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55화 (355/463)

355화

“내 이마에 화살을 박겠다…….”

서달도 이번만큼은 흘려듣기 힘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휘하 부장들은 아예 검을 뽑은 채 귀궁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려는 찰나, 상황을 진정시킨 건 마른 비였다.

“배신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모두의 눈이 마른 비에게 집중됐다.

별비의 등에 앉은 그가 서달을 보며 말했다.

“이 사람에게는 동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자신들을 이용하고 버리는 게 아닐지 두려운 게 당연하고. 아저씨가 확답을 주면 될 일 같은데?”

마른 비가 서달을 볼 때, 귀궁이 엉뚱한 문제로 딴지를 걸었다.

“누가 두렵다는 거냐! 내가 나약한 한족 놈들과 같은 줄 아는가! 전사는 어떤 상황이 닥치든 두려워하지 않는다!”

끝까지 도발적인 말투였다.

그리고 어른인 척하지만, 아직 어리다는 걸 감출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마른 비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당신도 말투 좀 고쳐. 부드럽게 이야기해도 될 일을 왜 그렇게 날을 세우는 거야? 심정은 이해하는데, 당신이 이러는 거 동료들에게 도움 될 게 하나도 없어.”

귀궁이 이를 깨물며 마른 비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눈이 점점 커지더니 마른 비와 별비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제야 둘을 제대로 인식한 표정.

그는 원래 하려던 말도 잊고서 입만 뻐끔대다가 겨우 말했다.

“무슨… 이게 웬…? 어디서 이런…….”

마른 비는 그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우릴 본 거야? 뭘 그렇게 놀라? 괜찮아.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니까. 처음 보면 다들 놀라더라고.”

뻔뻔하게까지 들리는 농담이었다.

마른 비가 별비의 등에서 내리더니 귀궁에게 다가가서 주먹을 내밀었다.

“난 마른 비야. 이름이?”

마력(魔力)에 가까운 매력.

극성에 이른 야수 친화는 동쪽에서 온 무사마저 무장 해제시켰다.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긴장하고 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주먹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귀궁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마른 비를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이름은…… 밝힐 수 없다. 다들 귀궁이라고 부르더군. 그렇게 불러다오.”

“흠. 뭔가 사연이 있구나?”

자연기를 통해 전해지는 망설임.

마른 비의 짐작은 정확했다.

귀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되물었다.

“그보다 넌 뭐냐? 한족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거대한 짐승은 또 뭐고? 너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아니, 그전에 짐승이 어떻게 내공을 지닌 거지?!”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움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신기한 것을 보았을 때의 호기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쳤을 때의 당혹감.

귀궁이 질문을 쏟아낼 때, 서달이 끼어들었다.

“중원에서 수왕이라 불리는 자일세. 자네의 힘도 놀랍지만, 이 친구도 만만치 않지. 서로에 대한 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서달은 자신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자네가 물러서지 않고 돌파를 강행한 이유……. 적색창기병을 염두에 둔 건가?”

귀궁이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을 거슬러 오르기 전, 그가 우측을 힐끗 보았던 이유가 이거였다.

두두두두두―!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분지를 우회한 적색창기병이 전장에 난입했다.

매복에 이은 기습!

북원의 옆구리를 파고든 그들은 적진을 갈랐고, 오스트갈과 의문의 장수가 맞붙은 곳으로 똑바로 나아갔다.

그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달이 귀궁의 우려를 없애 주려는 듯이 말했다.

“뒤통수를 치지 말라…….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겠지. 지켜보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서달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언덕의 정상에 올라 포진을 마친 명군이 무기를 움켜쥐었다.

“오랜 악연을 끊어낼 때가 왔다! 흑색검단을 필두로 하여 적들을 섬멸하도록! 전군, 진격하라!”

“와아아아아!”

서달의 오른손이 떨어지는 순간, 명군이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스트갈을 노리는 적색창기병과, 분지를 덮으며 돌진하는 이십만 대군.

전장 한켠에서 바투와 무칼리의 고함이 들렸다.

“대원수(大元首)…! 비켜라, 이놈들! 어서 지원을…!”

“완전히 씨를 말릴 수 있었는데…! 이것들이 설마 명군과 한통속이었을 줄이야!”

명군과 저항군의 합공은 바투와 무칼리조차 예상치 못한 한 수였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서달이 초원 정벌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엄청났다.

치밀한 사전 공작을 거쳤으며, 북원의 이목을 속이고 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투입했다.

바투와 무칼리는 오스트갈에게 되돌아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전장의 중앙에 고립돼 있던 저항군이 목숨을 걸고 저지했기 때문이다.

용맹한 광경이었으나, 마른 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끼면서 바투와 무칼리를 떼어놓는 역할까지?! 아저씨, 저 사람들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한 거 아니야?”

명군이 발을 뺀다면 저항군은 꼼짝없이 몰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귀궁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서달은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래서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지. 저들은 명맥이 끊기는 걸 걱정해야 할 처지였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부흥하게 될 것이야.”

투콰카카캉―!

그때였다.

천지를 깨뜨릴 것 같은 충돌음이 울렸다.

전장의 중앙, 장대한 전투마에 올라탄 두 사람이 참마도를 휘두르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마른 비가 보고자 했던 무장들.

저항군을 지휘하는 남자와 오스트갈이었다.

“다모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남자지. 메르키트 연맹의 후손이자 오스트갈에 비견할 만한 무장. 저 남자가 있었기에 저항군과의 연합이 성사될 수 있었네.”

