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악…!”
마른 비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새하얀 강기에는 무지막지한 힘이 담겨 있었고, 불벼락의 폭발력을 억누르며 역공을 가해왔다.
하늘로 치솟은 마른 비의 어깨에서 핏물이 터졌다.
“쓰러뜨릴 작정이었는데, 그걸 상쇄했단 말인가.”
패문강도 멀쩡하진 않았다.
좌측 어깨에 걸친 견갑이 완전히 박살 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큰 피해를 입진 않았고,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도를 회수했다.
“이것도 받아봐라.”
패문강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하늘로 튕겨 나간 마른 비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아직 하강을 시작하기도 전에 후속타가 뿜어졌다.
“회도(回刀).”
패문강은 땅에 꽂혀 있던 도를 거꾸로 쥐며 뽑아 올렸다.
그리고 뽑혀 나오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던졌다.
대지를 도갑으로 활용하는 임기응변.
군일이 선보인 발검과 유사한 발도술(拔刀術)이었다.
후우우웅―!
어린 아이의 키보다도 큰 대도가 매섭게 회전했다.
마른 비가 정신을 차렸을 때, 도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익…!”
정말 사정 따윈 하나도 봐주지 않는 남자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지금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받아낼 수 있을까?’
허공에 떠 있고, 디딜 발판이 없다.
내부가 진탕됐고, 자연기도 흔들렸다.
지금 이걸 정면으로 받으려 들다가는 두 동강이 날 게 분명했다.
‘회피…!’
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법뿐이야…!’
공격 궤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회피에 성공한다고 해도 저 정도의 고수가 착지하는 걸 얌전히 두고 볼 리 없으니까.
결단을 내린 마른 비가 있는 힘껏 허리를 튕겼다.
“합!”
경이적인 허릿심이 몸 전체를 띄워 올렸다.
많이 갈 필요도 없다.
딱 도를 피할 수 있을 만큼만!
마른 비가 추락을 거부하듯 위로 움직였을 때, 참마도가 공기를 갈랐다.
스가각!
섬뜩한 절단음은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였다.
마른 비의 뒷머리가 우수수 떨어질 때, 탄성이 터졌다.
“저, 저…!”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마른 비는 참마도의 도신 위에 올라타 있었다.
허공을 질주한 후 원반처럼 되돌아가는 도와, 그 위에 올라탄 청년.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통에 토악질이 치밀 것 같지만, 마른 비의 눈은 패문강을 놓치지 않았다.
“……!”
이번만큼은 그도 놀란 모양이다.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반쯤 벌어졌고,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을 하고 있었다.
‘놀라긴 일러!’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졌다.
마른 비는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며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놀랍구나. 하지만 어리석어.”
회도는 이기어도를 기반으로 한 무공이다.
즉 자유자재로 제어가 가능하단 뜻이었다.
지금 당장 멈출 수 있음에도 패문강은 도를 그대로 두었다.
쫓아가서 잡아야 할 꼬마가 스스로 범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꼴이었으니까.
쿠아앙―!
패문강이 일보 전진하며 진각을 밟았다.
고절한 무예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법.
땅이 울리고, 거력을 압축한 정권이 뿜어졌다.
“쓰러져라.”
모두가 마른 비의 패배를 예상한 시점이었다.
“하압!”
발바닥으로 쏟아내는 자연기.
뿌리 내리기가 참마도의 궤도를 비틀었다.
패문강의 기가 짓눌렸고, 결과적으로 도는 그의 예상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아닛?!”
십만 대군 앞에서도 태연할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충돌 직전, 마른 비는 오른 다리를 쭉 뻗었고, 도의 회전에 몸을 맡겼다.
빠악! 푸쾅―!
피가 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패문강을 보며, 마른 비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우당탕탕―!
마른 비는 십 수 번을 구른 뒤에야 멈췄다.
형편없이 처박히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공격을 적중시킨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 우웩…!”
