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후하아!”
쇠망치 같은 주먹이 내리꽂혔다.
마주쳐간 손은 가냘프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투쾅―!
거한의 주먹과 여인의 손.
평범한 상황이라면 가녀린 손이 뭉개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밀린 건 거한이었다.
“후호?!”
사선으로 그어 올린 독수리 사냥이 좌호법의 주먹을 튕겨 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의 거체가 하늘로 딸려 올라갔다.
회심의 급습이 무산된 원숭이 인간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뭘 이 정도에 놀라? 이제 시작인데.”
노을의 사전에 방심 따윈 없었다.
경위야 어찌 됐든 하얀 깃을 쓰러뜨린 놈이었고, 그렇다면 자신보다 강할 수도 있는 상대였다.
노을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탓!
도약음이 귓가를 스칠 때, 그녀는 이미 좌호법에게 밀착해 있었다.
“마디 깨기.”
눈, 목젖, 명치, 낭심부터 관절과 혈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급소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작은 힘으로도 인간을 망가뜨릴 수 있는 취약점이다.
뼈마디를 산산이 부수기 위한 관절기가 좌호법의 사지를 공략했다.
퓨퓨퓻! 우드득! 뿌득!
찌르고, 비틀며, 꺾는 동시에 부순다.
튕겨나간 팔을 수습하기도 전에, 좌호법의 사지 관절이 섬뜩한 파열음을 토했다.
“크아아악…!”
시종일관 원숭이 울음을 흉내내더니 아플 때는 사람의 비명을 지른다.
실로 같잖은 놈이었다.
놈의 손에 붙들렸던 하얀 깃을 떠올리자, 절로 살심이 일었다.
순식간에 등 뒤로 돌아간 노을이 좌호법의 목을 휘감았고, 그대로 꺾었다.
“죽어.”
우드드득!
교살(絞殺).
겨울 달이 호국영과의 악연을 정리할 때 썼던 기술이다.
완전히 꺾여서 뒤로 돌아간 좌호법의 입에서 구린 악취가 풍겼다.
“저승에선 이 좀 닦아라. 지저분한 놈.”
습격과 방어, 도약에서 착지까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을은 수투사들이 가세하기도 전에 백수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뽑아버렸다.
“어, 어엇…!”
백수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엄청나구나!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그새 더 빠르고 정교해졌다!”
와족의 전사들은 감탄했다.
노을의 능력을 알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강할 뿐만 아니라 과감하고 단호했다.
무력과 지력, 인망과 지휘력에 더해 결단력까지.
설산의 한복판에서 와족 최초의 여족장이 찬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우드드득, 뿌득.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눈길이 향한 곳엔 즉사했어야 할 좌호법이 우뚝 서 있었다.
거꾸로 돌아갔던 고개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후하…! 허무하게 뒈질 뻔했군.”
그는 검은 기운에 휩싸여 있었고, 저 멀리 땀을 뻘뻘 흘리는 황보숭이 보였다.
좌호법은 목을 뚜둑 꺾더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목덜미를 주물렀다.
운태산에서 마른 비가 목격했던 회생의 술.
노을도 이번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뼈가 돌아갔는데… 죽지 않았다고?”
점창과의 전쟁을 거치며 와족의 신념엔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은 돕고, 지키며, 더불어 사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그럴 가치가 없는 자들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폐인이 돼버린 저 공지량처럼.
노을의 눈에 비친 백수교는 악의 덩어리 그 자체였고, 그렇기에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분명히 부쉈어. 돌아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박살이 났다고!’
목만이 아니었다.
골절을 넘어 분쇄됐던 사지가 멀쩡하다.
단순히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 전투가 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치유됐다.
원숭이 가죽을 뒤집어쓴 거한이 태연한 어조로 중얼댔다.
“수의 영과 동조율이 높은 자일수록 본교 비술의 효과를 잘 받지. 내가 수투사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방금 전의 한 수로 끝났을 텐데. 아쉽겠구나, 계집아.”
