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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49화 (349/463)

349화

수령사는 희열에 차올랐다.

마침내 그들의 신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짐승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날개를 편 채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흰 수리는 수왕을 따르는 백호를 연상케 했다.

저런 짐승은 천하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으리라.

수령사는 머나먼 남서쪽 끝까지 내려온 보람을 느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꼬맹이! 놈의 행적을 더듬은 건 탁월한 결정이었도다. 이토록 훌륭한 소체들이 즐비하다니…! 운남이야말로 본교를 위해 준비된 땅이었구나!”

운태산에서 목숨만 건진 채 패퇴한 이후, 백수교는 마른 비에 대해 집요하게 연구했다.

처음 등장한 곳부터 시작하여 그의 이동경로, 행보, 인간관계를 철저히 조사하고 탐문했다.

전투법과 내공을 분석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수왕의 투술과 자연기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시점에서 마른 비에 대한 분석은 중단됐다.

그들이 다음으로 집중한 건 별비였다.

교의 비술을 총동원해 만든 야수조차 별비에게는 먹잇감에 불과했으니, 그건 짐승에 대해 해박하다고 자부한 백수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허나 별비에 대한 자료는 너무나 부족했다.

범 주제에 초일류 암살자보다도 뛰어난 은신술을 지닌 데다,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별비의 생리를 탐구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놈의 고향을 찾아 헤맸지.’

백수교는 마른 비의 고향을 찾으면 별비 같은 짐승을 만들어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운남에 당도하여 규격 외로 거대하고 강인한 짐승들을 보는 순간, 수령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에 차올랐다.

‘여긴 본교를 위한 땅이다. 교의 부흥을 위해 점지된 곳이 틀림없어!’

운남에도 중원을 잠식한 악기가 스멀대고 있었다.

본래라면 일일이 정신을 침식하는 술법을 펼쳐야겠지만, 이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 후로는 야생의 짐승을 부리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모든 징후가 교의 찬란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구나!’

수령사는 휘하의 영매사들을 지휘하여 닥치는 대로 야수들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북부를 헤매다가 강대한 기운에 이끌려 결국 설산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회상을 마친 노인은 옆에 무릎 꿇린 사내를 바라봤다.

“저것이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야수가 틀림없으렷다?”

무두질한 가죽을 상의에 걸친 사내.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근육과 길쭉한 팔다리는 빠른 몸놀림에 특화된 듯했다.

사내는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지만, 투지를 잃지 않은 눈으로 수령사를 노려봤다.

“웃기는군. 그런 걸 왜 묻는 거냐? 가장 세면 어쩔 거고, 아니면 어쩔 텐가? 하얀 깃을 사냥하기라도 할 셈이냐?”

사내의 억양은 독특했다.

한어와 부족 고유의 억양이 섞인 듯 들쭉날쭉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하야’ 어쩌고 하는 단어 말고는.

수령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야… 뭐라고? 설마 저것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 건가?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준다고?”

사내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수령사의 입가엔 비웃음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놈들이야. 그 말투와 눈빛……. 호된 맛을 봤을 텐데, 그 꼴을 하고도 굴복하지 않는 건가?”

수령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사내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거한에게 눈짓했다.

“수투사여. 이놈이 아직 매가 부족한 것 같구려.”

노인의 눈빛을 받은 거한이 사내를 내려다봤다.

수투사는 말없이 차돌 같은 주먹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내리쳤다.

꽈앙―!

“끄… 허…….”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내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풀썩 상체를 꺾었다.

수령사가 클클 웃으며 땅에 엎어진 사내에게 말했다.

“네가 쓰던 기술과 몸놀림. 너, 수왕의 종복이 틀림없으렷다?”

사내가 뒤통수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꿈틀댔다.

그는 나무표범에 소속된 전사였다.

삼인일조로 소수부족들을 돌아보던 중, 백수교의 습격에 바위 곰과 수리의 눈 전사가 쓰러지고, 그는 생포되어 여기까지 끌려왔다.

잘게 경련하던 사내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쿨럭……. 수왕의… 종복이냐고? 너, 비아를 아는 모양이군.”

마른 비의 무용담은 와족에게도 전해졌다.

처음엔 족장의 자리를 버리고 간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못마땅한 마음은 옅어졌다.

천성이 착한 녀석인 데다, 타지에 나간 부족의 아이를 응원하게 되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른 비가 중원을 뒤흔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모두가 모여앉아 기뻐하는 건 와족의 소소한 낙이 된 지 오래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내는 마른 비를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쿨룩, 쿨룩…! 하아……. 탁한 눈깔을 보자마자 알았다. 눈은 달려 있지만 안목은 쥐뿔도 없는 놈이라는걸. 누구 보고 그 꼬맹이의 종복이라는 거냐? 오히려 비아가 어릴 때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냥술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지.”

