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얼굴은 기억에 없지만, 이 기도는 낯익다.
논공행상이 시작되기 직전에 등장한 사내들.
북벽이란 사내를 중심으로 뭉친 그들은 발톱을 숨긴 늑대 무리 같았고, 사선을 넘나든 자의 흉험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그토록 인상적인 자들을 잊을 리 없었다.
“북벽이란 사람,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어. 당신도 그때 같이 있었어?”
거듭된 질문에도 사내는 침묵했다.
뭐라고 답할지를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마른 비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같이 있었다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거야. 필요한 절차가 있다면 따를게. 그러니까 통과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줘.”
마른 비가 목젖을 겨눈 창날을 밀어낼 때였다.
경비병 사내가 창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말하지 않았나. 당장 여기서 꺼지라고.”
“…….”
사내는 순조롭게 통과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좋게 대화로 풀려던 마른 비의 표정이 굳었다.
“이해가 안 되네. 우리가 감정 상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왜 이렇게 날카롭지?”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사납게 뜬 눈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요할 뿐이었다.
이쯤 되자 마른 비의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타당한 이유 없이 싸우고 싶지 않아. 마지막으로 물을게. 통과하기 위한 방법을 말해.”
마른 비는 목젖에 닿은 창날을 움켜쥐었다.
맨손으로 날을 쥐자 사내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곧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피가 흐르기는커녕 창날이 종잇조각처럼 구겨졌기 때문이다.
챙강!
맑은 쇳소리와 함께 철창이 부러진 순간, 자연기가 거용관을 뒤덮었다.
“합당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창을 겨눈 거. 또 그러면 봐주지 않을 거야. 이제 말해. 왜 이러는 건지. 그리고 통과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작심하고 일으킨 기운이다.
진시황릉에서 자연기의 정수를 녹여낸 이후, 마른 비의 힘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거대문파 장로급의 고수라도 뒷걸음질 쳤을 텐데, 사내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봤다.
‘……투지? 아, 혹시…!’
살기가 아니다.
사내가 뿜어내는 건 순수한 투기였다.
마른 비는 그제야 사내가 왜 이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 나랑 싸워 보고 싶은 거야?”
스물 초반.
마른 비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이다.
그의 눈빛에서 철중구에게 달려들던 함윤의 호승심이 겹쳐 보였다.
‘아냐. 그것만이 아닌데…….’
단순히 마른 비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맹신하는 뭔가가 훼손당한 것만 같은 눈빛.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짐작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른 비가 말했다.
“간절히 싸우고는 싶은데, 본분이 군인이고, 상대는 황제와 가까운 민간인. 황실의 허가 없이 장성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빌미로 도발한 거네. 먼저 손을 쓰도록. 맞지?”
사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곡을 찔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 가서 거짓말은 못할 남자였다.
불쾌했던 감정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마른 비는 손을 까딱였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나랑 싸우고 싶은 이유가 궁금하지만… 그냥은 얘기 안 하겠지? 들어와. 눕고 이야기하자.”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자존심을 건든 것 같다.
사내는 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이를 깨물더니 창을 휘둘렀다.
“차아아아앗!”
그의 기합은 발악에 가까웠다.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을 떨치기 위한 함성.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내는 전진했다.
‘용감해. 그리고….’
마른 비는 사내의 돌진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창대에는 중보병을 통째로 날릴 만한 힘이 담겨 있었지만, 마른 비에게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능숙해.’
상대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용감할 뿐만 아니라 싸움에 능숙하다.
놀랍게도 사내는 초원의 정예라는 지구르에 비견할 만한 강자였다.
하지만 마른 비는 지구르 수십 기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남자였다.
터엉―!
마른 비는 선 채로 사내의 일격을 받아냈다.
휘두른 창이 잡힌 건 처음인지, 사내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빈말이 아니라 당신은 강해. 그래도 날 쓰러뜨릴 순 없어. 그러니까….”
마른 비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춰야 했다.
사내가 곧바로 창을 놓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행동에서 그가 무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병기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중원의 무인들은 무기가 잡힌 상황에서 이토록 빠른 판단을 내리진 못하니까.
“차합!”
사내는 오른손으로는 마른 비의 멱살을, 왼손으로는 어깨 부근 옷깃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뒤돌며 허리를 굽혔다.
