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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47화 (347/463)

347화

“갑자기 어디서 저런 병력이…!”

마른 비가 별비에게 기댔던 등을 뗐다.

이십만의 군세는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군기를 뿜어내며 접근 중이었다.

마른 비가 긴장할 때, 병사들이 외쳤다.

“이, 이런! 대장군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기겁하며 흩어졌다.

그들은 강기의 파편과 음파의 후폭풍으로 엉망이 된 성벽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게 단시간에 될 리 없었다.

기껏해야 뒤집힌 땅이나 다져놓고, 완전 군장을 갖춘 채 병사들을 맞을 준비를 할 뿐이었다.

마른 비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몸을 편히 둘 수 있었다.

“서 아저씨구나! 명의 군사들인가 봐.”

그러고 보니 여기로 오는 중에 북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원을 중원에서 밀어냈지만, 핵심 장수들은 건재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후환이 될 거라고.

국력 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지금, 초원으로 진군하여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객잔에서 떠들던 자들은 황제가 그걸 모를 리 없기 때문에 머지않아 북진을 감행할 거라고 장담했었다.

‘그 사람들 말이 맞았어.’

패문강과 붙기 전, 군일이 대장군이 올 거라고 했던 게 이거였던 모양이다.

서달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초원 정벌에 나선 것이다.

마침 북진이 시작될 시점에 그들이 지나는 경로에서 마주치다니 참으로 절묘한 일이었다.

‘잘됐다! 서 아저씨라면 언제 봐도 반갑지!’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마른 비의 주원장에 대한 감정은 썩 좋지 않은 쪽으로 선회했다.

그의 결정과 행동들이 대국적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낳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같은 상투적인 말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문제였다.

주원장에 대한 심정이 복잡해진 것과 달리 서달이나 상우춘, 강무재라면 언제든지 반갑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른 비가 서달을 찾기 위해 대군의 행렬을 훑을 때, 군일이 다가왔다.

그는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더니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봐, 수왕. 자네, 대장군과 친하다지?”

“응? 맞아. 그런 편이야.”

군일이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긴히 부탁할 게 있는데……. 우리가 곧 엄청나게 깨질 예정이거든. 이거 보라고. 완전히 엉망진창이잖나.”

수왕과 북벽.

최근 강호 무림을 진동시키는 두 남자가 충돌한 여파는 굉장했다.

병사들이 뒷수습을 했지만, 손상을 입은 성벽이나 움푹 파인 구덩이 같은 건 단시간에 처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대장군께 이야기를 잘 좀 해주었으면 하네.”

마른 비는 이해했고, 되물었다.

“혼나지 않게 해달란 말이지?”

군일은 직설적인 표현에 당황했다.

이건 꼭 사고를 치고서 서당 훈장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학동 같지 않은가.

하지만 맞는 말이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끄응… 그래. 말하자면 그런 걸세.”

“알았어. 내 책임도 있으니까 선처를 구해볼게.”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군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우리가 먼저 칼을 뽑은 게 아닌가. 일을 저질러 놓고 왜 비아에게 부탁을 하는 거냐.”

군일은 움찔했다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했다.

“저 봐. 하여튼 우리 대장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 자네, 운이 좋은 걸세. 대장군이 오시지 않았다면 북경까지 다녀와야 했을 거야.”

“……?”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군일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은 임무에 있어서만큼은 더럽게 빡빡한 인간이거든.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지만, 그래도 절대 거용관을 통과시키지 않았을 거다. 북벌의 영웅이고, 아무리 신분이 확실해도 말이야.”

“저런. 꼼짝없이 북경을 다녀와야 할 뻔했네?”

“그래. 그러니까 대장군께 통과시켜 달라고 해. 아무리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도 설마 그분이 허가를 내주셨는데 막진 않겠지. 그러면서 그 말을 꺼낼 때 슬슬…… 내 말 알아듣지?”

학자의 풍모와 싸움꾼의 기질을 동시에 지녔으면서 유들유들한 처세술까지 갖춘 남자였다.

