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 * *
폭발 이후 시야를 가렸던 연기가 빠져나가자 주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전한 사체는 없었다.
부서지고 박살 난 데다 고온에 타버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육편 조각이 즐비할 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살았다는 안도감이 다른 감정을 눌러버린 것일까.
일행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내 잘못이다. 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금복인이었다.
그는 넋 나간 얼굴로 여산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자책이 묻어나는 표정.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이게 왜 금 형의 잘못이란 말이오? 금 형은 그저 낡아빠진 무덤을 발굴한 게 전부요. 여기 모인 놈들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달려든 거지.”
설지굉이 금복인을 위로했다.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철저히 기밀에 부친 발굴 작업이 새나갔다.
시공을 뛰어넘은 주술이 시체를 일으켜 세웠으며, 멸문한 줄 알았던 무림의 공적이 정파와 사파를 충돌시키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
이런 전개를 어찌 예상했겠는가.
사람들을 학살한 건 환희문이며, 군웅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산에 올랐다.
어딜 뜯어봐도 금복인에게 잘못을 물을 순 없었다.
허나 그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벌인 일에 휘말려 죽은 것에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노야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은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걸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미카엘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뒤 금복인을 위로했다.
일행의 따뜻한 말에 금복인이 서서히 마음을 추스를 때였다.
“으음…….”
마른 비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기절했던 막주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일행을 훑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라봤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찌 된 건지 들어야겠어.”
침묵을 깬 건 설지굉이었다.
그는 잿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막주에게 다가갔다.
적에게 생포됐고, 혈도까지 제압된 상황이다.
겁을 먹을 만도 하련만, 막주는 웃었다.
“크큿.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 결과가 결국 이건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허탈함뿐이었다.
“웃어? 네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좀 더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행여나 전 호위가 너를 지켜줄 거라고 기대한다면 꿈 깨는 게 좋을 거야.”
설지굉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뽑았다.
전(前) 점창의 인간 조각가.
특급 살수들이 어떤 고문에도 견딘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지굉은 막주의 입을 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막주는 반대로 설지굉의 엄포가 우스워 보였다.
누구의 생각이 맞는지 대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상황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마른 비가 나섰기 때문이다.
“그만둬, 할아버지. 살막의 특급 살수란 자를 봤어. 여차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살막 최고의 살수라니까 혈도가 막혔어도 자살하는 방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겠지.”
실제로 그랬다.
평생에 걸쳐 키운 살막을 잃고, 산 채로 붙잡힌 막주는 삶을 체념했다.
깔끔히 자결하려 했는데, 마른 비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봤다고? 본막의 특급 살수를 말이냐? 난 수하들이 수왕과 조우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럴 새도 없었다.
마른 비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살막은 운가에게 쫓기고 있었으니까.
마른 비는 막주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사천성 성도에 있는 객잔에서 당신네 살수들과 충돌한 적이 있어. 그 뒤에 그자가 날 쫓아왔지. 사편 갈우영. 그자가 운이령을 살해하는 자리에 나도 있었어.”
막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라고?! 자, 잠깐…! 갈우영이 살수조를 이끌고 뒤쫓던 자……. 그래! 당가와 만금당을 드나든 정체불명의 야만인을 쫓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귀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암습을 하겠다는 걸 끝으로 소식이 끊겼지. 그 후에 운가가 다짜고짜 우릴 치기 시작했어! 설마 그때 그 야만인이….”
마른 비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거 나야.”
막주는 기절할 듯한 표정이 됐다가 부들부들 떨며 마른 비를 노려봤다.
“네, 네놈이구나! 운가가 아니었어…! 갈우영과 살수 여덟 개 조를 전멸시킨 게 너였느냐!”
그 일로 살막의 기둥뿌리가 뽑혔고, 운가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쫓겨 다니기만 했다.
마른 비는 또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그거 내가 한 거야.”
“카아아악…!”
막주는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혈도가 제압된 것도 잊은 듯했다.
갈우영과 살수 칠십여 명의 소식이 끊기고, 갑자기 섬서로 밀고 들어온 운가에게 모든 걸 잃었다.
그저 갈우영 그 멍청한 놈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운가의 적손을 건드렸겠거니 했는데, 원흉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막주는 눈이 돌아가서 덤볐지만, 그가 마른 비를 당할 리 없었다.
복부를 얻어맞은 막주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기었다.
“크, 커헉…! 너, 네놈이…! 너 때문에 우리가 멸문을…!”
마른 비는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꼭 물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 어디서 큰소리를…….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 몰랐지만, 잘됐네. 기회가 되면 너흰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악취.
같은 살수임에도 막주는 사영과 전혀 다른 냄새를 풍겼다.
마른 비는 싸늘한 눈으로 막주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실토하게 만드는 술법 같은 게 있다면 모를까, 네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한번 묻자. 화통달. 청부를 받고 화 할아버지를 죽이라고 지시한 게 너지? 누구야? 그 의뢰인이?”
마른 비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청죽림을 나와 가장 먼저 만난 중원인.
화통달은 살수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살수 조장이 조롱처럼 내뱉은 말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목숨을 구해준 자가, 자신을 청부한 기가 막힌 사연.
환자라면 출신성분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돌본 의원으로서의 일생이 배신당했을 때, 화통달은 몇 날 며칠 동안 넋이 나갔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른 비의 위로에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른 비가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 막주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크크크, 환장하겠군. 그걸 알고 있다는 건…… 괴의를 살린 것도 너냐? 운남에 들어간 내 수하들을 죽인 게 너냔 말이다!”