상대를 들어서 메치기 위한 동작.
하지만 이번에도 힘의 차이는 두드러졌다.
“진짜 능숙하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이 한 수로 넘어갔을 거야.”
사내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을 썼지만, 마른 비는 요지부동이었다.
“크윽…!”
그래도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절박함마저 묻어나는 얼굴로, 마른 비의 가슴팍을 밀쳤다.
“카합!”
균형을 흔들고, 다시 한번 메치기를 시도했다.
오른 다리까지 걸며 힘을 썼지만 마른 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이거….”
예전에 겪었던 기술이다.
야투에서 차우라는 자가 선보인 박투.
근접전을 위한 초원의 체술, 부흐였다.
“으아아아!”
다양한 동작들이 연달아 나왔다.
어깨로 하체를 밀고,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금을 후려 찼다.
팔 한쪽을 붙잡고 있는 힘껏 당기다가, 관절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다하다 안 되니 종국엔 날카롭게 세운 손날로 눈을 찔러왔다.
“이봐. 적당히 해. 이건 좀 그렇잖아.”
눈 찌르기까지 맞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른 비는 사내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아래로 꺾었다.
우두둑―! 소리가 나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사내의 투지는 혀를 내두를 만했다.
팔이 뒤틀린 방향으로 공중제비를 돌아서 손목을 풀어낸 그는 곧바로 발차기를 날렸다.
턱을 노리는 한 수.
마른 비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이마로 발끝을 들이받았다.
우두두둑―!
힘을 조절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했다면 발가락이 산산조각 났으리라.
발목이 꺾이고 발가락 서너 개가 골절된 그는 그제야 승부를 포기한 듯 주저앉았다.
“으, 으으윽…!”
승산만 보인다면 발 한 쪽이 아작 나더라도 또 달려들었을 거다.
마른 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섭. 그만해라.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눈길을 돌리자, 준수한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서른이 조금 넘은 듯한 그는 학사풍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척 봐도 먹물 깨나 먹은 듯했다.
마른 비의 눈이 이채를 띤 건 외모와 기질의 괴리 때문이었다.
‘이 사람… 타고난 싸움꾼이야!’
방금 제압한 청년이 전장에서 나고 자란 군인이라면, 이자에게선 중구나 함윤과 같은 싸움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또한, 거친 기질 속에 노련한 장수의 관록이 묻어났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모든 게 차분한 분위기 속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싸움꾼의 본능을 이성과 교양으로 억누르고 있는 모습.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사내였다.
“허어… 간파당했나?”
사내의 말에 마른 비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눈빛만 보고도 자신의 본질이 간파당한 걸 알아챈 것이다.
그는 마른 비가 놀란 게 기꺼운지 멋들어지게 웃으며 포권했다.
“군일. 거용관의 성문 수비를 책임지고 있지. 명성 자자한 수왕을 만나게 되어 반갑군.”
사내는 번쩍이는 눈빛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리고 은근히 투기를 쏘아왔다.
마른 비는 투기에 담긴 기운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절대 여규나 철중구의 아래가 아니란 것을.
“말로는 반갑다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은걸. 벼르고 있었는데 잘 만났다는 투인데?”
요섭이란 사내와 대결할 때처럼 여유를 부렸다간 낭패를 보리라.
마른 비는 몸의 중심을 낮추며 자세를 잡았다.
“시간 끌지 말자. 들어와.”
그러나 군일이란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지만, 들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라. 순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호전적인 면도 있군. 마음에 들어.”
군일은 더욱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명색이 성문을 담당하는 관군인데 민간인에게 연이어 칼을 들이대서야 쓰겠나. 요섭을 꺾은 걸로 충분하네. 녀석이 패한 이상 더 나설 자는 없을 거야.”
군일의 말처럼 동료로 보이는 자들은 노려볼 뿐 칼을 뽑지 않았다.
내키진 않지만 요섭의 패배를 깔끔히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 말이랑 행동이 왜 이렇게 달라? 당장이라도 등에 멘 대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데. 확실히 해. 할 거야, 말 거야?”
군일의 미소가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척 봐도 갈등하는 눈치였다.
검 끝에 살아가는 자로서 강자와 붙어보고 싶은 마음과, 군인이자 지휘관으로서 자제해야만 하는 입장.