좌호법은 혀를 날름거리더니 황보숭을 돌아봤다.
“변방의 촌구석에서 이런 강자를 만날 줄이야. 늙은이, 빙의를 준비해라.”
“이미 걸어두었습니다, 좌호법님. 언제든 발동하시면 됩니다.”
좌호법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좋아. 역시 빠릿빠릿해. 늙은 것들은 꼴도 보기 싫지만 넌 제법 쓸 만하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좌호법님.”
황보숭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 세고 야심만만한 그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노인은 애써 웃었지만, 좌호법의 눈초리는 사나워졌다.
“표정 봐라? 왜? 기분이 나쁘다 그거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그저 뭐?”
말이 끝나는 순간, 좌호법은 황보숭의 옆에 서 있었다.
노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빨라…!’
짜악!
황보숭은 뭐가 자신을 때렸는지도 모른 채 뺨을 맞고 나뒹굴었다.
“그렇게 얘기해도 애새끼들이 표정 관리를 못 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웃으란 말이다. 성심성의껏 진심을 다해서. 그게 어렵냐?”
좌호법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황보숭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는 가혹한 매질이 이어졌다.
‘……화풀이.’
노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좌호법이란 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당한 창피함과 분노를 수하에게 풀고 있는 것이리라.
“윽! 크훅…!”
황보숭은 뺨을 맞고 좌우로 고개가 돌아가면서도 얼굴 근육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피투성이가 돼서 팅팅 부은 노인이 웃기 위해 애쓰는 건 적이라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이거 봐. 웃으니까 좋잖아. 처맞기 전에 이러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그, 그러스니다. 자호버니.”
이빨이 빠진 건지, 볼이 부은 건지 황보숭은 발음이 샜다.
좌호법은 기분이 풀렸는지 가슴을 쾅쾅 두드리더니 또다시 원숭이 흉내를 냈다.
“후! 하! 후하아!”
외모부터 하는 짓까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괴인이었다.
어쩌면 계속 그러고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
인간의 말을 꺼내기 시작한 좌호법은 생긴 것 이상으로 더러운 말을 쏟아냈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아주 맛있게 생긴 계집이 아닌가. 중원의 것들과는 다른 냄새가 나. 저년을 잡으면 당분간 본좌의 물건이 비명을 지르겠구나.”
좌호법은 노을을 바라보며 땟국 가득한 손으로 하체를 어루만졌다.
흉측한 물건이 바지 위로 솟아 있었다.
욕설이 절로 나는 상황이었지만, 노을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원에는 별의별 종자들이 다 있네. 살다 살다 이런 쓰레기는 처음 봐.”
노을은 침착했지만, 와족의 전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족장이 모욕 받는 걸 참지 못했고, 욕설을 뱉으며 날아올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멈춰! 다들 움직이지 마!”
노을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앞뒤 안 가리고 좌호법에게 달려들었으리라.
와족 전사들이 덜컥 멈추자, 원숭이 괴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후흐흐. 안 통하나? 머리도 좋은 계집이군.”
좌호법의 양손엔 어느새 시커먼 기운이 응집돼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포진한 수투사와 수인, 청기들이 움찔댔다.
와족 전사들이 달려들면 요격하려던 게 분명했다.
적의 진형을 흩뜨리고 끌어들이기 위한 도발.
인성이 썩었을 뿐, 좌호법은 나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 같았다.
“후하아! 안 되겠어. 흥이 올랐는데 풀 방법이 없잖나. 우리 예쁜이는 어디 갔지?”
이번에는 아군인 백수교도 동요했다.
눈치로 보아 그가 ‘예쁜이’라고 부른 자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좌호법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몸을 날렸다.
황보숭에게 이동하던 때와 같은 극속의 신법이었다.
노을이 눈살을 좁힐 때, 그는 수투사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에게 접근해 있었다.
생기가 꺼진 눈빛.
거기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여인이었다.
“잘 있었나, 예쁜이?”