사내는 목구멍을 넘어오는 피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

“하얀 깃이 가장 강하냐고 물었나? ‘야생에 있는 놈들’ 중엔 그렇다. 아니지, 붉은 발톱과 붙어본 건 아니니까 알 수가 없군. 정정하마. ‘야생에 있는 날짐승 중에 가장 강하다.’로.”

사내는 굴강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비웃음을 띤 어조로 말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네깟 놈들이 넘볼 존재가 아니다. 면상을 보니 비아에게 줘터지고 여기까지 흘러온 모양인데, 주제 파악하고 당장 너희의 땅으로 꺼지는 걸 추천하마.”

아픈 곳을 제대로 찌르는 독설이었다.

수령사가 미간을 찌그러뜨리더니 툭 뱉었다.

“그렇군. 다 떠들었으면 이만 죽어라.”

콰앙!

수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잃은 사내의 몸이 허물어졌다.

백수교의 수령사 황보숭은 불쾌한 기억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었고, 설산을 휘젓는 하얀 깃을 바라봤다.

“저것보다 강한 짐승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산 밑에서부터 끌고 온 짐승의 삼 분의 일이 증발해 있었다.

무엇이든 섬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야수 군단이 초라해 보일 만큼, 흰 수리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소리를 지껄일 만해. 실로 어마어마하구나.”

하지만 그래서 더욱 좋다.

저런 걸 굴복시켜 수신께 바칠 수만 있다면, 차기 대수령사의 자리는 따놓은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

황보숭은 흐뭇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술언을 읊기 시작했다.

“수신께 선택받은 피조물들이여. 그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무한한 힘이 너희를 감싸리라. 영육을 모두 내어 수신께 봉사하라.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부정한 것들에게….”

술언이 이어질수록 검은 기운이 상공에 응집됐다.

야수들의 눈자위가 피처럼 붉어지고, 안개가 깔리듯 내려앉은 검은 기운이 그것들을 감쌌다.

증폭되는 기운, 폭발하는 광기…!

짐승들의 포효가 메아리쳤다.

더욱 난폭하게 날뛰는 짐승들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솟구쳤다.

“가라! 수호수들이여! 흰 수리를 잡아서 내게 대령하라!”

“끼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의 비명과도 같은 그것은 검은 새들이 토해낸 울음이었다.

백 마리에 가까운 비조들이 날아올라 흰 수리에게 쇄도했다.

길짐승들을 도륙하던 하얀 깃은 그것들을 보며 더욱 분노했다.

―어디서 이따위 잡스런 것들을…! 뭐 하는 놈이기에 짐승들의 혼을 농락하는가!

하얀 깃이 포효를 토하며 활개를 쳤다.

그리고 양 날개를 끊어 치듯 휘둘렀다.

참격을 날리는 검사와 같은 움직임.

밑에 있는 짐승들이 딸려 올라갈 만큼 거센 바람이 뿜어졌다.

스아아악―

두텁게 시작된 기의 바람은 점점 가늘게 집약됐다.

그리고 두 줄기 칼날이 되어 적들을 덮쳤다.

투버버버벅!

뼈와 살이 갈리는 소리가 나며 검은 새들이 추락했다.

새들은 절반 가까이가 날아오르자마자 격추됐고, 살아남은 것들도 하얀 깃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사정을 봐주지 마라. 모조리 쓸어버리도록.

제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흰 수리들이 쏘아졌다.

십여 마리에 불과했지만, 녀석들은 하얀 깃의 권속에 든 야수답게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발톱과 부리가 번뜩일 때마다 검은 새들은 변변찮은 저항 한 번 못 하고 목숨을 잃었다.

흰 수리들이 하얀 깃의 곁을 비운 그때, 수령사의 외침이 터졌다.

“지금이오! 수투사들이여!”

쿠아아앙―!

대지를 박차는 소리와 함께 길짐승들의 전열이 터져 나갔다.

대형 짐승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거한들이 몸을 날린 것이다.

황보숭과 동행한 수투사는 한 명이 아니었고, 그들은 와족의 전사들을 가뿐히 제압할 정도로 강했다.

심지어 그들은 운태산에서 마른 비가 쓰러뜨린 수투사와 달리, 완성된 자들이었다.

물소, 곰, 호랑이, 악어 따위의 가죽을 걸친 거한들이 하얀 깃을 향해 폭발적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하얀 깃은 웃고 있었다.

