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하늘을 향해 치솟은 마룡봉.
공유립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응목대원의 보고를 듣자마자 봉검대를 인솔하여 창산으로 복귀했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장문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와족과의 전쟁 이후, 공지량이 무공을 잃고 실각하자 장문전은 몇 년간 쓰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봉검과 운검 장로는 회의 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언덕을 오르는 공유립의 표정은 심각했다.
‘점창은 변했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모든 게 겨우 제자리를 찾고 있어. 기나긴 진통 끝에 이제야 진정한 명문 정파로 거듭나고 있거늘. 갑자기 왜 이런 일들이….’
와족에게 패하고, 점창은 약속대로 무기한 봉문에 들어갔다.
그간의 대외 활동이라고는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수부족들을 돕는 게 전부였다.
처음 몇 년간은 비난과 거친 언사가 쏟아졌다.
얼굴에 침을 뱉거나 칼을 뽑아 드는 자들도 있었다.
점창의 제자들은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뎠다.
시종일관 낮은 자세로 임했으며, 진심으로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성심성의껏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러자 서서히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점창은 와족뿐만 아니라 운남의 다양한 소수부족들과도 교류를 재개하고 있었다.
‘대기에 스며든 자연의 한과 분노라니……. 꿈같은 이야기야. 하지만 내 눈으로 보았다. 믿지 않을 수가 없어.’
미쳐 날뛰며, 비정상적인 힘을 발휘하는 짐승들을 보았다.
와족과 연계하여 소수부족들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운현의 전투를 끝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발적인 습격은 계속되고 있으며, 와족은 은퇴한 전대 전사들까지 쏟아져 나와 운남을 누비는 중이었다.
점창 역시 그리해야 하거늘, 난데없는 전쟁이라니…!
‘말로만 듣던 정사대전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북벌이 끝난 게 얼마 전인데 중원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어지럽게 펼쳐지는 생각을 중단할 때가 됐다.
장문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공유립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전각으로 들어섰다.
“맹주에게 파병 요청이 왔구나.”
공유립이 자리에 앉자, 봉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도, 옆에 있는 운검 장로도 몇 년 새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내공을 잃어버린 결과였다.
점창파 최고수였던 두 사람은 사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로 무공을 폐했고, 지금 그들의 육체적 능력은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존장다운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에 대한 대처가 쉽지만은 않은지 그들의 얼굴엔 고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맹주의 사자가 정도맹에 속한 모든 문파를 방문했어. 형식은 요청이지만, 명령이나 다름없지. 정도맹이라면, 구파일방이라면 거부할 수 없다.”
맹주의 강제 소집령.
마교의 침공이나 사파와의 전면전처럼 큰일이 터졌을 때 사용하는 특별한 권한이었다.
그리고 어조로 보아 대장로들은 거부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무인에게 전쟁이란 명성을 드높일 절호의 기회지만, 지금의 점창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까.
사파와의 싸움보다 짐승의 습격으로부터 소수부족들을 지키는 게 더욱 중한 일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
전쟁을 겪고, 와족과 교류하면서 점창은 정말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저… 대장로님. 봉문 중이라는 걸 피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어떻게든 피할 수가….”
회의장의 끄트머리에 앉은 청년이었다.
아직 주력 검대에 편입되지 못한 그는 이대 제자의 대표로서 와 있는 거였다.
회의의 분위기를 익히고 내용을 전파하기 위해 참석시켰는데, 역시 아직은 미숙한 티가 났다.
공유립은 대장로들을 대신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건 어렵겠구나.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외부에선 우리가 봉문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밝히게 되면 사유가 궁금할 테고, 와족이 드러날 위험이 있지. 회효 장로님의 요청으로 와족에 대한 언급을 일절 자제하는 건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공유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맹수 토벌전을 함께하며 새로이 선출된 와족의 족장께서 봉문을 풀어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앞으로 미래를 함께 걸어가자고 하셨지.”
수년간 주시한 결과, 와족의 수뇌부는 점창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노을은 정사대전이 발발했다는 걸 듣고, 한발 앞서 그들을 배려했다.
중원의 사정은 모르지만 봉문을 해제할 테니 자유로이 활동하라고.
이젠 당신들을 믿는다고.
그리고 설령 와족이 봉문을 해제해주지 않았더라도 다를 건 없었다.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지 않은 이상, 봉문 중이라도 맹주의 소집령에는 응하는 게 원칙이다. 전쟁을 피하고 싶어서 봉문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어찌 됐든 그건 참전을 회피할 사유가 되지 않아.”
의견을 냈던 청년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직 미숙한 그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수뇌부들은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머리를 모았다.
“정사대전이 발발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해묵은 감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시시비비를 따져서 파병을 거절할 명분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호검대주 조광이 묻자, 운검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원인은 명확하다네. 강서성에 있는 피가장의 금지옥엽이 납치됐고, 한 달 후에 엉망이 되어 돌아왔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 이런……. 그게 사파 놈들의 짓입니까?”
그런 끔찍한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백 년간 축적한 힘과 해묵은 원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지레짐작했던 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피가장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다네. 그 어린 것은 정신조차 온전치 못했다고 해. 참변을 당한 데다가, 알 수 없는 약물에 취한 것 같다고 했지.”
“약물… 이라고요?”
운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아를 진찰한 의원에 따르면 환각을 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두려워했다고 하네. 그러다가 결국 제 부모를 찌르고 말았지.”
“그, 그럴 수가…!”
운검은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힘이 드는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피가장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정파의 세력들이 풍운방(風雲幇)으로 몰려갔네. 모든 혐의가 명백하게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거든. 허나 풍운방주는 절대 아니라고, 만약 자신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제 목을 내놓겠다고 항변했네.”
