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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36화 (336/463)

336화

“……?!”

얼떨결에 혈랑조를 받아든 마른 비가 차유람을 바라봤다.

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마른 비는 권갑을 벗어버린 다음, 곧바로 혈랑조를 착용했다.

신병이기란 원래 이런 걸까?

처음 꼈는데도 자신을 위해 만든 것처럼 꼭 맞았다.

주먹 위로 길게 삐져나온 네 자루의 칼날.

손바닥 쪽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늑대의 발톱이 붉은 울음을 토했다.

“차아압!”

북벌에서 창을 쥐었을 때와는 다르다.

체술이 특기인 마른 비에게 권갑이나 혈랑조 같은 무기는 큰 이질감이 없었다.

정권을 지르듯 주먹을 뻗고, 할퀴듯 긁는다.

올빼미 사냥을 쓰는 것처럼 적들을 가격하니 폭죽처럼 피가 터져 나왔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황색의 방벽에 여덟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인간의 팔다리가 바람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치솟는 광경은 토악질이 치밀 만큼 참혹했다.

허나 마른 비는 인상을 찌푸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적을 쓰러뜨리면서도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인간.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목소리는 혈랑조를 처음 휘둘렀을 때부터 들려왔다.

그리고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발톱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인간의 움직임에 늑대의 싸움을 끼워 맞추지 마라. 격 떨어지니까.

자신감이 과해서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마른 비는 환희문의 문도들을 쓸어버리며 손에 찬 혈랑조를 내려다봤다.

『늑대의 영이랬나? 네가 말을 거는 거지?』

―……?!

이름을 모르니 마른 비는 녀석을 혈랑이라고 칭했다.

혈랑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자신이 말을 걸었을 때 놀라지 않고 대꾸한 인간을 처음 본 것 같았다.

―뭐… 냐, 이것은? 영으로 직접 다가드는 의지…! 너, 깨우친 존재의 소통법을 아는가?

또한 혈랑은 언령에 놀란 모양이었다.

‘깨우친 존재’라는 건 와족식 표현으로 하면 각성수가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반응으로 볼 때, 혈랑은 붉은 발톱이 구사하는 의지의 전달법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혈랑조에 깃든 술법을 통해 말을 거는 게 가능할 뿐이었다.

‘수식어가 붙은 야수 정도의 수준인가?’

혈랑은 생전에 전상이나 광서우, 대망 급의 힘을 지닌 맹수였으리란 게 마른 비의 결론이었다.

―놀랍군. 차유람 저 쓰레기 같은 녀석이 누구에게 날 넘겼나 했더니 꽤 쓸 만한 놈이었어.

혈랑은 다시 건방진 말투로 되돌아갔다.

아마 마른 비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듯했다.

녀석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지시를 내렸다.

―싸움 중이니 길게 말하지 않는다. 기운을 개방해서 내게 넘겨라. 그리고 넌 가만히 있어. 네게 진정한 늑대의 전투를 맛보여 주겠다.

그 말인즉슨 육체의 제어도 넘기라는 뜻이었다.

마른 비는 기가 차서 피식 웃었다.

『웃기는 녀석이네. 그럼 내가 ‘네! 알겠습니다!’ 할 것 같아?』

―인간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지. 호의를 베풀어도 주제를 모르고 오기를 부려. 내가 너 같은 것들을 한두 번 다뤄본 줄 아나?

우우우웅―

혈랑조로부터 막강한 기운이 침투했다.

그건 온몸으로 퍼지며 강제로 육신의 제어를 앗아가려 했다.

마른 비가 놀란 건 그 시도보다는 기운의 특성 때문이었다.

‘이거… 설마 자연기인가?!’

결은 다르지만 그건 자연기가 분명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혈랑조에는 늑대의 영과 함께 녀석이 생전에 사용했던 기운이 봉인된 모양이다.

마른 비의 기분이 나빠진 건 기운이 매우 탁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악수라고 했지? 초원의 술사가 악수를 봉인했다고 했어. 그래서 이렇구나.’

마른 비의 생각을 모르는 혈랑은 음침하게 웃었다.

―내 힘을 보았느냐? 내 육신이 멀쩡했다면 넌 이미 뜯겨 죽었다. 내가 너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는 걸 다행으로 알라. 이제 네 몸을 움직여 피를 볼 것이다. 그로써 이 무료한 삶에….

『시끄러.』

마른 비는 혈랑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육신에 침투한 기운을 제어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나쁘지만 그건 자연기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과 자연기에 대한 제어력.