회전의 여파와 복부를 얻어맞은 충격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마른 비는 배를 부여잡고 왈칵 피를 쏟아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비척대며 일어나는 패문강이 보였다.
우우우웅―
허공에 정지한 채 떠 있는 도.
마른 비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충돌 직전에 멈춰 세웠구나!’
그나 자신이나 이미 공격에 접어든 뒤였다.
일부러 코앞에서 도의 궤도를 변경했고, 발차기와 함께 참마도로 한 방을 먹이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도를 완전히 정지시키다니, 내공의 운용이 얼마나 뛰어나야 저런 게 가능한 것인가.
마른 비는 패문강의 경지가 결코 십좌에 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른 비가 몸을 일으킬 때, 병사들 쪽에서 침음이 흘러 나왔다.
“대, 대장이 나가떨어지다니…….”
그날. 초원 최강의 무장이라는 오스트갈을 만난 날.
천하무적이라 자신했던 패문강은 처참히 패배했다.
패배를 겪은 그는 절치부심하여 수련에 전념했고, ‘그것’들을 처치하며 기연도 얻었다.
이제 바투와 무칼리는 물론이요, 오스트갈과도 일전을 겨뤄볼 만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그가 스물 초반의 청년에게 얻어맞고 쓰러지자 수하들은 말을 잃었다.
“대단하군. 마음에 들어.”
패문강이 피를 퉤 뱉어냈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마른 비를 살폈다.
대충 봐도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꼬마가 아닌가.
자신이 기연을 얻었듯이 그도 무언가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나이에 이토록 웅혼한 내력을 지닌 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진정 놀라운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냐? 그 나이에 이런 기술과 전투 감각이라니.”
자신이 저 나이였을 땐 어땠던가.
스스로를 최고라고 믿었고, 실제로도 패배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자와 비교한다면 손색이 있다.
패문강은 문득 마른 비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대장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처음 봐…….”
오늘 패문강의 수하들은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 속에 섞여 있는 요섭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실컷 패놓고 칭찬하는 거야? 으… 아파 죽겠네.”
이런 괴물 앞에서 철골과 강피 따윈 의미가 없다.
패문강이 몸을 추스르고 싸울 준비를 마치자, 마른 비도 한쪽 무릎을 디딘 채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자신이 밀리는 듯했다.
‘자연기를 회복하고 싸울 걸 그랬나?’
갑자기 스친 생각이었다.
마른 비는 잡념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병기의 유무,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 경험과 연륜의 부족…….
부질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 상황에서 모든 걸 쏟아내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쥘 때, 패문강의 입술이 열렸다.
“너의 모든 걸 보고 싶다. 언제 부를 건가?”
“……?”
마른 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패문강이 허공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달려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보더군. 그냥 불러내라. 앞에 놓고 싸우는 게 낫지, 뒤통수를 노리는 걸 경계하는 게 더 힘들어.”
패문강은 별비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자 마른 비가 부르기도 전에 별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르… 크아앙!”
“배, 백호…!”
갑자기 나타난 별비를 보며 병사들이 움찔댔다.
녀석은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강한 척은 혼자 다하는 인간이다.
밉살스런 면상을 후려갈기기 위해 기회를 노렸는데,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패문강은 마른 비와 싸우는 내내 별비까지 견제하고 있었다.
“후아… 당신 진짜 엄청나네. 솔직히 놀랐어.”
설마 별비까지 염두에 두며 싸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른 비는 감탄했고, 이번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함께 싸우라는 거, 사양하지 않을게.”
자연기가 공명하고, 혼의 연결고리가 짙어진다.
둘이되 하나인 일인일수가 전투 준비를 마쳤다.
“대신, 짜릿하게 해줄게.”
콰아아앙!
폭발적으로 튀어나간 둘이 패문강을 덮쳤다.
주먹과 앞발이 도착하는 시점까지 하나로 맞춘 둘은 한 몸인 것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마른 비가 속공으로 도를 묶어두면, 별비가 빈틈을 노리며 강렬한 한 방을 날렸다.
