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
마른 비는 한동안 패문강과 말없이 눈을 맞췄다.
성벽 아래에 서 있는 마른 비와 전각 위에서 내려다보는 패문강.
두 사람의 조우는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에게 묘한 기대감과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음……. 나오셨소?”
정적을 깬 건 군일이었다.
다른 병사들이 선망과 경외를 담아 패문강을 바라보는 데 반해, 그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군일은 어떤 이유에선지 조마조마한 눈으로 패문강을 보고 있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장? 오해 마시오. 섭이가 먼저 시비를 건 거요. 나도 휩쓸려서 한 수 주고받긴 했는데 잘 마무리 됐으니 대장까지 나설 필요는….”
황급히 말을 쏟아내던 군일이 움찔했다.
패문강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각의 난간을 딛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쿠우웅―!
운남의 고목보다도 높은 위치.
패문강이 착지한 지면엔 발자국이 패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운기하라.”
그는 뛰어내리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응?”
마른 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전을 치르며 기운이 소진됐을 테지. 운기하고, 만전을 갖춰라.”
패문강은 착지한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태산 같은 기운을 내뿜으며 마른 비를 응시했다.
“하, 하하하.”
이런 인간은 또 처음이다.
통성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싸울 거냐고 묻지도 않으며, 싸우는 이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았다.
‘한판 붙기 전에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라.’
패문강은 마른 비의 의사 따윈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군일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어허! 안 되오! 대장은 장군이잖소! 나 같은 부장이나 섭이 같은 졸병도 아니고……. 곧 서 장군님께서 당도하실 텐데 무슨 경을 치려고…!”
“졸병…….”
요섭이 인상을 찌푸리고, 마른 비는 이채를 띠었다.
‘서 장군?’
서 씨 성을 지닌 장군이 서달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왠지 그를 말하는 것 같다.
마른 비는 군일의 표정을 보며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나를 염려하고 있어?’
군일이 패문강을 말리는 건 장군이 민간인에게 칼을 휘둘러선 안 된다는 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마른 비가 다칠까 봐 염려되어서였다.
황제와 친하고, 서달과도 가까운 그에게 중상을 입힐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하, 그렇단 말이지?”
마른 비는 오기가 치밀었다.
요섭이란 사내는 가볍게 물리쳤지만, 군일과 붙었을 땐 제법 기운을 썼다.
실리를 생각하면 자연기를 회복하는 게 맞겠지만, 마른 비는 그러기 싫었다.
그리고 걸어온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었다.
“문제없어. 바로 시작해.”
마른 비가 손목을 휘돌리며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승부욕이 타올랐다.
“이런…….”
군일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싸움을 말리려고 던진 말이 오히려 마른 비의 호승심을 자극했다는걸.
그리고 눈치 빠른 그는 자신이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아… 이런 제길.”
군일은 이마를 짚었다가 고개를 들며 외쳤다.
“이봐, 꼬마야! 오기 부리지 말고 운기해라! 대장은 너보다 강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하란 말이다!”
군일은 마음이 급했는지 예의 따윈 집어치운 채 반말로 외치고 있었다.
마른 비는 그의 말을 흘려 넘기며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괜찮아. 이대로 간다.’
오기?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은 분명히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관찰한 패문강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기운을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모양 빠지게 기운을 회복할 생각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쓰러뜨려 주겠어!’
그리고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야 말겠다.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강자를 만나, 마른 비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필요 없나 보군. 좋다. 바로 시작하지.”
패문강은 팔짱을 풀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刀).”
요섭과 병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군일만이 당연하다는 듯 침착함을 유지했다.
성벽 위의 전각에서 소란이 일고, 사내 한 명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대장!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까?! 창이 아니라 도라고요?!”
패문강은 고개만 돌린 채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내는 전각 안으로 들어가며 ‘이게 뭔 일이야? 저 꼬마가 그렇게 세?’ 라고 중얼대며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금세 다시 나오더니 낑낑대며 난간에 발을 걸쳤다.
“대장! 놓습니다!”
그가 크게 외치며 무언가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성벽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건 엄청난 크기의 도였다.
쿠아아앙!
