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전속력으로 달려라! 이대로 직진하여 명군과 합류한다!”
사내, 아니, 청년이라고 해야 할까?
기병들을 이끄는 건 마른 비보다도 어린 남자였다.
체구만 놓고 보면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상당한 수련을 거친 듯하지만, 기본적인 뼈대가 가늘다.
실제로는 어지간한 무인보다 튼튼한 편인데도 철골을 지니고 태어나는 와족 전사들 틈에서 자란 마른 비가 볼 때는 그랬다.
‘체구 같은 게 문제가 아냐. 저 사람은…!’
그럼에도 그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건 두 가지 때문이었다.
몸놀림, 그리고 활솜씨.
사내는 내달리는 전투마 위에서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차앗!”
말 위로 뛰어오른 사내가 등을 돌렸다.
몸이 후방을 향하자마자, 다섯 줄기 빛이 공기를 갈랐다.
쾌애애액―!
섬전처럼 뻗어나간 화살이 언덕의 정상을 향해 쇄도했다.
한 번에 다섯 발을 쏜 것도 놀랍지만, 화살이 퍼지는 형태가 독특했다.
화살들은 부챗살처럼 확산하며 퍼졌고, 언덕을 막 넘어오는 북원(北元)의 장수들을 요격했다.
넓게 포진한 지휘관들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한 수.
정상에 오르자마자 머리가 꿰뚫린 적들이 낙마하여 굴러떨어졌다.
“이럇!”
사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고, 질주 중인 기마에 안착했다.
그는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앞을 보지도 않고 말을 달렸다.
두 발로 안장을 디딘 자세.
요동치는 말의 등에서 저토록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투쾅! 콰카캉! 쩌저정―!
언덕 너머에서는 의문의 장수가 오스트갈과 맞붙고 있는 것 같았다.
화탄이 터지는 것 같은 충돌음을 뚫고, 진청의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언덕을 넘어왔다.
청년은 자신의 상반신보다도 커다란 철궁을 내리며 이를 깨물었다.
“사와르…!”
전원이 장군급으로 구성된 최정예.
그들의 힘은 마른 비도 기주 평야에서 목격한 바 있다.
정도맹의 정예를 파죽지세로 깨부수던 초원의 맹자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명군?! 설마 했는데, 이것들이 정말 한족과 붙어먹은 것인가?!”
사와르들은 놀란 만큼이나 화가 난 듯했다.
기마대가 나타나자 명군은 언덕 전체를 밀어 올리며 진군을 시작했는데, 이십만 대군은 시야에 들어오는 지형을 꽉 메울 만한 숫자였다.
사와르들이 새카맣게 밀려오는 적들을 보고 주춤한 순간, 언덕 아래에서 빛이 번쩍였다.
“음?!”
중력을 뿌리치며 솟구치는 화살.
사와르들이 기겁하며 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채채챙―!
금속음은 화살을 막아내는 소리였다.
그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검붉은 화살이 뒤를 따랐다.
“헛…!”
특수 제작한 철시(鐵矢).
일반 화살보다 훨씬 무겁고 긴 살인병기가 사와르 두 명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어터르친…!”
가까스로 철시를 방어한 사와르가 숨이 끊어진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활을 쏜 사내에게 울부짖었다.
“귀궁(鬼弓)! 빌어먹을 동이족 놈! 내 반드시 너를 죽여 잘근잘근 씹어 먹고 말 것이다!”
‘귀궁’이라 불린 사내는 활을 내리며 대꾸했다.
“그런 소릴 지껄인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불가능한 말은 꺼내지도 마라.”
그리고 말머리를 돌리며 덧붙였다.
“동이(東夷)는 한족 놈들이 쓰는 말 아냐? 걔들이 볼 때는 너도 북쪽의 오랑캐(北狄)인데 지 얼굴에 침 뱉는 소릴 하고 앉아 있네.”
완전히 방향을 틀어서 다시 정상 쪽을 향한 귀궁이 말했다.
“이래서 무식하면 말을 말아야 돼. 참마도로 말머리 날릴 시간에 책 좀 봐라, 책 좀. 뇌까지 근육으로 채워 버리면 어쩌잔 거야?”
가볍지만 무시하기 힘든 도발이었다.
그에게 동료를 잃은 병사에게는 더욱 그랬다.
사와르가 눈에 핏발을 세우더니 돌격 명령을 내렸다.