귀궁이 스승이라 부른 자가 틀림없었다.

서달도 그의 무위가 궁금한 듯 둘의 결전을 유심히 지켜봤다.

후아아악―!

둘의 대결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바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음향이 들리고, 대도에 집중된 기가 공간을 절단했다.

감히 맞받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일격.

다모그가 휘두른 참격에, 오스트갈 역시 참격으로 대응했다.

“텡게르 하그라흐.”

노년이라기엔 젊고, 중년이라기엔 완숙함이 묻어나는 얼굴.

강인함이 깃든 이목구비였다.

오스트갈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대도가 하늘을 베며 떨어져 내렸다.

“엇?!”

마른 비가 탄성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경험한 도법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패문강의 참마와 흡사한 초식.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그를 뛰어넘고 있었다.

눈을 돌리니 패문강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스아아악!

마침내 우위가 갈렸다.

공간을 절단하는 참격과, 그 참격마저 갈라버리는 도격.

오스트갈의 절기가 번쩍인 순간, 다모그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스승님…!”

이길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아니, 정말 그랬다면 불안한 얼굴로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진 않았겠지.

스승의 승리를 믿어야만 하기에 자리를 지켰지만, 귀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귀궁대! 스승님을 구하러 간다! 나를 따르라!”

다모그가 낙마하고, 귀궁이 뛰쳐나갔다.

이를 갈며 자리를 지키던 패문강도 말의 고삐를 당겼다.

“우리도 간다! 적에게 짓밟힌 전우들을 기억하라! 오늘 반드시 오스트갈의 목을 칠 것이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오오오오!!!”

방패와 창, 그리고 참마도.

북벽과 그의 수하들이 전장으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전쟁의 한복판.

마른 비는 별비의 등에 오른 채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로써 기나긴 전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네.”

스르릉―

서달도 그의 장군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른 비를 바라봤다.

“한 방울의 피라도 줄이려면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도와주게, 수왕.”

상우춘의 빈자리는 컸다.

하지만 패문강과 다모그란 패를 손에 넣었고, 귀궁이란 걸출한 사내까지 등장했다.

여기에 마른 비가 더해진다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었다.

마른 비와 조우했을 때부터 서달은 그의 힘을 빌리는 걸 염두에 두었고, 눈빛으로 볼 때 마른 비가 참전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른 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미안. 이번엔 못 도와주겠어, 아저씨.”

서달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른 비가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난 더 이상 명을 위해 싸우지 않을 거야.”

그건 선언이었다.

호의에 이끌려, 때로는 더 나은 세상이 오길 바라며 자신의 힘을 쓰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청년이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또한 그것은 주원장을 바라보는 마른 비의 시선이 변화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가. 알겠네. 그게 자네의 뜻이라면 내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서달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비 같은 강자의 힘이 아쉬운 이때, 선선히 놓아주는 점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장이라 불리는 서달조차 자신이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할 거라고는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 * *

하늘을 가리며 치솟은 나무.

와족의 신령목은 여전히 웅장한 자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활력을 북돋는 기운도 변함이 없으며, 작은 마을을 끌어안을 만한 품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 밑에는 운남 각지에서 모인 야수들이 버글대고 있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믐이었다.

중원에서 백강과 가을 수리, 겨울 달을 단련시키던 그는 천하 각지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걸 알게 됐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여 운남에 사람을 보냈는데…….

되돌아온 서찰을 받자마자, 그믐은 운남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짐승들이 정신을 잃고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할아범.”

너른 하늘은 그간의 일을 간추려서 설명했다.

대기에 퍼진 검은 기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짐승들이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기를 다루는 각성수들까지 공격한 것.

처음엔 거악이 쓰러질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지만, 붉은 발톱의 예언대로 차차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까지.

“전상과 광서우, 대망까지 불러 모았습니다. 인간으로 치면 상, 중, 하단전이 발달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짐승들도 이리로 데려왔죠. 여긴 신령목 덕분에 검은 기운이 침습하지 못하니까요.”

진귀한 광경이었다.

운남 각지를 지배하는 짐승들이 와족의 인도하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석림에서 나오길 거부한 붉은 발톱과, 말을 들을 리 없는 사람거미, 노을에게 맡긴 하얀 깃을 제외하면 내로라하는 야수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중엔 곡정의 쌍두사처럼 평소에 보기 힘든 녀석도 있었다.

수식어가 붙은 놈들은 확연히 강한 힘 덕분인지 편안히 있었지만, 직접 붙어봐야 우위를 가릴 수 있는 놈들은 틈만 나면 으르렁댔다.

와족 전사들은 놈들의 자리를 분배하고 싸움을 뜯어말리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야수 제어로 죄다 찍어 눌러버리면 조용하겠지만, 그럼 이 녀석들이 너무 힘들어지겠죠. 그래서 그냥 두고 보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반려수들 덕분이었다.

야생의 짐승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들 틈에서 극심한 긴장과 불안 증세를 보였다.

반려수들이 붙어서 어르고 달래지 않았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기에 퍼진 검은 기운이 매우 옅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이놈들을 돌려보낼 수….”

너른 하늘이 피곤하다는 듯 말을 건넬 때였다.

매우 익숙한 울음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푸이익, 푸익…!”

시선이 향한 곳엔 뿔을 세운 채 대망에게 달려들려는 광서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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