마른 비는 확 변한 군일의 말투가 우스워서 미소를 지었다.

반면 패문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 들린다. 군일. 우리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군.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당장 움직이지 못해?”

“저거 봐라. 끝까지 아니라는 소린 안 하지.”

패문강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나서야 군일은 헐레벌떡 병사들에게 돌아갔다.

엉망이 된 갑주를 벗고, 병사가 가져온 말끔한 장군복을 걸치던 패문강은 거용관의 앞을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후우……. 확실히 한 소리 듣긴 하겠군.”

패문강을 필두로 관문 앞에 정렬한 병사들.

그들은 서달이 가까워질수록 바짝 긴장한 얼굴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느긋하게 있는 건 마른 비와 별비뿐이었다.

마른 비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서달은 그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게 무슨…!”

평소의 서달이라면 마른 비를 무척이나 반가워했을 터다.

하지만 명 황실이 들어서며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그는 짧게 기른 수염을 푸들푸들 떨며 노여워했다.

“왜 거용관이 이 꼴이 되었는가?! 패문강! 당장 튀어나와 설명하지 못해!”

서달이 호통을 치자, 맨 앞에 서 있던 패문강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군례를 올렸다.

“송구하옵니다. 대장군.”

“송구…! 그런 말 따윈 집어치우고 거용관이 이렇게 된 이유를 말하란 말이다!”

패문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수왕을 보고 제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서달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는 싸움의 흔적을 보는 순간 상황을 짐작했다.

하지만 마른 비가 연관됐음에도 장성 제일 관문이 엉망이 된 걸 보자, 노기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거용관을 책임진다는 건 장성 전체를 관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중한 자리다! 한데 그런 자가 민간인과 싸움을 벌이다니…!”

마른 비는 서달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그가 호통을 치자 이십만 대군은 침 넘어가는 소리도 죽이며 침묵했다.

“자넨 이제 원의 일개 부장이 아니야! 대 명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장수란 말이다!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송구합니다. 대장군.”

희귀한 광경이었다.

온 천하의 무인을 통틀어도 손에 꼽힐 강자가 고개를 숙인 채 질책을 받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자유로운 무림인이라면 모를까, 조직에 매인 이상 천하최강의 무인이라도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로 얽히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상하관계가 철저한 군부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 자네를 믿어 폐하께 천거했거늘! 내 얼굴에 똥칠을 할 셈인가!”

서달은 삿대질도 서슴지 않았다.

“흥미가 동한다고 칼부터 뽑을 거면 당장 옷 벗게! 나와 상우춘 장군과 한바탕 어울린 걸로도 만족하지 못했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패문강은 난감한 얼굴로 비슷한 말만 반복했다.

“송구합니다, 장군.”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책임지고 성벽을 복구해 놓겠습니다.”

“예, 장군. 죄송합니다.”

패문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제법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둘을 번갈아 보던 마른 비가 적당한 시점에 끼어들었다.

“저, 아저씨. 그게….”

하지만 서달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자넨 가만히 있게! 자네도 잘한 것 하나 없어! 논공행상 때도 그렇고, 자넨 어떻게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가!”

“으, 응. 미안…….”

무안해진 마른 비가 뒤통수를 긁으며 사과했다.

저 멀리서 군일이 두 눈을 꾹 감는 게 보였다.

마른 비는 서달이 이토록 말이 많을 줄은 몰랐고, 패문강이 그걸 가만히 듣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으……. 지겨워. 난 절대로 조직엔 안 들어가야지.’

서달의 꾸지람을 듣던 마른 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겉으로는 무섭게 호통을 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서달의 화가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마른 비는 둘을 유심히 살핀 끝에 그가 왜 계속 패문강을 질책하는지 알게 됐다.

‘일부러 그러는 거구나!’

이번 일이 보고되면 패문강은 문책을 피하기 힘들어 보였다.

