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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41화 (341/463)

341화

‘멸문? 운가가 멸문했다고?!’

정사대전이 일어났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들을 쳐다봤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운종혁과 운가의 정예가 몰살한 게 일주일 전이다.

사천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지금쯤이면 운가가 비보를 듣고 슬퍼할 시기였다.

한데 멸문했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퍼졌다?

이건 그들이 목숨을 잃기 전에 들이쳤다고 봐야 한다.

가주와 세가의 정예들이 가문을 비운 사이에 행해진 습격.

당가는 흔히들 말하는 빈집털이를 한 게 틀림없었다.

‘왜? 같은 정파잖아? 혈육을 잃고 복수 중인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내는 마른 비의 의문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당가가 독을 사용한 후에 엄청난 비난을 받은 건 알고 있지?”

“알다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래. 그것 때문에 당가는 오대세가에서 제외되고 정파와 사파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았지. 전대 가주가 협검과 함께 황성에 쳐들어가고, 북벌에서 당가가 큰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건 여전했을 거야.”

“아, 얼른 핵심을 얘기해! 다 아는 걸로 뜸 들이지 말고!”

사내는 술잔을 툭툭 치며 따라보라는 시늉을 했다.

“하, 그 새끼 참! 자, 마셔! 비지 않게 콸콸 따라줄 테니 얼른 이야기나 풀어봐!”

사내는 안달이 난 일행을 훑으며 흡족하게 술을 들이켰다.

“크으~! 좋구먼. 이건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운가가 그동안 당가를 집요하게 괴롭혔나 봐.”

“운가가 당가를? 그럴 리가……. 같은 정파잖아? 둘 다 정도맹 소속이고….”

“쯧쯧, 이런 단순한 친구를 봤나! 천·북·제·일·무·가. 이게 뭔 뜻이겠냐? 천(川)의 북쪽에서 최고란 뜻이잖아! 왜 사천제일이 아니겠어?”

“그거야….”

“그래! 당가 때문이지! 썩어도 준치라고, 욕을 그렇게 먹고 쇠락했어도 사천제일의 가문은 당가인 거야!”

말인즉슨 운가가 사천제일가의 자리를 넘보며 당가를 줄기차게 괴롭혀 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질 말도 짐작 가능했다.

북벌을 계기로 비상한 당가가 그간 참아왔던 설움을 터뜨렸다는 것.

얼핏 듣기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운석이와 영령이가 운이령을 싫어했었지. 그가 자주 시비를 걸었댔어.’

하지만 그것만으로 넘겨짚기엔 무리가 있다.

감정이야 얼마든지 쌓일 수 있지만, 고작 그 정도로 같은 진영에 속한 가문의 씨를 말린다?

정면 대결도 아니고, 정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심지어 지금은 정사대전이 벌어지는 중이고, 마른 비가 보기에 차기 가주가 되었을 당문휘는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이어진 사내의 말을 듣고 입이 벌어졌다.

“북벌이 끝나자마자 천수사의 직계가 가주의 자리에 올랐대. 녹수대주 당건휘. 이번 북벌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면서?”

‘당건휘? 아저씨가 아니라?’

이건 정말 의외였다.

무공, 성품, 인망, 지휘력 모든 면에서 당문휘는 당건휘보다 뛰어났다.

당가는 핏줄을 중시하는 가문이라 직계와 방계의 차이가 크다고 들었지만 세가의 대부분이 당문휘를 차기 가주로 인정했고, 전대 가주인 당천기 또한 그를 후계로 낙점했다고 했다.

그건 당가에 직접 방문했을 때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세가의 분위기가 당문휘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양보한 건가?’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당건휘는 가주가 되기 위해 기를 썼고, 가주의 임종 후 분란이 이는 걸 원치 않은 당문휘는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그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당건휘가 이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줄은.

‘아저씨가 그런 일에 찬성했을 것 같진 않은데.’

마침 사내들도 그런 내용을 주고받았고, 마른 비는 그들의 대화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게 중론이야. 은비대주와 세가의 중신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지 않나. 당건휘는 북벌에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주에 막 취임한 탓에 세가에 남았거든.”

“은비대주와 원로들이 정사대전에 참전한 사이에 일을 벌였다? 그럼 일부러 그들을 내보냈다고 봐야 되겠는데?”

사내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건휘는 이미 운가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정도맹에서의 입지를 굳힐 겸 일부러 반대할 만한 자들을 모조리 파견한 거야.”

사내는 술을 한 모금 머금고 말을 이었다.