마른 비는 숨 한번 들이켤 시간에 혈랑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차유람 정도라면 혈랑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게 나을지 몰라도 마른 비는 아니었다.

설령 혈랑이 생전의 본체를 지니고 있더라도 마른 비는 주먹 한 방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야수 조련사였다.

육신을 빼앗으려고 발악하는 혈랑에게 언령이 발해졌다.

『가만있어. 죽을래, 너?』

―커흥…!

야수 제어는 실체가 없는 야수의 영마저 제압했다.

혈랑은 묵직한 바위에 깔린 것처럼 비명을 질렀고, 곧 침묵했다.

죽여도, 죽여도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황색 물결을 넓게 훑으며, 마른 비가 말했다.

『북방 초원에서 유명했다고? 운이 좋은 줄 알아. 네가 운남에서 태어났으면, 넌 광서우한테 받히거나 붉은 발톱의 밑에서 깨갱거렸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였다.

『늑대의 진정한 전투라고? 잘 봐. 내가 몸을 어떻게 쓰는 건지 보여줄게.』

마른 비는 양팔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리고 닫힌 문을 열어젖히듯 좌우로 힘차게 휘둘렀다.

“하아압!”

추아아아악―!

여덟 줄기 핏빛 강기가 휘몰아쳤다.

공간 자체를 절삭할 기운.

횡으로 잘린 풍경이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붉은 발톱이 앞발을 휘두를 때 이런 느낌일까?’

세상천지에 가르지 못할 게 없을 것만 같다.

왕문이 심혈을 기울인 걸작은 적의 육신은 물론이고 철검까지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커허허헝!”

우측 전장에서 혈랑의 발톱이 번쩍인다면, 좌측에선 백호의 발톱이 적들을 난자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고, 두려움을 모르면 어떤가.

일어설 수도 없게 찢어발기면 그만이다.

백 년 만에 세상에 나와 화려한 등장을 알리려던 환희문은 수왕과 별비를 만나 몰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모, 못 이긴다……. 저런 건 당할 수 없어…….”

추요운은 공포에 떨었다.

백호와 함께하는 수왕은 침몰시킬 방도가 없는 거함과 같았다.

저런 걸 상대하려면 최소 두세 명의 장로와 함께 문파의 주력을 모조리 끌고 와야 한다.

지금 전장을 휘젓는 둘의 기세는 그걸로도 가능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차아압!”

금빛 찬란한 검광이 황색의 파도를 베었다.

마른 비 못지않은 기세를 뿜으며 달려오는 미카엘을 보았을 때, 추요운은 도주를 결심했다.

“환희문의 제자들이여! 환락의 극치를 허하노라! 전원, 기폭단(起爆丹)을 삼켜라!”

추요운이 증력산을 꺼내 코로 흡입하며 외쳤다.

‘기폭단?’

어휘가 주는 의미는 명백했다.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지만, 이런 놈들이라면 저지르고도 남는다.

떼로 죽어 나가던 환희문도들이 품에서 붉은 단환을 꺼내 삼켰다.

“이런…!”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직감한 마른 비가 강유에게 몸을 날렸다.

그사이 삼십 대로 보이는 매화검수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난자되어 죽었고, 강유는 중상을 입은 홍진설을 끌어안은 채 저항하고 있었다.

마른 비가 강유에게 당도했을 때, 광기에 찬 외침이 터졌다.

“끼요오오옷! 극락의 세계로!”

흰자위를 뒤집은 환희문도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내력이 끓어오르고, 백 명이 넘는 자들의 피부가 쩌저적 갈라지더니 빛이 일었다.

콰콰쾅―!

대폭발이 일어났다.

지표면을 갈아엎을 폭발 끝에 남은 건 새카만 흙먼지와 비처럼 쏟아지는 육편뿐이었다.

“비아야!”

“미카엘이…!”

“미친…! 수하들을 폭사시킨 건가? 저놈들은 아군이고 뭐고 없단 말이냐!”

금복인 일행은 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멀쩡했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폭발에 휩쓸린 자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시간이 흐르고,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쿨럭, 쿨럭…!”

기침소리만으로도 그가 마른 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행은 넘어질 듯이 달려갔고,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멀리 하얀 거체에 쌓여 웅크리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사, 살았다! 살아 있어!”

마른 비의 생각을 읽은 별비는 환희문도들이 단환을 삼킬 때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초패를 문 채 마른 비에게 달렸다.