별비를 제압하기 위해 패문강이 움직이면, 자유로워진 마른 비가 맹공을 쏟아냈다.
“하압!”
천둥바위가 공간을 제압하자,
“커허헝!”
대호의 발톱이 대기를 찢어 발겼다.
쩌정―!
별비가 이빨로 참마도를 붙드는 순간,
쾌애애액―!
올빼미 사냥이 명치를 노렸다.
“……!”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세 앞에서, 패문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투콰캉! 쩌저저정―!
미친 듯이 퍼붓는 연타가 장벽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좌, 우, 앞, 뒤.
현란하게 움직이는 일인일수의 합공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의 폭격이었다.
“큭! 흐읍…!”
패문강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도 한 자루로 모든 걸 막아내는 점에서 그의 강함을 알 수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대장!”
전각 위에서 지켜보던 사내가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흑색 광택을 띠는 물체가 날아들자, 패문강이 눈을 빛냈다.
“카합!”
도를 휘둘러서 마른 비와 별비를 물러서게 한 패문강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상반신 전체를 가리고도 남는 물건.
패문강이 왼손에 쥔 건 마귀의 형상이 양각된 방패였다.
우우우웅―!
패문강은 공세에서 벗어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역수로 쥔 도가 등 뒤로 돌아가고, 그의 자세가 낮아졌다.
“이제 해볼 만하겠군.”
흑색 방패 뒤에 몸을 숨긴 그는 대낮에 떠오른 검은 달 같았다.
“흑월(黑月).”
부아아악―!
패문강이 도를 휘두르자 강기가 굽이치며 뻗어 나왔다.
크게 원형을 그리는 한편, 마디마디가 꺾이며 날아드는 강기는 궤적을 예측할 수 없는 신기였다.
“별비야!”
의지를 전달 받은 별비가 훌쩍 뛰어올랐다.
“크아아앙!”
발톱을 긁어내린 별비와 횡으로 기동한 마른 비가 만나는 순간, 눈부신 십자포화가 전면을 휩쓸었다.
푸콰카카캉!
힘으로 맞선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 놀라운 기술이지만, 기교에 치중한 만큼 힘이 부족했다.
둘의 자연기가 강기를 분쇄하고 날아들자, 패문강이 방패를 내밀었다.
“파벽(破壁).”
온몸을 던지는 돌진기.
패문강은 방패와 하나가 되어 전진했고, 이름 그대로 장벽을 부수듯 자연기를 깨뜨렸다.
정면으로 둘의 합공을 받아낸 패문강이 도를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우우웅―!
도명(刀鳴)이 메아리치고, 막대한 기운이 응집된다.
그는 횡으로 눕힌 방패에 도신을 기댔다.
그리고 방패를 잡아 빼며 도를 마찰시켰다.
기기기깅―!
“흉살(凶殺).”
방패로 구현한 유사 발도술.
속도와 힘, 가르기와 부수기가 융합된 도법이었다.
예격과 강격이 혼재하는 그것은 오스트갈을 쓰러뜨리기 위해 만든 그만의 절기였다.
“이건 또 뭐야?! 별비야! 피해!”
이런 건 맞서는 게 어리석은 짓이다.
흉살은 믿기지 않는 힘을 담고 있었고, 마른 비와 별비는 좌우로 움직여서 전권을 벗어났다.
“겨우 떨어졌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만만치 않은 놈들인데, 둘이 합치니 곱절에 가까운 효과가 났다.
믿기지 않게도 수왕이란 자는 정말로 짐승과의 소통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마른 비에게 백호를 붙여놓는 건 절정의 무인에게 보검을 쥐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란 걸 패문강은 깨달았다.
그는 마른 비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내가 자만했다는 걸 인정하마. 허나 너도 밑천이 떨어졌겠지. 다시는 힘을 합치게 놔두지 않겠다.”
섬뜩한 기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빛이 명멸했다.
“글쎄. 이게 전부일지는 두고 봐야겠지?”
지상에 강림한 하늘의 창이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