“그것…… 최근 벌어지는 일들과 유사한 형태가 아닙니까?”
조광이 눈살을 좁히며 말했다.
북벌 이후, 천하 각지에서 정파와 사파가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자파의 이익 때문에 그런 경우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풍운방주처럼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건 음모라며, 자신들은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외쳤지만 눈이 돌아간 자들이 들을 리 없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무인들 간의 다툼이었는데, 결국 이런 참상이 터지고 만 것이다.
“화가 난 정파의 세력들은 풍운방을 철저히 부쉈지. 풍운방주는 사지가 잘린 채 정문에 내걸렸어. 문제는 일주일 후에 일어났네. 피가장에서 모습을 감췄던 하급 무사가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여아의 노리개가 들려 있었어. 그자는 여아에게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의 약물에 취해 있었지.”
“마, 맙소사…! 그럼 피가장의 식구가 가주의 딸을?!”
풍운방과 긴밀한 관계지만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여 나서지 못했던 사파의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피가장을 도왔던 정파의 세력은 당황했지만 그냥 당할 리 없었고, 이건 조작된 거라며 칼을 들었다.
강소성 남부가 핏물에 잠기는 건 한순간이었다.
“정파의 세력들은 밀리기 시작하자 정도맹에 도움을 요청했어. 서로가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상황……. 싸움은 시작됐고, 얽힌 문파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정도맹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네.”
문제는 정도맹이 움직이면 사도련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점이었다.
정도맹이 중원의 북부에 입김을 행사한다면, 강남 지역은 사도련이 쥐고 있다.
그리고 강소성으로 가려면 사도련의 영역을 넘어야 했다.
정도맹의 병력이 자신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걸 사도련이 묵과할 리 없었기에 충돌은 필연이었다.
“맹주는 머뭇거리지 않고 병력을 출격시켰네. 그건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어. 정도맹의 병력은 장강을 건넜고, 평원에서 사도련을 마주쳤네. 어지간하면 대화를 해볼 만도 하련만, 맹주는 곧바로 돌격을 명했지. 세간에 알려진 그답지 않게 말이야.”
천검은 대단히 신중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데 그런 그가 다짜고짜 돌격이라니.
피가장의 일부터 여러 부분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서 지원을 요청한 거로군요. 이미 붙었다면, 확전은 피할 수 없을 터. 사도련도 병력을 긁어모을 테니 우리도 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공유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인지 회의장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북벌 이후 중원의 분위기가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홍무제의 요청에 따라 병력을 파견했고, 그건 무림 문파들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죠. 숨죽이고 있던 문파들은 이번 전쟁을 기회로 여길 겁니다. 피바람이 불겠군요.”
공유립의 말에 봉검은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난 개인적으로 천검을 좋아하지 않아.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자야. 직속 세력이 아닌 자들을 위험한 전장에 밀어 넣을 확률이 높지.”
공유립은 봉검의 의중을 읽고 먼저 말했다.
“그렇다면… 장로님들께서는 최정예를 파견할 생각이시겠군요.”
“그래. 파병을 피할 수 없다면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일 게다. 봉검대와 운검대, 호검대를 파견할 생각이다. 유립이 네가 지휘를 맡는다면 안심할 수 있겠지. 그리고 노련한 조 대주가 유립이를 보좌하면 될 게야.”
봉검은 잠시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아울러 규도 이번 전쟁에 참전할 것이다.”
공유립이 놀란 표정을 짓자, 봉검은 손바닥을 들어서 끝까지 들으라는 동작을 취했다.
“본인이 원한 것이다. 봉문 이후 본문은 중원의 사정에 관심을 끊었기 때문에 규만큼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규는 최근 널리 이름과 얼굴을 알렸지. 그 녀석이 함께하는 게 여러모로 좋은 건 사실이야.”
봉검은 안타까운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휘, 그 가엾은 녀석의 조의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거라.”
며칠 전, 공유립이 짐승을 토벌하는 동안 여규는 창산에 복귀했다.
미리 소식을 들은 점창은 최상의 예우로 여휘의 장례를 준비했고, 이번 파견에서 여규를 제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짐작한 여규는 사문을 위해 참전을 결심했다.
너무도 확고한 의지에 봉검과 운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어깨를 다독여줄 수밖에 없었다.
공유립은 여휘를 떠올리며 슬픈 표정이 됐다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여규의 명성이 높아진 걸 언급했다.
“관심을 끊고 있음에도 비아와 규의 이름이 왕왕 들리더군요. 둘 다 몰라보게 성장했나 봅니다.”
그런데 마른 비의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공유립은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시죠?”
운검이 봉검을 힐끗 보더니 대신 말했다.
“묘한 이야기가 들리더구나.”
“묘한 이야기라니, 어떤…?”
“진시황릉에 대한 소문은 들었느냐?”
“아, 네. 갑자기 소문이 퍼져서 무림인들이 몰려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 소문에 혹해 여산에 들어갔던 자들이 몰살한 건?”
“네?! 그게 무슨….”
운검은 염려스런 얼굴이 됐다.
“여산 깊숙이 들어간 천 명에 가까운 사람 중 살아남은 건 만금당의 인부들과 고증자를 도운 일행, 그리고 화산의 매화검수 둘뿐이라고 하더구나.”
“그, 그럴 수가…!”
“외곽에 있다가 간신히 살아나온 자들 중 한 명이 증언했지. 정파가 사파를 기습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데 문제는….”
운검은 믿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비아 그 아이가 사파에 대한 습격을 진두지휘했다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