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50화 (350/463)

350화

집단의 명운을 건 전쟁은 해당 구성원에게 심대한 상처를 남긴다.

불구가 된 몸, 꺾여버린 투지, 다신 볼 수 없게 된 가족과, 마음을 병들게 할 원망과 증오…….

그런 면에서 와족과 점창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큰 피해를 보긴 했지만 둘 다 전쟁을 딛고 일어섰으며, 공존하는 미래로 나아갔으니까.

와족은 처음으로 이민족 무력 집단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점창은 썩어버린 문내를 개혁했다.

그리고 양 집단의 젊은이들은 미증유의 사태를 맞이해 힘을 합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은 서로의 장점을 흡수했다는 점이다.

와족 족장의 입에서 한족의 군진을 떠올리게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양익진(兩翼陣). 선공후수(先攻後守).”

무수히 손을 맞춘 듯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일었다.

숨 한 번 들이켤 사이에 진영을 갖춘 와족의 전사들이 눈을 번뜩였다.

노을의 언어엔 힘이 깃들었으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수장이 된 자의 권위가 흘러넘쳤다.

“전부 쓸어버려. 격(挌).”

콰아앙―!

와족 비전, 번갯불.

백 명이 넘는 전사들이 일시에 펼치는 돌진기는 벼락과 같았다.

양 날개를 편 와족 전사단이 한꺼번에 사라졌다가 백수교의 코앞에 나타났다.

적들이 헛바람을 삼킬 시간도 주지 않는 급습!

백수교가 눈을 부릅뜰 때, 전사단의 권각은 이미 그들의 육신에 꽂혀 있었다.

“아악!”

“크어억…!”

나무표범 전사들은 단 한 방으로 백수교의 외곽을 허물어뜨렸다.

그들의 숫자와 같은 수의 수인이 나뒹굴 때, 바람이 일었다.

후아아악―!

검은 수리.

나무표범의 뒤를 바짝 쫓은 전사들이 은신을 풀고 솟구쳤다.

그들은 빨랐으며, 놀랍도록 치명적이었다.

투확! 빠바박―!

심지어 검은 수리들은 단타에 그치지 않았다.

올빼미 사냥이 작렬한 순간, 두세 명의 적이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속공에 이은 암습.

백수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백이 넘는 수인과 청기가 전투불능이 된 뒤였다.

“무, 물러나라! 수투사여! 그대들이 시간을 벌어주시게!”

황보숭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들은 말 몇 마디 섞더니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운태산에서 충돌한 수천 사냥꾼들을 상회하는 움직임.

얼굴을 보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풋내기들인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투사의 면모가 엿보였다.

“걱정 마시오, 수령사!”

황보숭을 호위하고 있던 수투사들이 달려 나갔다.

온몸에서 넘실대는 패력.

이들이야말로 백수교의 주축을 이루는 정예들이었다.

수투사가 수인과 청기의 물결을 헤칠 때, 노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은 강해. 우리가 숫자에서도 밀린다. 무리하지 마.”

노을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위 곰 전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선공후수.

성공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니, 이제는 지키고 방어할 때다.

수투사들이 쇄도할 무렵, 바위 곰 전사들이 뿌리 내리기를 시전했다.

“오오오오!”

“중원 놈들의 힘은 어떤지 보자꾸나! 덤벼라!”

투콰아아앙!

힘과 힘이 작렬한다.

병장기 없이 맨몸으로 부딪힌 거한들은 인간의 탈을 쓴 곰들이 싸우는 것 같았다.

주먹이 날아들고, 어깨가 충돌한다.

발에 걷어차인 수투사가 피를 뿜고, 정권을 허용한 바위 곰 전사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박치기에 얼굴이 함몰되는 한편, 적의 머리를 감싸 쥐고 그대로 터뜨려버리는 무지막지한 싸움이 벌어졌다.

병장기 없는 박투는 짐승들의 원초적인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밀리지 않는다고?!”

우위인 건 맞는데, 쉽게 밀어내지 못한다.

수투사들의 발이 멈추자 황보숭이 신음을 흘렸다.

인간이 뿜어낸 독소가 시대를 비틀고 잠식할 거라는 감택의 예언.

어그러지는 천기를 비집고 나온 백수교의 정예를 상대로, 와족 전사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되, 되었다! 당장 빙의를 시전하라!”

황보숭의 외침에선 다급함이 묻어났다.