전장에서 뭐 하는 짓거린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백수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좌호법은 그녀에게 다가갔고, 눈살을 찌푸릴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의 얼굴을 혀로 핥은 것이다.
“아까워. 너무나 아깝다. 이런 진미를 두고도 맛보지 못하다니. 미쳐버릴 노릇이야.”
백수교 교도들이 침음을 흘렸다.
노을은 좌호법의 더러운 짓거리에 분노하는 한편, 그들의 반응을 보며 의아해졌다.
‘저 여인이 대체 누구길래?’
여인을 찾는 자들이 봤다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리라.
그녀는 운태산에서 납치당한 수천의 엽주, 옥예린이었다.
총명한 눈빛과, 공중 살법을 구사하며 펄펄 날던 여걸은 온데간데없었다.
시커멓게 죽은 눈동자와 생기 없는 얼굴은 혼이 빠진 인형을 보는 듯했다.
좌호법은 입맛을 다시더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후하아! 그럼 아쉬운 대로….”
도저히 더 이상은 두고 보기 힘들다.
원숭이 괴인은 우두커니 선 옥예린의 상반신을 주물럭거렸다.
욕지기가 치미는 광경.
노을이 이를 아드득 깨물며 나설 때, 목소리가 들렸다.
“좌호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분은 수신의 점지를 받은 몸. 곧 본교의 안주인이 되실지도 모릅니다.”
백수교의 인물들이 동요한 이유였다.
좌호법이 이러는 건 처음이 아닌 듯했고, 신성한 존재가, 아니, 언젠가 그런 위치에 오를지도 모를 사람이 희롱당하는 걸 지켜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백수교에도 인물은 있는지, 옥예린의 호위를 맡은 수투사는 개차반 같은 상관 앞에서도 또박또박 할 말을 했다.
“물러서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이분을 욕보이지 말 것을 권유 드립니다. 우호법께서도 신신당부 하지 않으셨습니까.”
명분에 입각한 제언.
그리고 또 다른 호법의 위세를 빌린 종용.
짐승이나 다름없는 놈도 이번만큼은 막 나가기 어려웠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멀어졌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카아아악!”
발을 떼던 좌호법이 휙 돌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그를 물러서게 한 수투사는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른 채 상반신이 날아가 버렸다.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감히…! 이년은 아직 정식으로 입교하지 않았다! 아직은 내가 위란 말이다!”
좌호법은 발작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우호법 그 새끼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상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라! 난 아직 그놈에게 진 게 아니야! 언제고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세상에 미친놈은 많다지만, 이런 인간 망종은 또 없을 것이다.
좌호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신을 잃은 여인을 강제로 데리고 다니는 놈들도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놈들…!’
마른 비가 백수교에게 악연을 느꼈듯이 노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얀 깃을 사냥하려 한 것과 식구를 건든 것.
정신을 잃은 짐승들을 모종의 방법으로 거둬 입맛대로 활용하는 것과 연약한 여인을 핍박하는 것.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좌호법을 보며, 노을은 이들이 필생의 숙적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너, 이름이 뭐야.”
광인처럼 발작하던 괴인이 주춤했다.
그리고 노을을 보더니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하하! 맞다! 네가 있었구나! 네년이 본좌의 뜨거운 몸을 달래줘야겠다!”
좌호법은 양팔을 쫙 벌리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옹개. 본좌의 존함은 옹개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백수교의 좌호법이자, 널 지배할 남자의 이름이니라!”
노을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대꾸했다.
“옹개. 그래, 기억하겠어. 내 의지로 죽이는 첫 번째 인간이 될 테니까.”
인간과 짐승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와족의 새로운 족장이 선언했다.
“백수교라고 했지? 이 순간부터 너희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너희는 살려두면 세상천지에 해악을 끼칠 놈들이야. 백수교의 이름을 단 것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 멸망을 각오하도록.”
설산의 눈을 휘감은 여제가 자신의 반려수에게 명했다.
“칼바람. 쓸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