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53화 (353/463)

353화

* * *

운남과 사천의 경계.

밀림이 아직 걷히지 않아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깊고 어두운 그곳에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막사 하나가 설치됐다.

검은 옷과 진녹색 옷을 입은 무인들이 주위를 살피는 가운데, 막사에 든 두 명이 서로를 마주 봤다.

“당황스럽군요.”

당건휘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썰미 있는 자라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일 뿐, 그의 눈동자가 평온한 걸 알아챌 것이다.

공지량이 그걸 놓칠 리 없었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가주. 시간이 없소이다. 무의미한 탐색은 관둡시다. 도와줄 것이오, 말 것이오?”

무얼 도와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도직입적인 태도였다.

당건휘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장문인의 말씀은 알겠소이다. 와족이란 부족이 천인공노할 자들이라 이거지요? 가만히 있는 점창을 공격하여 커다란 피해를 입혔고, 봉문을 강요하는 바람에 그간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당문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허나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장문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오? 본가는 뼈대 있는 명가이며, 사천을 대표하는 세가요. 확실한 명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소이다.”

당건휘의 어조는 느긋했다.

자신이 우위에 선 입장이며, 회담이 결렬되면 아쉬운 건 공지량이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놈을 배출한 부족이라…….’

당건휘는 마른 비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와족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이 점창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아냈다.

발밑에 그런 엄청난 세력이 존재한다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와족에 대해 캐기 위해 점창 장문인에게 대면을 요청한 것인데…….

‘명목만 장문인일 뿐 너는 문파에서 축출된 지 오래잖아?’

뒤늦게 접한 정보였다.

공지량이 무공을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됐으며,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잘못된 정보였던 모양이지만, 그가 권력을 잃은 건 사실인 듯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시커먼 옷을 걸친 응목대가 아니라 흰색 무복의 봉검대나 운검대가 따라왔어야 할 테니까.

당건휘는 공지량이 이 자리에 나온 것부터가 의아했다.

대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 당건휘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때, 공지량은 당장이라도 폭발하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아니오? ……없소이다?’

어디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저따위 말투를…!

당천기가 죽고, 당문휘가 양보하지만 않았다면 평생 대주에 머물렀을 놈이 가주가 됐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오대세가에서도 축출된 가문과 당당히 구파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점창은 급이 다르다.

천수사 정도의 거물이라면 모를까, 수장이라 해도 엄연히 수준차가 존재하거늘 감히 이따위 애송이가…!

공지량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애써 웃었다.

“명분이라……. 천북표국을 먹을 속셈으로 운가를 멸문시킨 가주께서 그런 말을 하시다니…….”

비웃음이었다.

‘다 알고 있다, 까불지 마라.’

당건휘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먼저 핍박을 받은 건 우리요, 장문인. 운가 놈들이 얼마나 치졸하게 본가를 괴롭혔는지는….”

“그게 같은 정도의 문파를 멸문까지 시킬 일이요? 심지어 정면 대결도 아니고 가주와 정예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공지량은 뻔한 이야기는 집어치우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은비대주와 달리 실리를 중시하는 성격이라고 알고 있소. 나 역시 그렇지. 당가가 오대세가의 자리를 되찾는 데 힘을 실어주겠소이다.”

“……!”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것 때문에 일을 벌인 것 아닌가? 은비대주에 비해 뒤처지는 무공과 명성, 세가 내의 인망……. 가주로서의 입지를 굳히려면 실적이 필요하겠지. 아니오?”

“내가 은비대주보다 못하다는 건 어디서 들은 헛소문이오! 설마 그게 장문인의 생각인가!”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열등감.

초조함과 뒤엉킨 그 감정이 당건휘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공지량은 아차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은 웃고 있었다.

‘애송이 녀석. 이런 형편없는 놈을 가주로 선출할 정도로 당가에는 인물이 없는가?’

공지량은 그저 세간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며 사과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구파의 하나인 본문이 힘을 실어주면 오대세가의 자리를 되찾는 게 훨씬 수월해지겠지. 명분을 만들고 판을 짜는 건 모두 내가 할 테니 가주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오.”

허나 당건휘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간은 아니었다.

공지량을 노려보던 그가 눈의 힘을 풀며 웃었다.

“그것만으로 되겠소? 와족을 치는 것만으로 실권을 되찾는 게 가능하겠냐고 묻는 것이외다.”

“…….”

눈빛과 눈빛이 불꽃을 튀겼다.

서로의 처지를 뻔히 아는 상황.

당건휘는 말을 꺼낸 김에 쐐기를 박았다.

“가만히 있는 점창을 일개 원시부족이 먼저 공격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내가 바보인 줄 아시오?”

당건휘는 뭐라고 입을 열려는 공지량을 멈추게 하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목적을 꺼냈다.

“수왕을 배출할 정도로 강한 자들과 다시 싸우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오? 복수는 당연한 것이고, 정말로 노리는 것. 그걸 말해 준다면 장문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소.”

아무리 파고들어도 알아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공지량이 처음부터 미끼로 던지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거기까지 눈치채셨구려. 좋소이다. 내 솔직히 말하겠소.”

공지량이 당건휘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는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고 당부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금광. 높은 순도와 엄청난 매장량을 지닌 금광을 와족이 가지고 있소.”

“……?!”

당건휘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되물었다.

“금광… 이라니! 확실하오?”

‘됐군.’

당건휘의 표정을 보며, 공지량은 원하는 걸 얻어내리라 확신했다.