백수교의 후방, 술언을 완성한 수령사와 영매사들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수의 영과 하나 됨을 허락하노니…!”

“후오오오~!”

수령사들은 수투사에게로, 영매사들은 수인과 청기에게로.

음험하게 꿈틀대는 술력은 설산과 대비되는 검은빛을 품고 있었다.

짐승을 닮은 인간들이 완연한 짐승으로 탈바꿈했다.

“카아아악!”

“크롸라라라!”

눈자위가 붉어진 백수교가 쇄도하자, 와족의 진형이 출렁였다.

갑자기 증폭된 기운.

바위 곰 전사들의 표정에서 힘겨움이 묻어났다.

“술법인가?”

허나 노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온 와족의 우두머리답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나무표범. 수리의 눈. 후속타를 준비하라. 바위 곰, 뚫리면 안 돼. 잠시만 버텨.”

적들을 감싸듯 넓게 펼친 진형의 중앙에서, 노을이 좌우를 흘깃 돌아봤다.

“걸음이 오빠. 산이 오빠. 가세해.”

그 순간, 양 날개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일었다.

다른 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력.

나무표범과 바위 곰의 수장이 진신전력을 드러냈다.

“그 말만을 기다렸습니다, 족장님.”

“거 말 좀 놓으십쇼! 대가리면 말 놔도 됩니다! 족장의 입에서 오빠가 뭡니까? 오빠가!”

안개걸음과 산이 흉포한 기세를 뿜으며 날아올랐다.

그믐의 집중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쌓은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맹수에 가까운 기운을 풍겼다.

노을은 피식 웃더니 여유 있게 받아쳤다.

“내 마음이야. 내가 대가리니까.”

노을의 말이 끝나는 순간, 폭음이 터졌다.

안개걸음과 산은 작심하고 초격을 날렸고, 불벼락과 천둥바위가 작렬하자 전장에 원형의 공터가 생겼다.

증발해버린 피와 검게 탄 육편.

놀랍게도 그들의 일격엔 각각 화염과 뇌전의 속성기가 담겨 있었다.

“크어어엉!”

수투사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덩치를 지닌 자가 달려왔다.

산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검은 기운이 이글거리는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냈다.

“흠. 제법 묵직하네. 확실히 일반 전사들에겐 쉽지 않겠어.”

수투사는 곰이 앞발을 휘두르듯 다른 쪽 주먹을 날렸다.

산은 그것까지 붙잡은 뒤에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너희 대체 뭐냐? 설마 지금 짐승 흉내내는 거냐?”

“크어엉! 크왕…!”

산의 질문에도 수투사는 곰의 울음소리만 냈다.

그리고 잡힌 주먹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야, 충고 하나 해주자면 너흰 방향을 잘못 잡았어. 이성을 유지하면서 짐승의 싸움법이나 장기를 참고해야지, 아예 짐승이 돼버리면….”

수투사는 야단법석을 떨다가 안 되겠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산의 어깨를 물었다.

턱과 이빨에까지 검은 기운이 스몄지만, 산의 근육이 뚫릴 리 없었다.

“참나… 가지가지 하네, 진짜. 모방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인간의 육신으로 곰의 힘을 내려면 말야….”

산의 눈이 푸르게 번쩍였다.

그리고 크게 휘두른 주먹이 대기를 밀어젖혔다.

“이렇게 하는 거야.”

무지막지한 권격이 수투사를 후려갈겼다.

산의 비기, 곰 발은 그의 상반신을 날리는 걸로도 모자라 뒤에서 달려드는 수인과 청기들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백수교의 전열이 주춤하는 순간, 노을의 입술이 열렸다.

“양 날개가 적들을 완전히 감쌌다. 교차진(交叉陣). 뭉개버려.”

쾌애애액―!

바위 곰 뒤에서 나무표범과 검은 수리가 날아올랐다.

그들의 얼굴에선 다채로운 무늬가 번쩍였고, 전투화장은 세상 어떤 술법에도 밀리지 않는 신기였다.

진형을 갖추지 않고 무작정 달려든 백수교는 와족 전사들에게 단단히 물렸고, 좌익과 우익이 서로를 교차하며 적들을 찢어발겼다.

점창으로부터 전해진 군진은 노을에게 이르러 완연한 꽃을 피웠다.

“이럴… 수가!”

황보숭이 말을 절며 부르르 떨었다.

