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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52화 (352/463)

352화

“삐아아아악!”

비조의 울음이 설산에 메아리쳤다.

뒤이어 하얀 깃을 쏙 빼닮은 흰 수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옹개가 고개를 드는 순간, 백광(白光)이 그를 덮쳤다.

“헛…?!”

알아챈 게 너무 늦었다.

칼바람은 공간을 압축하며 곤두박질쳤고, 그 속도는 빛과 같았다.

옹개는 반격이나 회피는커녕 팔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투쾅―!

폭음이 터지고, 눈발이 휘날린다.

칼바람의 일격은 만년설을 깨부수고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중심엔 양팔이 작살 난 채 널브러진 옹개가 있었다.

“커, 커허…….”

본좌 어쩌고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두개골에도 금이 갔는지 옹개는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칼바람의 비기 ‘눈 벼락’은 단 한 방으로 백수교의 좌호법을 침몰시켰다.

“허약하네. 그따위 실력으로 헛소릴 내뱉은 거야?”

하얀 깃을 쓰러뜨린 것과 극속의 기동.

노을은 옹개가 숨겨둔 한 수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것인데…….

놈은 많이 쳐줘야 산이나 안개걸음과 비슷한 정도였다.

아니, 제대로 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 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는데. 착각이었나?”

노을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옹개를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칼바람을 보며 끝내라고 고개를 까닥였다.

“놔두면 또 회복할 거야. 완전히 끝장을 내.”

칼바람도 체공 상태로 머물며 옹개를 보고 있었다.

녀석은 이렇게 허약한 놈에게 아비가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삐아악!”

복수의 우선권은 혈육에게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든 짐승에게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불문율일지니.

노을은 마무리를 칼바람에게 넘기고 백수교를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웃어?’

백수교도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싶을 때, 아래쪽에서 웃음이 들려왔다.

“크흐, 푸흐흐, 푸흐흐흣…….”

옹개였다.

놈은 대체 어떻게 일어섰을까 싶을 만큼 만신창이였는데, 초점이 좌우로 돌아간 눈을 하고서 웃고 있었다.

“푸하! 크하하! 카하하핫!”

우드드드득!

돌아간 목을 제자리로 돌리는 검은 기운.

그것이 옹개의 몸 주위에 일렁거리자, 박살 나서 덜렁거리던 팔이 제 위치를 찾았다.

“칫!”

노을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처음에 느꼈던, 음험하고도 위험한 기운이 스멀거린다.

놈이 몸을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야 했다.

“카아아앗!”

노을과 칼바람이 동시에 달려들 때, 옹개의 눈이 초점을 찾았다.

그가 양팔을 쫙 벌리자, 몸에서 검은빛이 폭발했다.

“윽…!”

내공과 주술이 혼합된 기운.

노을과 칼바람을 밀어낸 옹개가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크하하! 크하…! 후호! 후호아!”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화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놈의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팔뚝이 커지고, 허벅지가 부푼다.

가슴과 배가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빵빵해지더니 근육이 철갑처럼 단단해졌다.

“……뭐야, 저게?”

꿈을 꾸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놈의 피부가 갈라졌다.

동시에 성장을 마친 육체가 커지고 있었다.

“후하아…!”

변이를 마친 옹개가 상쾌한 얼굴로 숨을 토했다.

노을을 올려다보는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네. 무슨 짓을 하면 이런….”

믿기지 않게도 옹개는 송곳니까지 자라 있었다.

원래 산과 비슷했던 놈이 더 커지자, 이제는 우둔한 땅에 견줄 만한 체구가 됐다.

털만 없다뿐이지, 이건 거대한 괴수나 다름없었다.

‘괴후…!’

성년식을 떠나기 전, 운남을 떠들썩하게 만든 짐승.

노을은 괴후를 보지 못했지만,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쿠하아!”

옹개는 노을이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검은빛이 번쩍이는 순간, 바윗덩이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까불지 마!”

아무리 커져도 인간인 이상 급소는 변하지 않는다.

주먹을 흘린 노을이 옹개의 팔을 붙들었다.

“하앗!”