“배신자들이 도망치게 두지 마라! 놈들이 명군과 합류하기 전에 쓸어버린다!”
“오오오오!”
북원의 기병들은 어느새 언덕을 넘어 포진을 마친 상태였다.
말이 언덕이지, 자그마한 산이나 다름없는 그곳은 세 무리의 군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산자락에서 밀고 올라가는 명군과, 중턱에서 멈춰선 저항군, 그리고 정상을 점거한 북원의 군사들.
북원에 저항하는 무리는 숫자가 많지 않았고, 한시라도 빨리 명군에 합류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귀궁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나머진 계획대로 저들과 합류하라! 그리고….”
그가 전황을 살피더니 고삐를 움켜쥐었다.
“귀궁대(鬼弓隊)는 나와 함께 적진을 돌파한다!”
“돌파라고?”
군령을 들은 마른 비가 눈을 크게 떴다.
서달도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지 눈썹을 찌푸렸다.
“저 사내는 누구냐? 왜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지?”
무모한 만용인가, 아니면 용맹한 기개인가.
어느 쪽이든 현명한 판단은 아닌 듯했다.
그의 뒤에 정렬한 기마대의 숫자는 이백에 불과했고, 그걸로 사와르가 이끄는 북원의 정예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놀랄 때, 마른 비는 그의 눈이 언덕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우측 너머를 힐끗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돌격하라!”
귀궁은 자신의 별호를 딴 이백의 병력을 데리고 언덕을 거슬러 올랐다.
모두의 우려가 짙어진 건 병력의 구성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기병들은 전부 대궁을 들고 있었는데, 백병전을 위한 창이나 도를 장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돌이 가까워질 때, 귀궁의 고함이 터졌다.
“하단(下段), 강사(强射)!”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굵직한 철시가 바람을 갈랐다.
언덕을 달려 올라가는 형국이라 그들은 적 기마의 배를 저격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사선으로 쏘아진 화살들은 말 한 마리에 그치지 않고 최소 네다섯 마리의 배를 꿰뚫은 뒤에야 멈췄다.
“히히히힝…!”
북원 군대의 기마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나뒹굴었다.
전열이 무너지자 달려 내려오던 후열이 휘말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들의 진형이 무너질 때, 귀궁의 명령이 메아리쳤다.
“도약! 상단, 연사(連射)!”
신기에 이른 기마술이었다.
비탈길에서 수직에 가깝게 뛰어오른 이백 기의 궁기병들!
그들은 허공에서 적들의 머리를 향해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투투투투퉁―!
손이 시위를 당기는 게 보이지도 않는다.
귀궁대는 체공 중에 십여 발의 화살을 쏟아냈고, 그건 적들의 미간을 절묘하게 꿰뚫었다.
“들이쳐라!”
투콰카카캉!
더욱 기가 막힌 건 백병전이었다.
두 번의 궁사를 퍼붓는 동안 거리가 좁혀졌는데, 땅에 착지한 그들은 한 손에는 화살을, 한 손에는 철궁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중거리에서는 철궁을 몽둥이처럼 휘둘러서 적들을 낙마시키고, 단거리에서는 손에 쥔 화살을 적들의 얼굴에 쑤셔 박는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싸움법.
그건 백전을 경험한 서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진을 늦췄다! 뒤로 빠져!”
하지만 근접전이 전문인 적들에 비해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놀라운 무위로 적들의 전진을 막은 궁기병들은 귀궁의 명령이 떨어지자, 말머리를 돌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기마대를 지휘하는 사와르가 울분을 터뜨렸다.
자신만만하게 돌진해오더니 활 몇 번 쏘고 놀리듯이 도망친다.
그가 엉망진창이 된 진형을 수습할 때, 귀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내 화살의 뒤를 따라라.”
강대한 기운이 응집되고, 철궁이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왼손에 힘을 주어 활대를 고정한 그가 시위를 놓았다.
“길을 여는 바람.”
쾌애애애액―!
철 화살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마른 비의 바위 부수기에 필적하는 기운이 정면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갈아엎었다.
“크아아악!”
“아악…!”
뻥 뚫린 길, 텅 비어버린 공간!
후드득 떨어지는 핏물을 맞으며, 어느새 반전한 귀궁대가 그 길을 내달렸다.
“세상에…!”
마른 비가 언덕을 오르다 말고 탄성을 질렀다.