운태산에서도, 이곳에서도 수왕이나 그에 관련된 자들에게 가로막히고 있다.

더 기분이 나쁜 건 그놈들도 짐승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네 이년! 수왕의 종복! 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냐!”

황보숭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쳤다.

노을은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수왕? 비아를 아는 모양이네? 근데 누구보고 종복이라는 거야? 걔가 중원에서는 왕일지 몰라도 여기선 아냐.”

그러고는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선 내가 대가리라고.”

황보숭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노을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숫자의 열세에도 그녀는 여유를 잃지 않았고, 반드시 이기리란 확신이 있는 듯했다.

노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건 황보숭의 발밑에 있는 시체를 본 뒤였다.

“잠깐. 그 복장… 설마…….”

그 순간, 황보숭의 표정도 변했다.

그는 비열하게 웃었고, 나무표범 전사의 시체를 발로 툭 찼다.

“이 쓰레기 말인가? 주제도 모르고 덤비기에 호된 맛을 보여줬지. 왜, 아는 자인가?”

노을은 침묵했다.

조 하나가 합류하지 않고 연락이 끊겼기에 염려하고 있었는데, 이놈들을 마주친 거였다.

목이 날아간 시체는 처참했고,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머지 둘은?”

“뻔하지 않나. 수호수들의 먹이로 던져줬지.”

황보숭은 도발의 수위를 높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염원했다.

‘걸려라. 앞으로 나오란 말이다, 계집아!’

그의 바람대로, 노을이 양익진의 중앙에서 걸어 나왔다.

“하얀 깃을 공격한 것도 용서가 안 되는데, 우리 식구들까지 건드렸단 말이지?”

노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발이 휘날렸다.

그녀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녀가 내뿜는 기운이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전장 전체를 짓누르는 기세.

노을이 움직이자 난마로 뒤얽힌 전장이 고요해졌다.

‘조, 조금만 더…….’

그녀는 스스로 우두머리란 말을 뱉을 만했다.

이성이 날아간 수인들이 낑낑대며 두려워할 정도였으니까.

노을이 홀로 전장을 이탈하여 가까이 왔을 때, 황보숭이 외쳤다.

“지금이다! 쳐라!”

꾹꾹 눌러서 갈무리한 술력.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치솟으며 전장의 외곽을 뒤덮었다.

짐승을 흉내낸 울음소리가 아닌, 진짜 짐승의 포효가 터졌다.

“크아아아앙!”

“커허허헝!”

강화된 짐승과 기형수, 그리고 수호수.

설산에 오른 야수들은 하얀 깃에게 몰살했지만, 봉우리 밑에서 꾸역꾸역 기어 올라온 것들은 어느새 수백에 이르렀다.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촘촘히 배치한 짐승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준비한 게 고작 이거야?”

하지만, 노을은 태연했다.

『멈춰.』

두쿵―!

심장 소리가 몸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음향이었다.

백수의 위에 군림하는 여제의 명령에, 개미 떼처럼 밀려들던 야수들이 일시에 멈췄다.

『꿇어.』

휘날리는 눈 속에 오롯이 선 여인과, 대가리를 처박고서 부들대는 괴수들.

뛰어난 오성으로 뇌력을 극한까지 개방한 노을은 야수 제어의 위압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를 받아든 사람처럼 짐승들을 돌아보지도 않았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언제 튀어나올래?”

노을의 물음에 황보숭이 움찔했다.

그는 두려운 듯 노을의 눈치를 살폈다가 땅에 엎드린 짐승들을 둘러봤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달려들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억누르는 느낌.

그걸 확인한 황보숭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언제냐고? 아마도… 지금?”

후아아악―!

거대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음향.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한은 어느새 노을의 정수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엇! 족장님, 조심…!”

전장의 추이에 주의를 빼앗긴 상황.

수백의 짐승들을 묶어놓은 기예.

황보숭이 노을을 잡기 위해 준비한 건 야수들 따위가 아니었다.

노인의 얼굴에 살소가 떠오를 때, 붉은 입술이 열렸다.

“누굴 바보로 아나. 그 커다란 놈이 사라졌는데 모를 줄 알았어?”

키이잉―!

고개가 돌아가고, 여제의 눈이 빛났다.

노을은 흠칫하는 좌호법의 표정을 즐기듯이 말했다.

“너 말야, 너. 쥐새끼처럼 숨어 있더니 죽으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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