그는 막사에 든 이후 처음으로 등을 편히 기댈 수 있었다.

‘시간 싸움……. 정사대전이 끝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쳐야 한다. 서둘러야 해!’

초전을 장식할 병력은 준비됐다.

십여 년 전부터 중원에 진출하기 위해 거래를 튼 세력들.

호국영을 보내 그들과의 연락을 재개했고, 흑상과의 접선책을 다져놨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 호르찰의 비밀창고에서 나온 자금을 탈탈 털어야 했다.

하지만 와족을 쓸어버리고 금광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아까울 게 없었다.

“따로 준비한 자들이 있소. 일은 그들이 벌일 것이니, 가주는 딱 한 번만 날 도와주면 되오. 칠 대 삼.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일어설 것이오.”

당건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오 대 오를 말했다면….’

그랬다면 오히려 의심을 했을 것이다.

토사구팽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봐도 공지량이 당가의 가주인 자신을 없앨 방법은 없었다.

‘이자는 복수와 함께 실권을 되찾는다. 그리고 난 본가를 오대세가에 진입시켜 입지를 다지는 거야. 거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줄까지 확보하면….’

절대 비밀로 해야 할 금광의 존재를 알렸다는 것.

공지량은 처음부터 자신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걸 확신하고 온 게 틀림없었다.

“좋소. 본가와 점창. 앞으로 긴밀한 동반자 관계가 되길 바라겠소.”

당건휘는 팔을 뻗어서 공지량과 손을 맞잡았다.

“내가 정확히 무엇을 하면 되겠소?”

* * *

명의 군대는 진격을 거듭했다.

원이 무너지고, 지리멸렬한 잔당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한 데다 초원 곳곳에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태생이 유목 부족들의 집합체였던 그들은 구심점이 사라지자 모래알처럼 와해됐고, 손톱만 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었다.

간간이 적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은 명군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몰살하거나 기가 질려서 도망쳤다.

“슬슬 시작되겠군.”

이십여 일 가까이 초원을 가로지른 후에 서달이 뱉은 말이었다.

마른 비로서는 끝없이 펼친 초원에서 자신들이 어디쯤 와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서달은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고, 병력을 멈추게 한 뒤에 북쪽을 바라봤다.

두두두두―

반 시진쯤 지났을까?

언덕을 넘어 기마대가 출현했다.

그들을 확인한 서달은 우렁차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를 준비하라! 양익은 언덕의 아래에서 대기하고, 후방의 적색창기병은 지금 당장 대열을 이탈하여 언덕을 우회하도록!”

이미 포진은 끝나 있었다.

초원에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은 직접 말을 달리는 것 외엔 독수리가 유일했으며, 서달의 부장들은 진군 중에 수시로 날아드는 새들을 관리했다.

보고를 취합한 끝에, 명군은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시작하는 거야?”

별비의 등에 앉은 마른 비가 묻자, 서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카안은 더 이상 초원 전사들의 구심점이 될 수 없어. 하지만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지.”

서달이 언덕을 넘어오는 기병들을 주시하며 입을 열 때였다.

언덕 뒤편에서 어마어마한 군기가 솟구쳤다.

절로 고개를 돌려 세우는 존재감!

그리고 그건 느껴본 적이 있는 기운이었다.

“이거 설마…… 바투?!”

마른 비가 별비의 등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언덕 뒤편의 어딘가를 바라봤다.

잠시 후, 좌측을 보던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무칼리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덕 너머에 있는 건 바투와 무칼리가 분명했다.

이토록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무장들이 또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끝일 거라는 건 마른 비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푸화하학―!

바투와 무칼리의 사이.

일순간 호흡을 멈추게 할 만큼 웅혼한 기운이 치솟았다.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친 기운은 바투와 무칼리의 존재감을 단번에 지워버릴 만큼 강렬했다.

“뭐, 뭐야, 저건?!”

마른 비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우측에서 터진 고함이 기운의 정체를 알려줬다.

“오스트가아알!!!”

짐승과 같은 포효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패문강이었고, 그는 참마도를 뽑아든 채 당장이라도 언덕 너머로 달려갈 기세였다.

“대장! 진정하쇼! 곧 붙을 수 있다니까?!”

“조금만 참아요! 놈이 언덕을 넘어오면 그때…!”

군일과 요섭이 그를 말릴 때, 또 하나의 기운이 치솟았다.

“이럴 수가! 저토록 거대한 기운이 또?!”

뒤늦게 나타난 기운은 초원 최강의 무장이라는 오스트갈에 비견될 정도였다.

언덕 너머, 하늘이 일그러질 정도의 힘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충돌했다.

쿠콰카카카캉!

바투와 무칼리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을 놀라게 할 힘과 힘이 맞부딪히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때, 마른 비가 언덕을 넘은 기마대를 포착했다.

‘쫓기고 있어?’

하나의 군대가 아니었다.

지금 언덕을 넘는 기병들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쫓는 건 오스트갈과 바투, 무칼리가 이끄는 군대가 분명했다.

“저건 또 누구야?”

또 한 명, 굉장한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포착됐다.

오스트갈에 비견할 만한 존재가 적을 막는 동안, 도망치는 기병들을 이끄는 자.

전장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 패문강이 있는 우익에서 놀라움 섞인 외침이 들렸다.

“……어? 대장! 저, 저놈…!”

“활쟁이! 그때 그 활쟁이 새끼다!”

병사들이 가리키는 지점으로 마른 비의 고개가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