곧 청부를 완료할 것 같다는 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긴 살수조.
청부에 실패하는 바람에 의뢰자에게 막대한 위약금을 지불하느라 살막은 파산 직전까지 갔다.
그게 전부 이놈 때문이었다니!
그렇다면 살막이 무너진 근본 원인은 전부 수왕에게 있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였단 말이냐! 갈우영, 그놈의 실수인 줄만 알았거늘! 너, 너 때문에 본막이…!”
막주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지만, 마른 비는 웃기지 말라는 듯 쏘아붙였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걸 업으로 삼은 놈이 누굴 탓해?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니까 받아들여. 의뢰인, 말해줄 생각 없지?”
더 이상 말을 늘일 이유가 없다.
운가는 물론이고, 장삼의 복수를 해야 하는 초패와 백원 의원을 위해서도 막주를 살려둘 순 없었다.
마른 비는 손을 쓰기 전에 전흠을 바라봤다.
“…….”
그의 눈가는 떨리고 있었다.
죽어 마땅한 자라고 해도 그게 혈육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흠은 나서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표정으로 막주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살아왔느냐, 살막을 나서며 그토록 당부했거늘 정녕 그 길밖에 없었느냐…….
전흠은 둘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눈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끝이 엉망이 돼버렸지만, 난 내 인생에 만족해. 넌 식구를 버린, 나약한 탈주자일 뿐이야. 너 같은 놈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반면 막주는 전흠을 가족으로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는 싸늘한 말을 던진 후에 마른 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뢰인이 누구냐고 물었나? 어차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당에 선물삼아 이야기해 주지. 천검. 화통달을 죽이라고 청부를 넣은 건 정도맹의 맹주다. 어때? 이제 만족하나? 진실을 안다고 해서 너나 화통달이 뭘 할 수 있냔 말이다!”
마지막 심술일까?
막주는 자신이 죽은 뒤에 혼란이 벌어지길 바라는 듯했다.
그는 도발적인 어조로 마른 비를 자극했다.
호통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웃기지 마라! 그럴 리 없다! 맹주님께서 살수 집단과 접촉할 리도 없을뿐더러 괴의 선배님을 청부했다니! 어디서 감히 세치 혀로 농간을 부리느냐!”
잠자코 있던 강유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막주는 믿든 말든 그건 너의 자유라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
“그거야 네놈들이 알아보면 될 일이지. 안타깝구나. 이번 여산에서의 일로 미루어 보면 흥미진진한 세상이 도래할 듯한데.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전부 고통 속에 뒈지길 기도하마.”
막주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부릅떴다.
‘퍼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의 혈맥이 터진 그가 땅에 엎어졌다.
역시 막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누구의 손에도 죽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시신이라도 묻어주는 걸 허락해 주시길.”
전흠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막주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운가의 인물이 있다면 결사반대를 했겠지만, 그들은 전부 목숨을 잃은 뒤였고, 시신을 운가에 보낸다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될 것이다.
살아 있다면 모를까, 죽은 이상 그렇게까지 할 만큼 운가와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형이 동생을 묻어준다는 데 반대를 할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금복인은 막주를 안고 멀어지는 전흠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다들 내 일을 도와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이토록 많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이.”
그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금당에 돌아가는 대로 보수를 넉넉히 챙겨주겠네. 목숨을 걸고 날 도와줬는데 뭐라도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밖에 해줄 수 없는 게 미안할 뿐이네.”
마른 비는 무슨 말이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애초에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닌걸. 그리고 운남을 나올 때 넉넉히 노잣돈을 챙겨줬잖아. 그걸로 충분해.”
그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맞다! 얻은 게 없긴 왜 없어! 할아버지 덕분에 난 저 밑에서 굉장한 힘을 얻었어! 아마 이번 탐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나일걸?”
왕문도 품에서 검 조각을 꺼내며 말했다.
“간장검의 파편. 나도 원하던 걸 얻었소. 목숨을 건 대가로 이거면 충분하지.”
차유람도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품에 손을 넣었다.
“저도 이거면 돼요. 진시황의 방에서 나오기 전에 하나 슬쩍했죠.”
“어엇! 언제 그런걸…!”
그녀의 손엔 신비로운 빛을 뿜는 광석이 들려 있었다.
서구식이 검을 건드리는 바람에 기관이 발동됐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보물 중에 하나를 들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건 언뜻 봐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물건 같았다.
금복인의 옆에 있던 미카엘도 잔잔히 웃었다.
“연고도 없고 오갈 데도 없는 저를 먹여주고 재워주셨습니다. 노야께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죠. 제가 찾는 것에 대한 정보도 주셨고요. 또한 병마용의 술사가 지닌 힘을 보고, 오래도록 고민하던 부분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이 이상 욕심을 낸다면 염치가 없는 것이겠죠.”
유일하게 얼굴을 찡그린 건 설지굉이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툴툴댔다.
“안 그래 보이는 놈들이 약삭빠르게 제 것은 다 챙겼군. 나만 아무것도 없지 않나. 금 형, 저놈들 줄 돈, 전부 내게 주쇼. 돈이라도 챙겨야지 억울해서 안 되겠어.”
설지굉의 농담 아닌 농담에 금복인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우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과 녹림의 초 호법. 여기 계신 분들에게 부탁이 있네.”
금복인은 결심을 내린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을 함구해줄 수 있겠나. 아니,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들만이라도 ‘진시황릉은 없었다.’고 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