지금 몸을 보호할 힘이 있는 건 별비와 혈랑조의 힘을 흡수한 마른 비뿐이었고, 둘은 강유와 홍진설, 초패를 끌어안은 채 자연기의 막을 쳤다.

폭발은 전력을 다한 방어를 깨뜨렸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열기에 피부를 그을린 마른 비가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거야. 하아… 진짜 지친다.”

전투화장도 풀려버렸는지 마른 비는 일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들의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뿐인 게냐? 그 많던 사람이 다 죽은 거야?”

금복인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댔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른 쪽을 돌아봤다.

“미카엘! 미카엘 아우는?!”

“여기 있습니다.”

쩔그렁 대는 금속음과 함께 미카엘이 연기를 헤치고 나타났다.

대검을 든 반대쪽 손엔 어깨부터 잘려나간 팔뚝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팔, 손톱이…….”

차유람이 보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기괴하게 긴 손톱.

누구의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끝까지 따라붙는 놈들 때문에 그만…….”

추요운을 잡으려는 그에게 환희문도들이 달려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미카엘 역시 폭발에 휩쓸렸을 게 분명했다.

“판금갑 덕분이군! 아니야, 다치지 않은 게 어딘가.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일세.”

왕문의 다독거림을 끝으로, 일행은 그들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산에 주저앉았다.

* * *

보슬비가 내리는 언덕.

밤하늘에서 둥근 달이 새하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처마 밑에 자리 잡고 술 한 잔 기울이면 바랄 게 없는 밤이건만.

“허억, 헉…….”

괜스레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하늘과 달리, 지상의 광경은 살풍경했다.

핏물이 비를 따라 흐르고, 갈가리 찢긴 인간의 사지가 어지러이 널렸다.

그리고 그보다 곱절은 많은 짐승이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뼈가 박살 나고 급소가 뜯긴 야수들 중엔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기형의 괴수도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선한 눈매에 단단한 체구.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보검을 든 사내였다.

강인한 기운이 엿보이는 그는 숨을 몰아쉬는 여인에게 물었다.

“후우……. 네, 괜찮아요. 대주님께선 다치지 않으셨나요?”

여인의 몸은 피에 젖어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녀를 씻겨 주지만, 한참이나 모자라 보였다.

전쟁 이후 새롭게 편성된 봉검대의 대주 공유립은 그녀 앞에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괴수들의 피다. 지쳤을 뿐, 그녀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어. 정말 대단하구나…!’

와족의 새로운 족장이 여인이라는 걸 들었을 때 의아했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지닌 전대 족장의 뒤를 잘 이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노을이라는 이름의 여인은 와족과 점창이 힘을 합친 괴수 토벌전에서 모든 우려와 의문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충분히 족장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족장님.”

피, 주검, 살점, 시체, 그리고 또다시 피…!

청죽림과 창산 중간에 있는 운현의 산에서, 와족과 점창은 천이 넘는 괴수를 쓰러뜨렸다.

가뜩이나 비정상적으로 강한 운남의 야수들이 미쳐 날뛰자 어지간한 무인들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양측은 손을 잡고 정예들을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여기만이 아니라 운남 각지가 괴수들로 들끓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가 많고, 강한 만큼 그걸 진압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 대주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조금만 쉬죠. 피곤하네요.”

노을은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공유립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다가 멈췄다.

‘이런, 실례를 할 뻔했구나…….’

그녀는 자신보다 강하다.

아니, 지금껏 태어나서 본 모든 여인 중에 가장 강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위태롭다.

공유립은 노을을 볼 때마다 그녀가 염려되고,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그는 몇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노을에게 향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써야 했다.

‘왜? 왜 그래야만 하지? 안 될 것 없잖은가!’

생각해보면 다가가면 안 될 이유 따윈 없었다.

양 집단의 관계와, 그녀의 위치를 생각해 본능적으로 자제해 왔을 뿐.

하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피에 절어 비를 맞고 있는 그녀는 추위에 떠는 작은 새 같았다.

공유립은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만. 그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유령처럼 나타난 사내가 노을에게 가는 길을 막았다.

‘새벽 어스름이라 했던가.’

절정의 은신술을 지닌 그는 와족의 정보 집단인 단목의 수장이자 족장의 호위무사 같은 존재였다.

노을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 중엔 이 사내의 존재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물러서지 않겠다.

최소한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는 닦아주고 싶었다.

공유립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대, 대주님!…”

새로 편성된 응목대의 무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그가 뱉은 말은 공유립을 창산으로 복귀하게 만들었다.

“저, 정사대전이 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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