―가소롭구나. 짐승의 혼을 깃들인 인간이라니. 이도 저도 아닌 것들로 내게 덤비는 것이냐? 대체 얼마나 얕보인 것인가.

하얀 깃이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보여주마. 설산이 잉태한 힘을.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설산의 자연기를 품은 바람이 하얀 깃을 향해 달려들었고, 날개에 깃들었다.

하얀 깃이 날개를 휘젓자, 백색 깃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너희의 시체는 영원히 얼어붙어 설산을 장식하리라.

쾌애애애액―!

그것은 깃털로 구현한 죽음의 돌풍이었다.

당가의 비수보다도 큰 깃털들은 하나하나가 막대한 자연기를 머금고 있었다.

백수교가 자랑하는 수투사들이 깃털에 관통된 채 나가떨어졌다.

온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난 그들은 피를 흘리지도 못했다.

쩌저정―!

극한의 냉기가 육체를 얼려버린 것이다.

설산의 정수가 깃든 자연기.

하얀 깃은 특정 속성기에 특화된 야수였다.

―말끔해졌구나.

수투사만이 아니었다.

하얀 깃은 작심하고 힘을 쏟아냈고, 봉우리 일대를 전부 자신의 공격 범위에 넣었다.

백색의 제왕은 장담한 대로 설산에 든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삐아아아아악―!”

하얀 깃이 승리의 울음을 토할 때였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 하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소리를 내며 부서진 얼음 사이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하마터면 몰살할 뻔했군.”

새카만 기운이 용솟음쳤다.

백수교는 작심하고 운남에 병력을 파견했고, 수투사가 그렇듯이 수령사는 황보숭만이 아니었다.

부서져 내리는 얼음 틈으로 백수교의 인물들이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하얀 깃이 흠칫할 때, 황보숭의 전음이 허공을 갈랐다.

「지금입니다! 좌호법이시여!」

휘이이잉―

칼바람 부는 허공.

구름을 뚫고 솟은 가와격박의 중앙 부근.

거구의 사내가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원숭이 가죽을 뒤집어쓴 그가 짐승처럼 외쳤다.

“후! 호! 후호오―!”

툭 떨어진 그는 화살처럼 하강했고, 수령사를 내려다보는 하얀 깃을 덮쳤다.

뻐어어어억―!

뼈가 부러지는 소리.

몸이 반으로 접힌 하얀 깃이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삐아아아악―!”

큰 기술을 쓴 직후.

황보숭은 하얀 깃이 빈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백수교 좌호법의 급습을 받은 하얀 깃이 치명상을 입고 나뒹굴었다.

“후! 하! 후하아~!”

거한은 원숭이처럼 가슴을 두드리더니 하얀 깃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를 잡고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후하하하하!”

이번 웃음은 그나마 인간 같다.

거한이 싯누런 눈으로 하얀 깃을 들여다볼 때였다.

콰아아앙!

백수교 전열의 후방이 터져 나갔다.

난데없는 소란에 수투사 한 명이 달려 나가며 주먹을 휘둘렀다.

“오오오!”

허나 수투사는 주먹을 끝까지 휘두르지도 못하고 멈췄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가 한 손으로 주먹을 받아낸 것이다.

“‘오오오’는 얼어 죽을?”

우두둑―!

사내는 수투사의 팔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웬만한 장정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으, 으으윽…!”

수투사를 가볍게 무릎 꿇린 사내가 말했다.

“니들, 뭐 하는 놈들이냐? 외지인 같은데 왜 설산에 와서….”

말을 하던 사내가 멈췄다.

피투성이가 된 채 추락한 설산의 제왕을 봤기 때문이다.

“……미친. 내가 꿈을 꾸나?”

그가 눈만 껌뻑일 때, 날렵한 사내 한 명이 나섰다.

“아니, 산아. 제대로 봤다. 이놈들, 하얀 깃을 사냥하러 온 모양이야.”

안개걸음이었다.

둘의 키와 덩치는 몇 년 전보다 더욱 커져 있었고, 온몸엔 흉터가 가득했다.

심상치 않은 사내들의 등장에 백수교 인물들이 긴장할 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대규모로 이동한 흔적을 따라왔는데 이게 웬….”

늘씬한 체구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러자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던 산과 안개걸음이 좌우로 물러섰다.

“족장님.”

홀로 걸어 나온 여인은 설산의 상황을 훑었다.

그리고 좌호법에게 머리를 붙잡힌 하얀 깃에 이르렀을 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니들, 뭐 하는 놈들이야?”

“후호호!”

대답 대신 나온 건 좌호법의 비웃음소리였다.

노을이 이빨을 까드득 깨물며 말했다.

“짐승 새끼가……. 알 필요 없겠지. 전부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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