크기만큼이나 무게도 엄청난지 도의 절반이 땅에 박혀 들었다.
패문강은 걸어가서 한손으로 그걸 뽑아 올렸다.
새하얀 도신을 타고 번쩍이는 햇살.
패문강의 손에 들린 건 매우 익숙한 형태의 도였다.
‘참마도?’
초원의 전사들 중에서도 힘에 자신이 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중병이다.
기병과 말을 일격에 거꾸러뜨리기 위한 그것은 원의 정예인 사와르들이 애용하는 무기였다.
저벅, 저벅.
도를 손에 쥔 패문강은 그대로 마른 비에게 걸어왔다.
거리가 좁혀지고, 참마도가 바람을 갈랐다.
쩌어어엉―!
기수식이고 뭐고 없다.
그냥 걸어와서 휘두른 것뿐인데, 마른 비의 몸이 붕 떠올랐다.
도를 막아낸 왼쪽 팔뚝엔 혈선이 새겨져 있었다.
‘뭐 이런…?!’
가벼운 한 수에 교룡갑이 깨졌다.
강피에 균열이 생기고, 철골까지 저릿하게 울린다.
마른 비도 놀랐지만, 북벽의 수하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대장의 일격을 맨몸으로 받아냈다고?!”
가르지 못한 것이 없고, 부수지 못한 것이 없는 일격이다.
북벽의 수하들에게 패문강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렇기에 논공행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족 청년이 그보다 주목을 받았을 때 심기가 불편했다.
요섭이 마른 비에게 싸움을 건 이유가 이것이었다.
허나 마른 비가 패문강의 일격을 받아낸 순간, 그들은 마른 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체술인가.”
하지만 정작 패문강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황성에서 대번에 자신의 이목을 끌어당긴 사내.
그는 오직 마른 비의 무(武)가 궁금할 뿐이었다.
후아아악―!
폭풍이 밀려오는 듯한 도법이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도는 대지를 부술 것만 같은 거력을 머금고 있었다.
마른 비가 선택한 건 순수한 힘의 대결이었다.
“하아압!”
쿠아아아앙―!
전력을 다한 진각이 내리꽂혔다.
지진이 난 듯 땅이 요동치고, 대자연의 기운이 육신을 거슬러 오른다.
폭발할 듯 터져 나간 바위 부수기가 참마도와 충돌했다.
푸콰쾅―!
도가 하늘로 튕겨 나가고, 마른 비의 팔이 뽑힐 듯이 뒤로 날아갔다.
강기와 자연기가 맞부딪히며 화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이 덮쳤지만, 둘은 이미 후속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아압!”
“이야아아아!”
꽝! 꽈광―! 쩌저저정! 투쾅!
대도와 권갑이 부딪칠 때마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그들이 있는 공간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사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튀어나간 강기의 파편만으로도 대량 살상을 이룩했으리라.
균형이 깨진 건 권갑이 박살 나면서부터였다.
푸캉!
‘어?!’
왕문에게 받은 권갑이 산산조각 났다.
철 뭉치가 사기그릇처럼 깨졌다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백색의 도가 광휘를 흩뿌리며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하앗!”
쩌어어엉!
무소의 뿔.
날카롭게 세운 팔꿈치가 패문강의 도를 걷어냈다.
마른 비는 팔꿈치에 전해지는 둔탁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평범한 철이 아니야. 보도(寶刀)인가?!’
왕문의 말이 맞았다.
그저 그런 상대라면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때려눕히겠지만, 역량이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강한 자와 싸울 때는 무기가 없는 쪽이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전쟁에 익숙한 패문강은 무기까지 최상의 것을 준비한 듯했다.
쩡! 쩌정! 투카캉!
“큭! 크윽! 흡…!”
병사들은 맨몸으로 패문강의 도를 받아내는 마른 비를 보며 경악했지만,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다.
몸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팔뚝과 어깨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힘에선 밀려!’
인정하기 싫지만, 힘은 패문강 쪽이 위였다.
근소한 차이로 점점 우위가 갈리고 있었다.
판단을 내리자마자 마른 비의 투술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차아앗!”
속도, 그리고 기교.
그 둘을 바탕으로 간격을 좁혀야 한다.
