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40화 (340/463)

340화

《찌르륵― 찌륵.

풀벌레 소리가 흐르는 고요한 밤이다.

지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뚫어놓은 틈새로 벌레들의 울음이 들려왔다.

사위를 메운 적막함 속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음…….’

눈앞까지 손을 가져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땅속 깊이 뚫어놓은 참호에는 어둠과 침묵만이 가득했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펴고, 좌우로 흔드는 등 앞을 보기 위해 애썼다.

“뭐 하냐?”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평소 걸음걸이만큼이나 건들건들한 목소리.

사내의 어조는 별 희한한 꼴을 다 본다는 투였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건 나뿐이란 것을.

여기 있는 자들에게 이 정도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리라.

다들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 손을 흔들고, 눈에 힘을 주는 등 난리를 피웠으니 얼마나 우스울까.

나는 부끄러워서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여튼 특이해. 삭월 놈들치고 평범한 놈을 본 적이 없어. 하나같이 이런 인간들만 모아놓는 것도 재주다, 재주.”

이번 말에는 조금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자에게 이런 소릴 듣는 건 억울했기 때문이다.

맛이 간 걸로는 사도련 최고를 다투는 남자가 아닌가.

내가 이를 꾹 깨물자, 사내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어쭈? 표정 봐라? 왜? 띠껍다 이거냐? 잘하면 한 대 치겠네. 어디 한번 쳐봐라, 이 송사리 새끼야. 좁아터진 굴에서 이게 며칠째야? 여기서 질식해 죽느니 새파란 꼬맹이한테 맞아 죽는 게 낫겠다!”

짜증이 극에 달한 말투였다.

나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이자가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자존심이 상한 나는 짓씹듯 내뱉었다.

“치라면 못 칠 것 같습니까? 소문과 달리 엄청 쪼잔하시군요. 거칠긴 해도 사내다운 면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만만하니까 이러는 거죠? 월주님은 물론이고, 월검대주님과 월목대주님, 하다못해 부대주님 앞에서도 설설 기면서.”

앞은 보이지 않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는걸.

그는 매복 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설 긴다고? 누가? 내가? 하…! 부대주 걔는 여자고, 월목대주는 존나 재미없는 인간이잖아!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월검대주는 나랑 친해! 우린 첫 만남부터 바닷바람 부는 평상 위에서 사나이의 술잔을 주고받았다고!”

사내는 귀가 따갑도록 고함을 질렀다.

이제 보니 그냥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소문처럼 답답한 걸 못 견디는 성격인 듯했다.

“그리고 월주는… 그 인간은…… 아, 시발 몰라! 아무튼 이 쥐똥만 한 새끼야! 좆도 모르면서 신경 건드리지 마라! 네 곱상한 얼굴을 내 기분처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수가 있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비행 청소년이 징징대는 것 같다.

이런 자가 사도련 최강의 무투파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라니.

난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쭈? 쌩 까냐? 천인회고 뭐고 이걸 그냥 콱…!”

“크르르르…….”

나지막한 울음이 그의 폭주를 멈추게 했다.

여기 있는 자들, 아니 짐승이니 ‘자’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아무튼 누구보다 답답한 건 저것일 터였다.

비좁은 참호에서 뒤척이지도 못하고 며칠째 웅크리고 있으니까.

투견대주는 움찔하더니 얌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냐? 별비 형님이 닥치라고 하시잖아. 매복 중인데 떠들면 되겠냐, 안 되겠냐? 아, 그나저나 별비야. 너 배 안 고프냐? 나랑 조용히 나가서 토끼라도 한 마리….”

한번 입이 터지니 쉴 틈이 없다.

그러다가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런…! 너무 크게 떠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철중구가 있는 반대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중구가 한번쯤 정신 놓을 줄 알았거든요. 입을 여는 순간 기의 막을 펼쳐서 소릴 차단했으니 지상에선 못 들었을 거예요.”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던 사내.

고검(高劍)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침착했고, 흥분하는 경우도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비교될까.’

속으로 혀를 찰 때, 철중구가 시비조로 말했다.