“맹주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으니 파병은 하는데, 대부분 주력은 남겨두지 않나. 그런데 당가는 은비대는 물론이고 원로원까지 내보냈어. 과한 측면이 있지. 그래서 다들 그렇게 추측하더군.”

“성도의 거리에는 운가가 당가를 괴롭힌 정황이 벽보로까지 나붙었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손을 쓴 거겠지. 운가가 거짓이라고 항변했지만, 어버버 하는 사이에 힘으로 뭉개버렸어.”

일행 중의 한 명이 기가 막힌 듯 탄식했다.

“허어…. 황제가 당가에 개국공신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했다면서? 세가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일 때 밀어붙인 거군. 하지만 멸문이라니……. 그런 건 사파 놈들이나 할 법한 짓이 아닌가.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왜 이런 초강수를….”

연달아 채워지는 술잔을 들이켜며, 대화를 주도하는 사내가 말했다.

“그간의 울분을 갚는다는 건 구실일 뿐이야. 노리는 건 뻔하지. 천북표국. 만금당과도 거래를 튼 운가의 자금줄이 아닌가. 공들여 키운 거위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아예 씨를 말린 거야.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겠고.”

“으음……. 그럴듯해. 그게 사실이라면 당가의 새로운 가주는 무서운 자로군. 젊어서 그런가, 야심만만하고 욕망에 충실해.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 냉혹하기까지 하군.”

마른 비는 사내들의 대화를 들으며 금귀진의 말이 떠올랐다.

도강언에서 마주친 날, 운가가 적극적으로 자리를 마련하여 사천의 후기지수들이 모였다고 했다.

그래서 청성파의 영송과 아미파의 월연, 만금당의 금귀진이 운이령과 만난 것이다.

운이령이 자신에게 혼쭐이 나고 사라지자, 금귀진은 말했었다.

그는 별로지만, 천북표국이 하도 끈질기게 요청하여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일로 얽혀 있는 사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고.

사내들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당건휘는 그 천북표국을 노린 모양이었다.

‘그 사람, 수년간 이를 갈고 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멸문이라니……. 너무 지나쳐.’

운가와 딱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두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마른 비는 한동안 잊고 있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송이 형과 연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청성파 최고 기재라는 영송과 아미파의 차기 검후 월연.

둘 다 구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삼 년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구파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안다.

마른 비가 자연스럽게 같은 구파 소속인 점창을 떠올릴 때였다.

한참이나 영양가 없는 말을 늘어놓던 사내가 귀를 쫑긋 세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점창파 이야기는 들었나?”

“점창? 운남 촌구석에 있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조용했잖아. 여 대협의 부고 소식 말고는 딱히….”

“그렇지. 구파라는 걸 잊을 만큼 죽은 듯이 지내왔지. 그래서 쇠약해졌나 싶었는데, 아니었어! 운남에서 나오자마자 귀주의 사파 문파 세 개를 박살 냈다더군!”

마른 비의 고개가 아예 그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 왜, 수왕과 함께 이름을 알린 여규라는 자 있잖나. 여 대협의 아들! 그자와 공유립이란 자가 엄청난 무위를 선보여서…!”

도저히 안 되겠다.

여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른 비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사내들이 있는 탁자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위압적인 덩치의 이족 청년이 다가오자 사내들은 긴장해서 무기를 움켜쥐었다.

“뭐, 뭐냐!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일체화를 통해 기운을 평범하게 가라앉혔지만, 제대로 마주 보자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이 사내들을 덮쳤다.

무기를 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른 비는 자연기를 더욱 부드럽게 조절하며 탁자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어. 점창에 대한 이야기, 자세히 해줄 수 있을까?”

마른 비는 금복인에게 받은 은전 하나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놨다.

‘점창이 선전하고 있구나!’

전쟁 이후 창산을 방문했을 때,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쉬지 않고 단련해온 그들은 그동안 축적한 역량을 폭발시킨 듯했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위를 선보이고 있다네. 파죽지세. 중원 남서부의 사파 놈들은 점창파 때문에 초비상 상태라고 하더군. 그들의 진격로에 있는 방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해.”

사내는 벌게진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곁눈질로 마른 비를 흘깃거렸다.

“크, 커흠! 그런데 자네, 진짜 수왕이 아닌가?”

마른 비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아니라니까. 그런 사람이 이렇게 평범할 리 있겠어? 그리고 그 사람은 백호를 데리고 다닌다며? 둘러봐. 범은커녕 고양이도 없지.”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평범… 한 건 맞는데, 그게 또 평범하지 않단 말이지. 내공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뭔가 함부로 하기 힘든…. 소문으로 들은 외모와도 비슷하고, 여산에서 나왔으면 지금쯤 여기에….”