그의 손가락이 꿈틀대는 걸 보며, 마른 비는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로 했다.
“싸워보고 싶지? 그럼 참을 필요 없어. 들어와. 당신이 군인이라는 걸 이용해서 곤란하게 하진 않을 테니까.”
굳었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학사 같이 잔잔하던 눈동자에 힘이 깃들었다.
군일은 억눌렀던 투기를 해방하며 말했다.
“후후.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한 수. 딱 한 수만 겨뤄보도록 하지.”
등 뒤로 올린 오른손이 대검의 손잡이에 접근했다.
그리고 검파(劍把)를 움켜쥐는 순간, 군일의 자세가 사선으로 낮아졌다.
“절검(切劍).”
스강―!
대검이 눈부신 속도로 뽑혀 나왔다.
검을 뽑고 자세를 취하리란 마른 비의 예상을 비웃듯 군일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절정에 이른 발검술(拔劍術).
거기엔 대기를 갈라버릴 듯한 패력이 담겨 있었다.
“합!”
마른 비의 왼발은 이미 진각을 밟은 뒤였다.
발끝에서부터 가동한 회전이 전신의 뼈와 관절을 거치며 배가된다.
대지에서 끌어올린 자연기와 회전이 오른 주먹에 담긴 순간, 거암을 가루로 만들 일권이 뿜어졌다.
“진(眞), 바위 부수기.”
투콰카캉!
폭음과 공진이 성문 앞을 뒤흔들었다.
뒤이어 반으로 부러진 검이 하늘을 날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간 검편은 날카로운 굉음을 흘리며 거용관 성벽에 꽂혔다.
푸캉―!
흙먼지가 휘날리고, 돌가루가 떨어진다.
군일은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손아귀를 털며 자세를 풀었다.
“음……. 역시 안 되나.”
패배를 예상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더없이 후련해 보였다.
군일은 고개를 들어서 성문 앞 천장에 꽂힌 검을 올려다봤다.
“마음에 드는 검이었는데 아쉽게 됐어. 그나저나 국가의 기물을 파손해 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군일은 시선을 내려서 마른 비와 눈을 맞췄다.
“이왕 넘어가는 거, 저것도 없던 일로 해주게나. 자네와 우리 말고는 본 사람이 없으니 자네만 모른 척 해주면 돼.”
천생 싸움꾼으로 타고난 자가 학사의 풍모와 자제력까지 갖췄다.
게다가 둥글둥글하게 일을 처리하는 유연함까지.
보면 볼수록 흥미가 이는 사내였다.
마른 비는 권갑을 타고 전해지는 알싸함을 느끼며 말했다.
“걱정 마. 치사하게 아저씨한테 이르거나 하진 않으니까.”
“아저씨?”
군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마른 비가 아차 하는 얼굴로 웃었다.
“아, 입에 붙어버려서……. 주원장 아저씨 말야.”
“……?”
군일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다가 뜨악한 얼굴로 북경 쪽을 가리켰다.
“……그 주원장이 설마 저 주원장, 아니, 황제 폐하를 말하는 건가?”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군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아저씨라니……. 무례하고 불손하지만, 자네는 한족이 아니니까……. 폐하께서 허하셨겠지만, 신하된 자로서 모른 척하는 건……. 아냐,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지. 민간인에게 칼을 뽑았다는 걸 은폐하는 게 가장 중요해.”
사내는 결정을 내린 듯 탁하고 손바닥을 쳤다.
“진짜 일러바치면 안 되네. 나 여기서도 해고되면 갈 데가 없단 말이야. 빡빡하긴 해도 우리 대장만 한 상관이 없거든. 부하들도 마음에 들고. 알았지?”
혼자 중얼대는 사내가 웃겨서 킥킥댈 때였다.
마른 비는 엄청난 시선이 쏘아지는 걸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
그건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뻗은 성벽과, 하늘을 떠받치듯 웅장하게 버티고 선 관문.
그 위에 있는 삼층 전각에서 한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른 비는 등줄기를 훑는 전율을 느꼈다.
‘엄청난… 강자!’
존재하는 것만으로 남북을 절단하는 장벽이 되어버린 사내.
초원의 맹자들이 일인군단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남자였다.
북벽 패문강.
남쪽에서 올라온 전사와 북쪽을 지키는 무장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