“헹! 덜떨어진 친구 뒤치다꺼리 하느라 바쁘시겠어? 봉검대주 님께서 친히 기막까지 펼쳐주시고. 조올라게 황공무지로소이다~.”

여규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뭘, 중원행 때부터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누가 들으면 네가 날 키운 줄 알겠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둘을 말린 건 중앙에 있는 사내였다.

“그만들 해. 오랜만에 봤는데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나만 반가운 거야?”

수왕의 말에 둘은 침묵했다.

그러다가 못 참겠는지 철중구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야! 들어봐라, 비아야! 저 의리 없는 새끼가 뭔 짓을 한 줄 아냐! 점창이랑 마찰이 생긴 적이 있는데, 우리 애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고! 내가 대주로 있는 걸 알면서도 말야! 나는 봉검대 애들 보면 칼등으로 치고 기절만 시켰는데, 저 새낀…!”

이것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데면데면하더니 며칠 내내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던 이유가.

철중구는 연인에게 배신당한 여인처럼 외쳤고, 여규도 조곤조곤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매복에 걸려서 포위당한 상황이었어. 뚫지 않으면 우리 측이 위험했단 말야. 내 무기는 검인 데다가 사일검은 찌르기밖에 없잖아. 심지어 투견대가 보통 놈들이냐? 전투불능을 만들지 않으면 시체처럼 일어나서 달려드는데 어떡해?”

여규는 오히려 서운한 투였다.

“그래도 중구 휘하인 걸 알게 된 뒤엔 한 명도 죽이지 않았어. 허벅지에 구멍만 뚫어놨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나는 나름 노력했는데, 중구 저놈은 그것도 모르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철중구가 놀란 듯 말했다.

“정말?”

뭐냐, 저 반응은.

설마 몰랐다는…….

“네가 삼조 애들 몰살한 거 아니었어? 그… 강 쪽에 있던 애들.”

“난 강 쪽에 간 적 없어, 중구. 골짜기에서 포위돼서 싸웠지.”

“진짜?”

그럼 사일검의 상흔은 뭐냐, 사일검은 사문에 전수해서 지금은 나만 쓰는 거 아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어, 시발. 미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혼자 삐쳐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서운한 게 그거야. 네가 날 친구로 생각했으면 나한테 정확히 묻고 화를 내야지, 다짜고짜….”

동창회에 온 기분이었다.

중원을 뒤집어 놓은 놈들과의 한판 승부라는 긴장감은 날아가고, 서운했던 부분을 풀며 옛날이야기를 하는 노땅들만 있었다.

“캬아~ 논공행상 기억나지? 그때가 진짜 좋았는데! 아, 맞다! 전룡 이 시벌 새끼가 얼마 전에 야밤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수라의 이야기도 나왔다.

“중구. 운남에서 제대로 까였다던데 연애는 해?”

철중구의 연애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살신전에선 진짜로 죽을 뻔했지. 비아야, 인마. 내가 독단적으로 너 지원하러 갔다가 련주님한테 뒤지게 처맞고 삼 일 동안 대가리 박은 거 알아?”

나중엔 임무도 잊고 그들의 수다에 빠져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수왕을 주축으로 하여 굵직굵직한 전쟁에는 빠짐없이 참전한 자들이었다.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 무인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만한 내용이었기에 아직 경험이 부족한 내가 정신을 놓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또 여행 다니자. 나와 중구는 조직에 매여서 일하느라 바빴으니까 비아 네가 좋은 곳을 가장 많이 알겠지. 다닌 곳 중에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아?”

여규의 질문에 수왕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좋은 곳이 생각난 듯 말했다.

“멋진 곳은 진짜 많은데……. 아, 북방 초원! 너희 아직 못 가봤지?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야. 진짜 좋더라.”

“초원이라…….”

제국 초창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거긴 아직도 원의 잔당들 때문에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들이라면 마실을 나가는 심정으로 돌아다녀도 무방할 터였다.

내가 오래전에 떠나온 그곳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을 때, 셋의 고개가 돌아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왔다.”

수왕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돌변했다.

