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 * *
툭― 툭―.
두툼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얼굴을 건드렸다.
“허어억…!”
마른 비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기절에서 깨어났다.
햇살을 가린 거대한 물체.
별비였다.
〔깼냐?〕
별비는 앞발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상처를 입은 건지 피가 흥건했는데, 앞발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털이 빨갛게 보일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별비…! 살았구나! 괜찮아? 많이 다친 거 아니지?!”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떠오른 마른 비가 별비를 붙잡으며 물었다.
그러다가 머리가 띵해지며 풀썩 엎어져 버렸다.
“으, 으윽…!”
만신창이다.
몸을 살피니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었다.
자연기는 완전히 고갈됐고, 청력에 손상이 갔는지 소리가 명료하지 않았다.
온몸이 망치로 두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마른 비는 자신과 별비가 모두 살아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난 괜찮으니 네 몸이나 챙겨라. 나약한 녀석.〕
별비가 퉁명스럽게 면박을 줬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에 대한 염려와 안도가 깃든 걸 마른 비가 모를 리 없었다.
“하아…….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마른 비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나.”
“……?!”
마른 비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솟구치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곤 끔찍한 통증에 신음하며 다시 엎어졌다.
고개를 들자, 바닥에 퍼질러 앉은 육중한 체구의 사내가 보였다.
“내외상이 심각하다. 네 몸을 보호할 기운도 남기지 않은 채 전부 쏟아낸 모양이더군. 백호가 감싸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거다.”
패문강이었다.
그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쉬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기절 같은 건 하지 않은 듯했다.
어깨에 붕대를 감았고, 장군용 갑주가 완전히 박살 나서 걸레짝이 됐지만, 그건 마지막 격돌 전에 입은 손상이다.
마른 비와 별비가 사선을 오갈 때, 그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그제야 자신의 몸에도 붕대가 감겨 있고, 정성껏 치료가 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편히 몸을 누이며 충돌할 때의 상황을 되새겼다.
‘맞아. 저 사람이 쓴 건 방출형 기공이었지.’
하늘을 쪼갤 듯이 떨어져 내리던 하얀 기운.
그건 이미 강기의 영역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마치 서리불꽃처럼.
그는 멀찍이서 기운만 쏟아냈는데 자신은 만신창이가 돼서 기절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억울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패문강은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너만 손해를 본 게 아니다. 난 아끼는 무기가 반 토막이 났지.”
척 봐도 쉽게 구하기 힘들 듯한 보도.
새하얀 도신을 지닌 참마도는 도신의 상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기어코 성공시켰더군.”
“……?”
“네가 준비하던 것 말이다.”
서리불꽃을 말함이리라.
자신만큼 빠르지 못할 뿐, 패문강 또한 한 차원 앞선 시간의 영역에 들어선 게 확실했다.
서리불꽃을 성공시킨 것과, 양측의 절기가 맞부딪힌 순간을 제대로 포착한 걸로 보아 그 영역에 익숙한 눈치였다.
“네가 쏘아낸 기운. 참마를 상쇄한 걸로도 모자라 내 쪽으로 날아왔다. 빗나갔으니 망정이지, 그런 걸 제대로 맞았다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었을 거야.”
금성철벽 같은 무위로 북방의 장벽이라고까지 불리는 남자의 말이었다.
패문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넌 나의 전력을 끌어냈고, 내 최강의 기술을 받아냈다. 두말할 여지없는….”
술술 말하던 패문강은 마지막 말은 꺼내기가 쉽지 않은지 멈칫했다.
그러다가 ‘이까짓 게 뭐라고.’ 하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나의 패배다.”
북벽이 패배를 시인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킨 것뿐이지만, 마른 비가 수긍할 리 없었다.
“패배는 무슨. 당신은 멀쩡한데 나만 기절했잖아. 그리고 난 별비랑 같이 싸웠고. 승패를 따지면 내가 진 거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
마른 비가 몸을 일으켜서 별비에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패문강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대장! 대장은 멀쩡하고 이 녀석은 기절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백호를 동시에 상대했는데 패배라뇨?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요섭이었다.
그는 마른 비에게 심통이 난 것 같기도 했고, 그가 패문강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패문강이 누군가에게 졌다는 사실을 승복할 수 없는 눈치였다.
패문강이 요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딱 잘라 말했다.
“절대 깨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비기였다. 누구도 받아낼 수 없으리라 여겼지. 하지만 오스트갈에게 닿기도 전에 깨져버렸어.”
그는 바닥에 내려놓은 마령벽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나 역시 이것의 도움을 받았다. 생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 역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귀물이지. 그러니 숫자의 유불리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패문강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마른 비에게 시선을 옮겼다.
“조건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게 주어진 십 년의 시간도 계산에 넣어야겠지. 승부란 그런 게 아니지 않나. 내가 승패의 조건을 걸었고, 너는 그것을 극복했다. 그러니 내 패배다.”
이견을 허용치 않는 말투였다.
내가 졌다, 그러니 토 달지 말라는.
요섭과 주변에 있는 병사들이 침중하게 입을 다물 때, 마른 비가 툴툴댔다.
“난 거기 동의한 적 없거든? 누운 사람이 진 거야. 진지한 얼굴로 요상한 기준 들이대지 마.”