온몸으로 시전하는 관절기!

노을은 나무줄기 같은 팔뚝을 있는 힘껏 꺾었다.

우드드….

‘안 꺾여?!’

설원의 정수가 깃든 자연기를 쏟아 부었는데도 돌아가지 않는다.

옹개는 팔에 달라붙은 노을을 보며 웃었다.

“후하하하!”

마음껏 까불어 보라는 눈빛이다.

야생에서 터득한 감각이 맹렬하게 경고했다.

당장 떨어지라고.

후우욱―!

팔뚝을 놓자마자, 다른 쪽 주먹이 눈앞을 스쳤다.

무방비로 맞았다면 즉사했을 일격.

힘도, 속도도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노을은 가세하려는 칼바람을 물리는 한편 거리를 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휘아아악―!

옹개가 재깍 따라붙으며 주먹을 올려 쳤다.

손등이 땅을 향한 마구잡이 공격은 원숭이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깃든 파괴력은 초월적이었다.

노을은 눈을 부릅뜨며 팔다리에 자연기를 때려 부었다.

투콰아앙!

흩날리는 눈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여인…….

와족 전사들의 비명이 터졌다.

“족장님!!!”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던 노을이 움찔했다.

그녀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더니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후우…….”

전대 부족장이자 바위 곰의 수장.

옹개의 일격은 우둔한 땅에게 정타를 허용한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방어를 한 팔다리가 시큰하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비대해진 몸만큼이나 힘도 증폭된 것이다.

옹개는 어떠냐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후하하하! 후하아~!”

변하기 전과 같은 게 있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양물(陽物).

몸이 커지며 덩달아 부풀었는지 놈의 물건은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더러운 새끼. 욕 나오게 만드네, 진짜.”

노을은 입 안에 고인 침을 퉤 뱉었다.

“이거였나.”

칼바람과 연을 맺고, 설산의 정수를 나누어 가진 날.

하얀 깃은 말했었다.

대자연이 너를 선택했노라고.

힘이 주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에 합당한 업을 짊어지게 될 거라고.

필연처럼 마주친 적 앞에서, 노을은 자신의 사명을 자각했다.

‘운남의 인간… 짐승……. 자연…!’

존재 자체가 독인 자들이 운남의 경계를 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놈들이 밑으로 내려오기 전에, 북쪽 끝에서 자신들과 마주쳤다.

하얀 깃마저 거리낌 없이 사냥하는 자들.

이런 놈들이 운남에 침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서 막아야 해!’

와족 전사들은 짐승의 습격으로부터 소수부족을 구하기 위해 운남 각지에 퍼져 있다.

그리고 점창의 주력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갔다.

지금 여기서 막지 못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리라.

노을은 악몽을 응축해 놓은 듯한 괴인을 노려봤다.

“칼바람. 하얀 깃의 흰 수리들을 지휘해.”

〔……혼자 싸우려고? 안 돼! 놈은 강하다!〕

칼바람이 의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노을은 강대한 적에게 똑바로 걸어가며 웃었다.

“알아. 하지만 그분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해.”

노을의 눈은 그가 아는 최강의 전사를 그리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기상과 끝을 모를 힘.

자신과 산, 안개걸음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그분과 비교하면, 이런 놈은 덩치만 큰 약골에 불과했다.

“이딴 놈을 꺾지 못해서야 어디 가서 와족의 족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

키이이잉!

고대의 술식이 빛을 발하자,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번뜩였다.

“걱정 마. 내가 더 강해.”

전투화장이 타오르는 순간, 푸른빛과 검은빛이 충돌하며 설산의 얼음을 녹였다.

* * *

풍검대주 주상은 막 잠자리에 드는 참이었다.

연일 밀려드는 보고를 처리하느라 삼 일 동안 철야를 해야만 했다.

침상에 눕자, 온몸이 녹아버릴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후후후.”

그래도 그는 웃었다.

한시름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창이 중원에 진출한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처음엔 우려가 컸지만, 들려오는 건 승전보뿐이었다.