마른 비는 지근거리 백병전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릴 생각이 없었다.
후우욱―!
쭉 뻗은 주먹과 도가 마주칠 거리에서, 단타를 꽂아 넣을 거리로.
낙엽 가누기로 참격을 흘리고, 구름 걷기로 눈을 현혹했다.
쾅!
번갯불이 터지는 순간, 마른 비는 패문강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
놀란 표정 짓지 마라.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불꽃처럼 터져 나간 솔잎 털기가 패문강의 하체를 공략했다.
콰아앙!
패문강의 대응은 단순했다.
도를 거꾸로 잡은 그는 땅에 도를 박아 넣어서 전면을 가렸다.
따다다다당―!
콩 볶는 소음이 울리며 참마도가 들썩였다.
마지막 한 방을 털어낸 마른 비가 표적을 정조준했다.
“합!”
뼈창.
예리하게 가다듬은 손끝이 도를 쥔 손을 노렸다.
도를 쓰는 자가 손을 다치는 순간, 승부는 끝날 터.
손끝이 표적을 가격하기 직전, 패문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그는 도를 놔버리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주본 손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덫이 도사리는 느낌.
마른 비는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급격히 손을 거둬들였다.
후우우욱―!
패문강의 양손이 눈부신 속도로 교차했다.
무언가를 잡아서 뒤틀기 위한 동작.
그가 역공으로 준비한 건 관절기였다.
‘큰일 날 뻔했어! 그대로 갔으면 손목이…!’
볼 것도 없이 부러졌으리라.
이 괴물 같은 무장은 도법만이 아니라 체술에도 능숙한 듯했다.
‘지금 들어 가야 해!’
무기를 사용하는 자에게 애병을 놓게 만들었다.
마른 비는 머뭇거리지 않고 전진했다.
쾌애애액―!
올빼미의 부리가 급소를 잡아챈다.
남방 밀림, 무수한 맹수들을 무릎 꿇린 그믐의 기예가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흠…!”
역시 속도는 이쪽이 유리하다.
마른 비는 눈 한번 깜빡일 동안 수십 방의 올빼미 사냥을 적중시켰고, 패문강은 짤막한 신음을 토했다.
‘급소는 전부 막았지만…!’
상관없다.
어깨와 팔뚝, 다리와 몸통에까지 혈흔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들어간 유효타.
전략을 바꾼 마른 비는 마침내 전세를 뒤집었다.
‘이젠 네가 받아봐!’
산 허물기, 바위 부수기, 악어 이빨, 거목 쪼개기…!
육신의 모든 곳을 활용하는 기예가 패문강을 몰아넣었다.
자연에서 터득한 와족의 투술이 중원과 초원의 경계를 흔들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싸움법이…!”
천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기예.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이런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북벽의 수하들은 마른 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감탄했다.
“끝내자!”
패문강은 도를 놓친 후부터 전력이 깎인 게 여실히 느껴졌다.
태산처럼 단단한 기도는 여전하지만, 박투에서 마른 비가 밀릴 리 없었다.
승부수를 던지기로 한 마른 비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휘휘휘휘휙―!
무수한 잔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장대비 같은 발차기를 사선으로 퍼붓자, 패문강은 주춤대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도를 몸으로 받아낸 마른 비가 그랬듯이 철골과 부딪힌 패문강의 육신은 곳곳에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콰르르릉―!
뒤꿈치로 구현한 하늘의 분노.
불벼락을 끝으로, 마른 비는 승리를 예감했다.
“안 되겠군.”
불꽃을 머금은 발차기를 올려다보며, 패문강이 중얼댔다.
그는 불벼락의 궤적을 눈으로 쫓는 한편, 오른손을 곧게 폈다.
화아아악―!
팔뚝을 타고 오르는 백색의 강기.
농밀하게 응축된 그것은 도강이 분명했다.
‘맙소사! 칼이 없는데 어떻게?!’
팔의 뼈를 매개로 강기를 뽑아 올린 게 틀림없다.
놀라운 발상이지만, 마른 비에게는 위기였다.
“좋다. 여기서 끝내자.”
푸콰카카캉!
붉은빛과 하얀빛이 맞부딪히며 폭풍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