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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56화 (356/463)

356화

“무슨 일이냐?”

너른 하늘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광서우는 이미 땅을 박찬 후였다.

“푸이아악~!”

‘죽어~!’라고 외치는 듯한 울음이 터지고, 광서우의 몸이 번쩍하며 사라졌다.

눈으로도 쫓기 힘든 기동.

마른 비와의 대련 후에 발전이 있었는지, 광서우의 순간가속은 사 년 전보다 한층 빨라져 있었다.

“쉬아아악?!”

―이 미친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똬리를 튼 채 쉬고 있던 대망이 황급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대망은 광서우의 기동력을 따라갈 수 없었고, 꼬리 부분을 받히고야 말았다.

쿠아아앙!

광서우는 뿔로 대망의 꼬리를 꿴 채 신령목을 들이받았다.

끔찍한 울음이 터지고, 화가 난 대망이 광서우를 휘감았다.

“시아아악!”

대망의 조이기는 여전히 엄청났다.

‘으드드득!’ 소리가 나며 광서우가 비명을 질렀다.

“푸익! 푸이익!”

이름처럼 미친 듯이 날뛰는 광서우 탓에 주변에 있던 동물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광서우는 대망을 떼어내기 위해 몸을 신령목에 들이받았고, 놈들이 날뛸수록 와족 전사들의 표정은 참담해졌다.

“아, 안 돼! 신령목이…!”

“저것들, 당장 떼어 놔!”

와족 전사들이 달려들 때, 놈들의 몸에서 푸른빛이 일었다.

흥분한 각성수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푸이아악!”

“시아악! 샤악!”

땅이 뒤집히고, 폭음이 터졌다.

거체가 부딪힐 때마다 신령목이 흔들리며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와족 전사들은 두 야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보다 못한 너른 하늘이 둘을 말렸다.

하지만 대망과 광서우는 듣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야수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뒤엉켰다.

결국 너른 하늘은 야수 제어를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란 말이다. 이 사고뭉치들아.』

두쿵―!

심신을 짓누르는 위압이 가해지고 나서야 대망과 광서우는 멈췄다.

“시, 시익….”

푸르게 번쩍이는 눈빛!

대망이 너른 하늘을 보자마자 이성을 찾은 데 반해, 광서우는 몸을 뒤틀며 끝까지 달려들려고 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아해진 너른 하늘이 코뿔소를 반려수로 둔 전사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푸이악! 푸악!”

“음……. 족장… 아니, 형님. 꼭 들으셔야 되겠습니까?”

광서우의 울음을 이해한 전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너른 하늘이 눈으로 재촉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망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데요? 자기를 무식하다고 욕하고 다니는 거 다 안다고……. 원래부터 만나면 한 대 때려주려고 별렀는데 눈이 영 띠껍…. 아니, 마음에 안 들어서 달려들었답니다.”

“…….”

너른 하늘이 말을 잃은 와중에도 광서우는 계속 외쳤다.

“푸이익! 푸익!”

“나는 지금 힘이 넘친다……. 어떤 놈과 붙든 이길 자신이 있다……. 내가 바로 운남 최강이다? 형님. 이놈 이거, 신령목의 기운 덕에 지가 강해졌다고 느끼나 본데요?”

그때, 광서우가 도발적인 눈으로 너른 하늘을 노려봤다.

“푸이아아악!”

“……물러나라. 옛정을 생각해서 참지만, 너도 여차하면…. 허허, 형님. 얘가 지금 심각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제가 잘 알아듣게….”

너른 하늘은 이마를 짚더니 전사에게 비키라고 손짓했다.

전사는 안쓰러운 눈으로 광서우를 보더니 군말 없이 비켜섰다.

“그래……. 광서우, 너 머리가 나빴지? 몇 년 조용했다고 그새 잊은 모양인데 간만에 몸의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구나.”

너른 하늘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섰다.

“허허, 참. 안 그래도 요즘 골치 아픈 일투성이라 나도 발산할 곳이 필요했는데…… 너 잘 걸렸다.”

“푸이아아악!”

―이놈이 그래도?! 좋다! 인간! 너부터 손봐주마! 덤벼라!

정확히 숨 한번 들이켤 시간이 지나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이이……. 푸우.”

“그래. 고분고분하니 얼마나 귀엽고 좋으냐. 앞으론 그러지 마라.”

너른 하늘이 만신창이가 된 광서우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호된 맛을 봤는지 풀이 죽어서 울먹였다.

너른 하늘의 손이 다가오자 움찔했지만, 광서우는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얌전히 머리를 내줬다.

‘흠. 제법…….’

녀석은 못 보는 사이에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적당히 힘을 조절했지만, 주먹을 두 방이나 견뎌낼 정도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뭘 믿고 큰소릴 치나 했는데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망도, 전상도 모두 눈에 띄게 강해졌어. 이 녀석들이 따로 수련이라도 하는 건가?’

마른 비가 와족 역사상 최초로 간판 깨기(?)를 한 이후, 각성수들은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는데, 너른 하늘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이것도 최근 벌어지는 일들과 연관이 있는 건가? 아니면…….’

너른 하늘이 광서우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커다란 기운 하나가 파공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숲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매서운 눈이었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마, 마을이…!”

매서운 눈은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허둥대고 있었다.

* * *

청죽림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원시림이 드리운 그늘 밑에, 운남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한 자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불을 피운 그들은 커다란 짐승의 사체를 꿰어 굽는 중이었다.

“하도 신신당부하길래 잔뜩 긴장했는데……. 이건 뭐 너무 쉽지 않습니까, 대장?”

