다.
별비의 힘은 점창과의 전쟁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그 한 수로 피의 길이 열렸다.
전사의 육체가 기동을 시작했다.
“카아아아!”
운가의 최정예.
안타깝지만 힘의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마른 비는 슬쩍 뻗는 주먹만으로 이성을 잃은 그들을 모조리 침묵시켰다.
왕문이 준 권갑은 단단했고, 전투의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무덤을 뚫고 나오느라 힘을 전부 소진했음에도 마른 비는 그들을 쓰러뜨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우측으로 갈게.”
마른 비와 별비는 뻥 뚫린 전장을 내달렸다.
둘은 별비가 뚫어놓은 길 중 하나씩을 택했고, 각각 강유와 초패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힘을 소진한 데다 숫자에 압도당하는 상황.
매화검수 중 남은 건 홍진설과 삼십 대로 보이는 사내뿐이었고, 녹전단은 전부 숨이 끊어졌다.
강유와 초패는 온몸에 검상을 입은 채 분투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이 당도했다.
“하아압!”
“커허허헝!”
마른 비와 별비는 손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정신을 들게 할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상황은 그렇지 못했고, 무엇보다 약에 취한 이들에게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마에 불거진 푸른 핏줄.
지렁이가 기어가듯 툭 불거진 그것들은 점점 뚜렷해졌고, 심장이 뛰는 것처럼 펄떡였다.
그 끝에 예상되는 건 하나뿐이었다.
혈관의 팽창과 폭발.
환희문의 약에 중독된 시점에서 이들을 살릴 방법은 없었다.
푸화하학―!
분수처럼 터지는 핏물은 아련하기만 했다.
일확천금, 또는 절대고수의 꿈을 품고 황릉을 찾은 이들이 덧없이 죽어갔다.
“몸, 추스를 수 있지?”
“물론이오. 고, 고맙소.”
마른 비는 물었고, 강유는 답했다.
“크라랑?”
“……나한테 말하는 거냐, 그거?”
별비는 울었고, 초패는 물었다.
화산과 녹림 생존자들의 안전을 확보한 마른 비가 진각을 내리찍었다.
투콰앙!
자연기가 응집되고, 정권이 장전됐다.
깊게 끌어당긴 주먹이 푸른빛을 뿜었다.
“하아압!”
권풍.
아니, 그건 차라리 주먹으로 구현한 섬광에 가까웠다.
곧게 뻗어 나간 빛줄기는 정신을 잃은 자들을 꿰뚫었고, 얼빠진 얼굴을 한 추요운을 덮쳤다.
“크, 크헙…!”
마른 비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위 앞에 얼어붙었던 노마가 손톱을 긁었다.
“까불지 마라, 애송아! 환락열조(歡樂裂爪)!”
“너나 까불지 마.”
수십 년을 은거한 노인은 현실 감각을 상실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수왕의 주먹은 맞받을 수 없는 해일이었고, 추요운은 손톱을 휘두르다 말고 튕겨 나갔다.
그는 입에서 뱉어낸 피로 허공을 물들인 후에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커, 커헉…! 마, 말도 안 된다! 어찌 이런 힘을…!”
아픔보다 놀라움이 컸다.
추요운은 고개를 들다 말고 부들부들 떨었다.
피분수를 터뜨리며 다가오는 수왕과 영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 막아! 환희문의 제자들은 놈들을 막아라!”
역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전장의 즐거움 어쩌고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추요운은 핏발 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즈, 증력산! 증력산(增力散)을 흡입하라! 그냥은 못 막는다!”
전장 바깥에서 황색 물결이 밀려왔다.
외부에 대기하며 여산에 든 자들을 참살하던 환희문의 문도들이었다.
그들은 마른 비의 무위를 목격했으면서도 겁먹지 않고 달려왔다.
이미 무언가에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스으으읍!”
추요운의 명령을 들은 그들은 품에서 회색의 가루를 꺼내더니 코로 가져갔다.
그리고 힘껏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색 물결의 기세가 배로 치솟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근데 이건 좀 많은데?”
힘이 온전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터.
허나 땅을 뚫고 올라오느라 힘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더욱 큰 문제는 재발동한 전투화장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점이었다.
마른 비가 눈살을 좁힐 때, 추요운이 간과한 또 하나의 변수가 도착했다.
“비아야!”
인부들을 구하러 간 탐사대 일행.
금복인이 발굴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덕에 그들의 전력은 노출되지 않았다.
“아, 아니! 저것들이 어떻게…?!”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한 그들이 달려오자 추요운은 크게 당황했다.
“이 약쟁이 새끼들이! 감히 누구를 죽이려는 것이냐!”
설지굉이 회설강기를 뽑아 올리며 외쳤다.
마른 비에게 위험이 닥칠 때마다 길길이 날뛰는 걸로 보아 그는 마른 비를 손자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르신! 제가 갑니다! 금 노야와 일행을 지켜 주십시오!”
미카엘이 대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설지굉이 덜컥 멈추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금복인과 만금당 인부들을 둘러쌌다.
차유람은 황색 물결에 둘러싸인 마른 비를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수왕 님! 이걸 써요!”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손에 끼고 있던 걸 벗어서 집어 던졌다.
“이, 이 여자가…! 좀 더 소중히 다루지 못하겠소!”
왕문이 비명을 지르고, 차유람은 콧방귀를 끼었다.
“흥! 내 물건으로 낭군을 구하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마른 비는 하늘을 날아온 물건을 받았다.
왕문이 만든 신병이기.
천하 팔대 병기의 하나로 꼽히는 혈랑조가 붉은빛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