숨 몇 번 내쉴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귀궁은 이백의 병력만으로 허를 찌르는 돌파를 선보였다.
서달조차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왔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명군의 놀라움은 형용할 필요조차 없었다.
마른 비의 귀는 우측 진영에서 군일이 중얼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귀궁대……. 여전하군. 저 새끼들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패문강의 수하들은 그들을 아는 걸 넘어 직접 싸워본 눈치였다.
눈을 돌리니 요섭이 귀궁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깨무는 게 보였다.
적으로 만났던 자들과 아군으로 조우한 심정이 어떨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었다.
“정상까지 거슬러 올라라! 언제든지 스승님께 가세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해!”
귀궁은 강렬한 궁사 한 방으로 중앙에 밀집한 정예들을 쓸어버렸다.
그로 인해 길이 열렸지만, 남아 있는 적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겁이 없는 건지, 용감한 건지 귀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길을 내달렸다.
“다른 놈들은 무시하고 앞을 막는 적만 처리해! 잔존 병력은 한족 놈들에게 맡긴다!”
귀궁은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허…!”
“뭐 저런 뻔뻔한 놈이…!”
명의 병사들이 어이없는 얼굴로 혀를 찼고, 마른 비는 별비의 등을 내리치며 웃었다.
“하핫! 재미있는 사람이네? 별비야! 나 저 사람 마음에 들어!”
저항군이 명군에 합류하는 걸 막지 못한 이상, 북원의 병사들에게 남은 건 퇴각뿐이었다.
그들은 말머리를 돌렸고, 꽁지가 빠져라 언덕 너머로 도망쳤다.
콰캉! 투콰캉! 쩌저저정―!
경천동지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의문인 건 대체 누가 있어 오스트갈 같은 강자와 이런 싸움을 벌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바투와 무칼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로 보아 그들도 저 너머에 있을 텐데 말이다.
마른 비는 저항군을 도주시키고 지금껏 시간을 번 사람이 궁금해졌다.
발을 바삐 놀려서 정상에 오르자, 마침내 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지?!”
아래에서 볼 땐 언덕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초원 한가운데 자리한 분지였다.
높다란 언덕이 평평한 평야지대를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
전장을 보는 순간, 마른 비는 서달이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니었다면 매복과 유인, 합류라는 작전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름이 뭔가?”
서달은 정상에 오르자마자 귀궁에게 물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던 그는 슬쩍 눈을 돌리며 대꾸했다.
“알 필요 없잖소.”
불손한 말투였다.
서달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칼을 움켜쥐며 나섰다.
“이놈이 감히 대장군께…!”
“오랑캐 놈이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당장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으렷다!”
귀궁은 지그시 인상을 쓰더니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말했다.
“네놈들 말대로 난 동쪽에서 왔다. 한족이 아니며, 내 나라를 버린 지도 오래야. 그런 내가 너희끼리 정한 지위 따위를 연연할 이유가 무엇이냐?”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서달이 손을 들어서 병사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차분히 물었다.
“그 말이 맞네. 본국의 지위와 격식을 자네에게 강요할 순 없지. 한데 자네가 내게 적의를 드러낼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귀궁의 얼굴엔 의외라는 감정이 뚜렷했다.
서달이 대뜸 호통을 칠 거라고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퉁명스러움이 조금은 가신 어조로, 그가 말했다.
“난 한족이 싫소. 당신들이 저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니까.”
귀궁은 한껏 가열된 전장을 내려다봤다.
복식이 통일된 북원의 군사들과, 다양한 차림새를 한 부족들의 연합체.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텼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북원 쪽으로 전세가 기울 거라는 걸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칭기즈 칸에 의해 초토화된 이후, 백 년간 억눌려 온 자들이오. 저들을 부추긴 게 바로 당신들의 황제였지.”
귀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각 부족의 사내들이 모두 이끌려 나왔소. 당신들이 말하는 희망 하나만을 믿고.”
지금 저 밑에 있는 저항군은 수많은 부족의 마지막 전사이자 최후의 생존자들이란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강인한 기운들이 무수히 감지됐다.
“당신의 계획을 따랐고, 성공시켰소.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요.”
귀궁은 강렬한 눈으로 덧붙였다.
“만약 스승님의,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면…… 하늘에 맹세코 당신의 이마 한복판에 화살을 박아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