국문이나 다름없는 곳의 수비를 맡은 자가 사사로운 이유로 민간인과 싸움을 벌이고, 관문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부에는 패문강의 출신성분과 파격적인 발탁 탓에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달은 일부러 호되게 야단을 쳐서 자신의 선에서 덮어주려는 것이었다.

패문강 또한 그걸 알기에 더욱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와, 멋진 사람들이네!’

무인이자 군인인 사내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이런 걸 처음 본 마른 비는 그게 꽤나 멋지다고 느꼈다.

‘으……. 그래도 조직엔 절대 안 갈래.’

하지만 상관의 잔소리를 맛본 마른 비는 자유롭게 살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그건 잘했군. 당연히 그래야지.”

서달은 마른 비를 통과시키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칭찬했다.

그리고 설령 황자가 와서 으름장을 놓더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물론입니다. 폐하와 황실에서 발행한 직인 없이는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죠.”

대꾸한 건 군일이었다.

그는 늠름하게 눈을 빛내며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마른 비에게 느물거리며 부탁을 할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아저씨. 그럼 나 여기 못 지나가?”

마른 비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서달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지금은 내가 같이 있잖나?”

그 한마디로 정리됐다.

서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굳게 닫혀 있던 거용관의 문이 열렸고, 마른 비는 마침내 중원을 넘어 북방 초원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아 별비의 등에 탄 채 관문을 넘은 마른 비는 눈앞에 펼쳐진 색다른 풍경에 감탄했다.

“우와아아아~!”

거용관이 고지대에 세워진 덕에 관문을 넘자마자 볼 수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뻗은 녹색 들판을.

저 멀리 파란 하늘과 맞닿은 초원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선사했다.

크게 숨을 들이켜며 한없이 달려 나가고 싶어진다.

그건 대초원을 직접 눈에 담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드디어 장성을 넘는구나…!”

마른 비뿐만이 아니었다.

초원을 본 자들은 하나같이 감격에 차올랐다.

원의 치세가 지속됐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었으리라.

하지만 마른 비와 달리 명의 군사들은 금세 비장해졌다.

곧 저 푸른 들판이 전장이 될 테고, 초원은 적들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이 아름다운 곳에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달은 초원을 본 감격을 뒤로한 채 군령을 내렸다.

“장성을 넘으면 지체 없이 포진하라! 중앙과 좌우익! 삼 군으로 나뉘어 진군할 것이다!”

명령을 내린 그는 패문강을 돌아봤다.

“패 장군. 우린 포진을 마치는 대로 나아갈 것이네. 지금쯤 독수리들이 초원의 하늘을 날고 있을 거야. 우리가 장성을 넘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

서달은 지평선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예정에 없던 말을 꺼냈다.

“이십만 대군이 관문을 통과하여 진군할 채비를 갖추는 데 약 하루. 지금부터 자네는 직속 수하들을 채근하여 합류할 준비를 하게.”

“북진에 가담하란 말씀이십니까?”

서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마른 비와 패문강을 보며 말했다.

“사기 때문에 아직 발표하진 않았으나 우익의 지휘관 자리가 공석이 됐네. 북경을 나오기 전부터 회의를 거듭했지만 마땅한 장수를 찾지 못했어. 결국 문 장군에게 맡기기로 하고 출발했지만…… 오는 내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아니야.”

요컨대 지금부터 말하는 건 서달이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군부의 의견을 묵살한 독단이 분명했다.

“중앙과 좌우익. 삼 군 중 하나를 맡는 건 어지간한 실력으론 안 되네. 무력과 지휘력, 그리고 초원에 대한 경험. 문 장군으로서는 역부족이야. 거길 자네가 맡아주게.”

패문강은 놀랐지만 금세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했다.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우익이라면 내정자가 있지 않습니까? 상십만. 상우춘 대장군께서 맡으셔야 할 곳이 왜….”

서달은 침중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후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없기에 우익을 맡길 장수가 없는 것일세. 상우춘 장군, 그는….”

서달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은 서달이 깊게 탄식했다.

“그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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