“응. 아니야, 아저씨.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릴없이 돌아다닐 리 없잖아. 이야기나 마저 해봐.”

사내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합석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사내는 정사대전과 같이 굵직굵직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성 단위에서 일어난 분쟁까지 알고 있었다.

북경을 나와 진시황릉을 다녀온 사이, 천하는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원래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위해 개방의 분타를 찾을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마른 비는 흡족한 얼굴로 사내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어어, 또? 크음… 딸꾹! 보자, 또 뭐가 있을까……. 아! 황실에선 상우춘 대장군이 명의 위세를 드높이고 있네. 태원(太原)에서 몽골 장군 확곽첩목아를 대파하고, 전녕에서 원의 승상 야속(也速)을 토벌하여 개평을 함락시킨 건 알지? 곧 흔주(忻州)까지 진격할 거라는군!”

자신이 서쪽으로 이동할 동안, 상우춘은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속으로 그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고마워. 잘 들었어. 아저씨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

마른 비는 주먹을 내밀었고, 사내는 얼떨결에 마주 댔다.

“술 적당히 마시고, 항상 건강하길 바라.”

마른 비가 사라질 동안, 아리송한 얼굴로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 질렀다.

“바, 방금 그거…!”

“왜애~? 뭔 일인데?”

완전히 눈이 풀린 일행이 사내를 올려다봤다.

“수왕이야! 방금 그 사람, 수왕이었다고!”

“취했냐? 뭔 헛소리야. 아니라잖아아~.”

사내는 마른 비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수왕식 간이 인사법! 남부에서 유행하는 그거란 말이다! 이런, 젠장! 한심한 새끼…! 자칭 정보통이란 놈이 수왕을 코앞에 두고도 몰라보다니…!”

사내는 자신의 눈을 빼버릴 것처럼 절규했다.

객잔을 나온 마른 비는 관도를 따라 북상했다.

빠르지만, 여유 있게.

이번에는 일체화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마른 비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수준급의 무림인들이 의아해 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그때마다 마른 비는 일체화의 경지를 높여서 그들의 이목을 떨궈냈다.

숙련된 추적자가 작심하고 쫓지 않는 이상 그를 찾아낼 사람은 없을 듯했다.

“흠. 제법 쌀쌀하네.”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해를 넘기고, 마른 비는 스물두 살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했다.

북경으로부터 북서쪽에 위치한 요새이자 관문.

여씨춘추에 천하구새(天下九塞)라고 기록된 난공불락의 아홉 요새 중 하나,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 불리는 거용관(居庸關)에.

“와~ 진짜 어마어마한데?!”

북경에서 북방 초원으로 가는 관문이자, 무수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요새는 명성을 뛰어넘는 위용으로 마른 비를 맞이했다.

마른 비는 입을 헤 벌린 채 위대한 건축물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릴 틈이 없어. 빙궁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

마른 비는 품에 손을 넣어 고이 접어둔 지도를 확인한 후 거용관의 입구로 다가갔다.

“멈춰라. 웬 놈이냐?”

관문을 지키던 병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마른 비는 일체화를 풀어서 정체를 드러내며 말했다.

“마른 비, 아니, 건우라고 해. 위로 올라갈 일이 있어서 왔어.”

착각일까?

경비병의 눈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매서운 기세를 줄기줄기 뿜었다.

“이민족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위로 올라가?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황실의 허가를 받은 자들만 장성을 넘을 수 있다는 걸 마른 비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통과하기 위한 절차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고, 마른 비는 그 수순을 밟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체를 드러낸 것인데, 경비병의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과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 없어. 신분 검증 같은 게 필요하다면 받을게. 혹시 윗사람에게 내 이름을 전해줄 수 있을까? 그럼 아마….”

마른 비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는 경비병의 표정.

그는 자신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수왕이라는 되도 않는 별호가 붙은 야만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왜, 정체를 밝히면 거용관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사내는 마른 비의 목젖에 창을 겨누며 말했다.

“북벌에서의 공. 그걸로 이 만행에 대한 처벌을 상쇄하겠다. 당장 여기서 꺼져라. 다섯을 셀 동안 머무르면 즉참에 처할 것이다.”

사내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창을 찔러 넣어 마른 비의 목젖을 관통시킬 기세였다.

거친 반응에 놀란 것도 잠시, 마른 비는 침착하게 사내를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신… 논공행상 때의 그….”

경비병의 눈빛이 꿈틀거렸다.

“……북벽. 북벽이란 남자의 수하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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