사문의 정예들은 운남을 넘자마자 정사대전의 진원지를 향해 파죽지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진격은 질풍과 같았고, 중원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점창의 힘에 놀란 사도련이 특전대를 파견하여 서쪽을 봉쇄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면 위험한 고비들이 닥치겠지만, 주상은 걱정하지 않았다.

‘규, 유립, 승…! 대견하구나. 정말 잘해주고 있어!’

여휘의 가르침 덕분일까?

그들은 중원을 놀라게 한 점창의 정예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사파의 이름난 무인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겼고, 이제는 선봉을 도맡고 있었다.

항상 자신과 티격태격하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호검대주 조광이 뒤를 받치니, 패군 같은 괴물을 만나지 않는 이상 큰일은 없을 터였다.

‘피곤하군.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 잠시 눈 좀 붙이고….’

그래 봤자 겨우 두 시진 정도 잘 수 있을 뿐이다.

수마가 덮쳐오는 걸 느끼며, 주상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똑, 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곤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주님! 급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주상은 피로를 이겨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정사대전에 참전한 제자들이…! 아무래도 회의실로 오셔서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복장을 보니 응목대에 소속된 대원이었다.

주상은 겉옷을 걸치며 그를 따라나섰다.

“설마 제자들이 다친 것이냐?!”

걸음을 옮기던 주상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복장도, 얼굴도 응목대원이 맞는데 한참이나 못 보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주상은 멈춰 서서 물었다.

“……상일? 상일이 아닌가? 자네가 왜….”

상일이라 불린 사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경황이 없으실 텐데 눈썰미는 여전하시구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대주께 감정은 없소. 이럴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하시길.”

퀴아아악―!

어두컴컴한 복도에 바람이 일었다.

사방에서 일어난 그림자들이 주상을 덮쳤다.

“이, 이게 무슨 짓…!”

그 와중에도 주상은 서너 명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기습은 절묘했고, 적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다.

목덜미를 가격당하고 쓰러지는 주상에게, 상일이 말했다.

“죽이진 않소. 안심하고 푹 주무시구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

대장로들의 처소에는 최악의 침입자가 방문해 있었다.

“……장문인?!”

사 년 전에 스스로 내공을 폐한 이후, 봉검과 운검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이제는 거동도 어려운 상태였다.

여느 노인들처럼 밤잠을 설치던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공지량이었다.

“오랜만이군. 그간 별래무양 하셨소?”

그는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심지어 무공까지 상당히 회복한 듯했다.

사지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박살 나 폐인이 된 그가 이렇듯 건재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봉검과 운검은 기뻐할 수 없었다.

“놀랍… 구려. 어떻게 이런 일이…!”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봉검과 운검이 말을 더듬었다.

허나 그들은 빠르게 평정을 찾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시기에 기별도 없이 우릴 찾다니……. 심지어 옛 응목대의 정예들을 줄줄이 끌고서….”

대장로들을 지키는 무인들은 응목대의 암습에 당해 전원이 포박돼 있었다.

그걸로 확실해졌다.

공지량의 방문 목적이 절대 인사나 나누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

“후흐흐. 참으로 상쾌한 밤이구려. 당신들에게 할 말이 산더미 같지만…… 잠시 미뤄두도록 하지. 지금은 서둘러야 할 때니까.”

공지량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봉검과 운검의 배를 냅다 걷어찼다.

그는 피를 뿜으며 나뒹군 노인들을 확인하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마땅히 그대들이 있어야 할 자리와 원래 내 것이었던 걸 되찾기 위한 성전(聖戰)이다. 그리고 이놈들이 벌여놓은 한심한 짓거리를 수습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지.”

공지량이 당부하듯 덧붙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도록.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이들이 지금 우리의 행동을 칭송할 것이다.”

그가 옆에 부복한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몽념.”

“예, 장문인.”

“계획대로 창산의 뒤처리를 일임하마. 늙은이들과 주 대주를 인질로 풍검대를 무릎 꿇려라. 놈들만 제압하면 어린 제자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

“맡겨주십시오.”

공지량의 눈은 사천과 운남의 경계 어딘가를 더듬고 있었다.

“나는 당가주와의 접선 장소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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