흉포한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사내였다.

그는 지저분한 마의를 대충 걸치고 있었는데, 싸움 중에 다친 건지 왼쪽 눈 하나가 없었다.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흉터가 있기 때문인지 사내의 인상은 한층 사나워 보였다.

“남상.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친 거냐? 일이 끝날 때까지는 한시도 방심하지 말라니까?”

대장이라 불린 사내가 주의를 줬다.

그는 이십여 개의 모닥불 중앙에 자리를 잡았는데, 거친 기질의 사내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지렁이 같은 흉터들로 뒤덮인 그는 온몸으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대변하는 듯했다.

“쩝, 알겠수. 긴장을 풀지 말라, 그거 아니요? 근데… 너무 쉬웠던 건 사실이지 뭐! 일에 착수하기 전까지는 수왕이란 놈의 본거지라 길래 사실 좀 쫄았거든!”

매서운 눈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

사내들은 청죽림에 있는 와족의 마을을 습격하고 나온 참이었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부 나와 있는 탓에 노인과 아이들뿐이던 와족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유린당했다.

그것만으로 사내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돈을 벌었고, 그래서 남상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크헤헤! 한 이 년 쌔빠지게 일해야 벌까 말까한 돈을 이렇게 간단히 벌다니! 의뢰자 얼굴이 보고 싶구만! 어떤 얼빠진 놈이길래 돈을 항아리로 들이붓는 거유?”

기분이 좋은 건 대장이라 불린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 그 말은 맞다. 너무 쉬웠던 건 사실이야. 수왕이 북쪽에 가 있으니 더 그렇겠지. 이런 일만 들어온다면 떼 부자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대장이란 사내는 쉬웠다고 말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작고 날카로운 눈으로 쉼 없이 주위를 살피며, 한 쌍의 호조(虎爪)를 손에서 풀지 않았으니까.

남상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대장. 우리 숫자가 몇이유? 여기로 오는 경로에 매복 중인 애들만 해도 족히 이백은 되오. 밥은 좀 편하게 드쇼. 설령 수왕이란 애송이가 여기 있다고 해도 대장을 이기겠수?”

남상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대장은 웃지 않았다.

그는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비마는 경공에 특화된 자이니 그렇다 쳐도……. 바투와 무칼리. 원을 대표하는 무장들이 녹록할 리 없다. 최소 십좌에 버금가는 자들. 그런 놈들을 일대일로 패퇴시켰다고 했어.’

그는 손에 낀 호조를 내려다봤다.

애병을 도둑맞는 바람에 급조한 물건.

지금 상태로도 이십 대 초반의 풋내기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수왕의 전적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혈랑조가 있다면 필승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완승을 장담할 수 없으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색광신투. 갈가리 찢어놔도 모자랄 년 같으니.’

차유람의 보기 드문 미색에 취했고, 혈랑조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점에 도취되어 다른 자를 따라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원 제일의 도적이라 불리는 여인의 실력을 얕봤다.

까드득.

정사지간의 인물이자, 용병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절대 강자.

십좌의 일인인 혈조 군길산이 이를 깨물었다.

“수왕은 없지만, 그놈을 키워낸 자가 있을 것이다. 오면서 이곳의 짐승들을 보지 않았나.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놈들이라면 절대 만만치 않을 거야. 방심하지 말고 사위를 경계해라.”

원래 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이지만, 군길산을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또 한 가지 있었다.

이 의뢰를 들고 온 자.

새카만 잠행복을 걸치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때문이었다.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어. 정종의 무공을 정통으로 수련한 검사. 그런 놈이 은신과 잠행을 배워서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니.’

대충 봐도 자신의 휘하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남상과 비슷한 실력을 지닌 놈이었다.

아니, 무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예를 익힌 만큼 남상이 질 확률이 높았다.

그토록 뛰어난 인재를 심부름에 쓸 만한 세력이라니.

그런 자의 의뢰가 결코 녹록할 리 없지 않나.

공지량의 수하이자 현 응목대주인 몽념을 본 군길산은 이번 일에 착수한 이후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슬슬 야만인 놈들이 눈치챘을 시간이다. 이런 환경에 적응한 놈들이라면 아무리 철저하게 지워도 우리의 흔적을 놓칠 리 없겠지. 분명히 금세 따라올 거다.”

군길산은 와족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자신들의 실력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운남의 야생에서 와족의 추적을 따돌릴 순 없다.

그렇다면 쉴 수 있을 때 푹 쉬고, 싸우는 순간 최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하는 게 현명하리라.

군길산이 택한 건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기다리는 전면전이었다.

“다 먹었으면 불을 꺼라. 지금쯤 우리의 동선을 알아챘을 테고, 아군이 매복한 곳에 가까워졌을 거야. 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군길산은 자신이 먼저 먹던 음식을 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용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진영의 외곽에 있던 사내가 달뜬 눈빛으로 말했다.

“대장. 마을에 있던 여자들 봤습니까? 중원의 계집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디다. 그 활력과 탄탄한 몸매라니……. 흐흐. 일이 끝나면 어떻게….”

군길산이 동의한다는 듯 피식 웃을 때였다.

“……!”

감각의 그물을 스치듯 건드린 기운.

그의 고개가 말을 한 사내에게 홱 돌아갔다.

“빌어먹을! 어떻게 벌써…?! 자탁! 칼 뽑앗! 뒤닷!”

“어엇…?!”

자탁이 사슬낫을 들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날카로운 수격이 그의 심장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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