병사들이 ‘맞아! 대장이 틀렸고, 수왕이 맞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마음에 드는 꼬맹이군!’이라는 말도 튀어 나왔다.
병사들이 패문강의 승리를 위해 마른 비를 편드는 묘한 상황이었다.
“마지막에 당신이 궤도를 비튼 걸 알아.”
마른 비가 덧붙이자, 병사들은 침묵했다.
그건 마른 비와 패문강만이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별비마저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걸 봤나?”
패문강은 마른 비가 찰나에 일어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놀랐다.
목숨을 걸고 싸우긴 했으나 죽일 필요 없고, 죽여서도 안 되는, 무엇보다 죽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궤도를 비튼 것인데, 설마 그걸 알아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마른 비는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봤지. 속도는 내가 위야. 인정하지?”
요섭이 인상을 찌푸렸고, 패문강은 선선하게 수긍했다.
“맞아. 굉장히 빠르더군. 그리고 정확해. 지금껏 본 자들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칫…! 이놈이 그 활잡이를 봤어야 이런 건방진 소릴 못 할 텐데.”
요섭은 마른 비를 인정하기 싫은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악의가 없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는 철없는 동생의 투덜거림처럼 느껴졌다.
마른 비는 유쾌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맞아. 내가 더 빨라. 그래서 정확히 볼 수 있었어. 당신이 궤도를 비트는걸. 그런데 졌다느니 그런 소릴 늘어놓으면 내가 어떤 기분이 들겠어?”
“어찌 됐든 네 기술이 참마를 파훼하고 내게 도달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마른 비는 손을 들어서 패문강의 말을 막으며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덧붙였다.
“뭐, 나도 졌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야. 이상하게 당신한테는 지기 싫거든. 그러니까 정 납득하기 힘들면 무승부로 하고 나중에 다시 붙자. 그땐 진짜 일대일로! 나중엔 분명히 내가 이길걸?”
병사들은 ‘그건 아니지, 인마! 평생 가도 대장이 너 같은 꼬맹이한테 질 것 같냐!’, ‘잘 나가다가 왜 딴소리야!’라며 삿대질을 했다.
마른 비는 킥킥거리며 웃다가 패문강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축하해. 뭔가 얻었지?”
병사들이 조용해졌고, 패문강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느껴져. 미세하지만 기질이 변했어. 뭔가 깨달은 모양이네.”
마른 비는 이제 말하는 것도 피곤한지 별비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후아……. 내가 깨달음을 안겨준 건가? 안 그래도 괴물인데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해야겠네.”
패문강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말이 맞다. 뭔가를 얻긴 얻었는데…… 아직은 나도 정확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지. 한데 네가 그걸 느꼈단 말인가?”
패문강도 한결 편하게 자세를 풀며 말했다.
“진짜 괴물은 내가 아니라 너다. 나중에 꼭 다시 붙어야겠군. 시간이 지나면 정말 볼 만하겠어.”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는 낯부끄러운 상황이다.
요섭이 다짜고짜 창을 겨누는 바람에 싸움이 시작됐지만, 그가 아니었어도 한바탕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마른 비도, 패문강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건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당사자들만의 호승심과 승부욕이었다.
“근무 중이라는 게 아쉽군. 오랜만에 술 한 잔 나눌 상대를 만났어.”
처음부터 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고, 한바탕 진하게 싸우고 나니 무척이나 후련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심지어 패문강마저도 이런 분위기가 된 게 마른 비 때문이란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희한한 녀석이야.’
마른 비는 편안한 얼굴로 별비에게 기대 있었다.
거용관을 지키는 병사들은 마른 비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지?”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른 비가 뜬금없이 말했다.
병사들은 뜨악했고, 패문강은 예기치 못한 한 방을 얻어맞은 표정이 됐다.
“아저씨… 라고?”
“응. 형이라고 부르기엔 나이차도 있고…… 뭐랄까, 분위기가 묵직해서 그건 좀 가벼운 느낌이야.”
패문강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요섭이 벌게진 얼굴로 노발대발했다.
“거, 건방진! 아저씨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장군님이라고 불러라!”
“응? 그걸 왜 당신이 정해? 당사자가 괜찮다면 그만인 거지.”
“아무튼 안 돼! 내가 있는 이상 그런 건 눈 뜨고 못 본다!”
요섭이 이상할 정도로 과민 반응할 때, 군일이 옆에서 킥킥댔다.
“허허, 이것 참……. 전장의 귀신, 북방을 수호하는 벽, 일인군단,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죄다 인간 같지도 않은 별호만 붙은 대장한테 아저씨라니. 하기야 그보다 더한 주원… 아니, 황제 폐하도 아저씨라고 부르는 녀석이니.”
군일의 말이 결정적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수락할 생각이었을까?
패문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아니, 생각보다 듣기 좋아. 난 좋으니 네가 편한 대로 불러라.”
하지만 이어진 말에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런데, 넌 이름이 뭐냐?”
“…….”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때, 전투 후의 달콤한 휴식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두두두두―
지평선을 새카맣게 뒤덮은 병력.
얼핏 봐도 이십만이 넘는 대군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