동네 아저씨들처럼 떠들던 자들이 무지막지한 기세를 뿜었고,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약쟁이 새끼들도 함께다! 야! 코흘리개! 너 월주한테 가서 계획대로 움직이라고 전해! 여긴 우리가 맡는다!”

철중구가 몸을 날리며 외쳤다.

내가 참호에서 나왔을 때, 수왕을 필두로 한 세 명은 경이적인 돌파를 선보이고 있었다.

“커허허헝!”

백색 섬광이 날아오르는 걸 뒤로 하며, 나는 보고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혼세록, 천인회 토벌전

「수왕 마른 비, 고검 여규, 투도 철중구」

삭월 월목대원 지연우 저

여산을 떠나온 지 칠 일.

마른 비는 섬서성 북부, 자장(子長)의 객잔에 앉아 있었다.

웅성, 웅성.

객잔은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활기가 넘쳤다.

중원 남부를 여행할 무렵, 원 치하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

비로소 시대가 바뀌었다는 게 실감나는 광경이었다.

‘보기 좋네.’

사람들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주원장은 민심을 얻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고, 그건 백성들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의 욕망, 즉 군림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면 바랄 나위가 없다.

마른 비는 과거와 달리 주원장이란 인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그의 치세가 원나라 시절보다는 낫다는 점을 위안 삼기로 했다.

“들었나? 정사대전이 벌어졌다는구먼.”

하지만 분위기가 밝은 건 백성들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평범한 민초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

서너 명씩 모여 앉은 무림인들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정도맹이 사도련과 크게 한판 붙었다는군. 듣기로는 맹주가 직접 병력을 인솔하여 장강을 넘은 모양이야. 사도련주가 나왔다는 소문도 있어.”

“천검에 패군까지?! 북벌이 끝난 게 얼마 전인데 벌써 움직이는 건가!”

그야말로 전격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간 천검의 행보에 놀라워했다.

“천하 각지에서 무인들이 모여들고 있어. 이대로라면 확전을 피할 수 없을 걸세.”

“음……. 안 그래도 크고 작은 다툼과 기묘한 일들로 중원이 시끄러운데, 정도맹과 사도련까지…….”

무림의 정세에 관한 논의.

마른 비는 무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진시황릉에 대한 소문은 들었나?”

“그거 가짜라면서? 고증자, 그 미친 늙은이가 제 일을 인정받고 싶어서 농간을 부린 거래. 철혈검 강유가 증언했네.”

“괜히 놀아난 자들만 불쌍하게 됐지. 못해도 천 명 이상이 죽어 나갔다는군.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려서….”

강유가 발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금복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만금당까지 욕을 먹는 상황이라 마냥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금복인의 의도대로 더 이상 피가 흐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데… 희한한 이야기도 들리더군.”

“뭐가 말인가?”

“수왕이 고증자를 도우러 갔다는 건 들었지? 여산에서 정파와 사파가 붙었는데, 수왕이 사파에 대한 습격을 주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라고?! 북벌의 영웅이?! 아니, 대체 왜?!”

사내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마른 비를 흘깃거렸다.

난데없는 말에 멍해 있던 마른 비가 정신을 차렸다.

‘아차…!’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하게 입었지만, 마른 비의 독특한 외모는 어딜 가든 눈길을 끌었다.

사내가 긴가민가한 눈초리로 보자, 마른 비는 얼른 일체화를 발동해서 주변 풍경에 녹아들었다.

“음……. 아닌가? 하긴 그런 거물이 이런 데서 어정거릴 리가 없지.”

고개를 저은 사내는 말을 계속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 뒤늦게 여산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자가 증언했다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야. 아무튼 엄청나게 죽어 나갔어. 만금당은 지탄을 피할 수 없을 거네.”

‘저게 무슨 소리야? 누가 저런 헛소문을….’

마른 비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갈 때였다.

또 다른 사내가 충격적인 소릴 꺼내는 바람에 마른 비의 사고가 멈췄다.

“최근의 가장 큰 화제는 그게 아닐세. 사천이 난리가 났어.”

“사천? 거긴 또 왜?”

사내는 일행을 슥 둘러본 뒤에 말했다.

“사천당가. 그들이 천북제일무가라는 운가를 멸문시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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