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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57화 (357/463)

357화

“커헉…!”

심장이 뚫린 자탁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원시림이 드리운 그늘과, 일렁이는 모닥불.

그리고 불빛보다 빨간 피.

새의 부리를 닮은 손이 가슴을 뚫고 삐져나와 있었다.

“어, 언제…? 느, 느끼지 못했….”

그게 자탁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손은 들어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빠져나갔고, 자탁의 영혼도 그의 육신을 떠났다.

퍼억!

암습자는 일격으로 그치지 않았다.

자탁의 몸이 허물어지는 순간, 다른 쪽 손이 옆에 있는 용병의 얼굴을 찍었다.

“카악…!”

“정신 차렷! 적이다!”

군길산이 외칠 때, 암습자는 두 명의 목숨을 앗은 뒤 물러나는 중이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비춘 얼굴.

새카만 눈동자를 지닌 와족의 전사였다.

“죽엿!”

“야만인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용병들의 대처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몸을 날렸고, 암습자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허나 검은 수리 전사는 그들보다 빨랐다.

스르륵―

그늘로 빨려들 듯한 은신술.

용병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 순간, 허를 찌르는 공격이 더해졌다.

촤아악―! 촤촥―!

난데없이 튀어나온 승냥이 한 마리가 용병들의 등을 후볐다.

귀신처럼 배후를 습격한 짐승은 적들이 반응할 시점이 되자 곧바로 몸을 빼냈다.

용병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간도, 짐승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와족! 놈들이 쫓아온 거다!”

“하지만 어떻게? 앞에 있는 매복은 어떻게 하고?”

상황을 눈치챈 건 군길산이었다.

“놈들은 지금 운남 여기저기에 퍼져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을에서 쫓아온 놈들이 아니다! 복귀하던 놈들이 우릴 친 거야!”

그 말은 소식을 주고받는 나름의 수단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이란 십중팔구 반려수라고 불리는 짐승일 터였다.

“까다롭군. 사용하는 무공부터 통신 수단, 지형까지 전부 다.”

하지만 말과 달리 군길산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미지의 적이 무서운 것이지, 정체를 알고 상황을 짐작한 이상 자신들이 질 리는 없었으니까.

“정면 대결과 기동 타격전, 암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전투가 가능한 놈들이라고 했다. 허나 이 녀석들은….”

군길산이 수신호를 보내며 웃었다.

“숫자가 적지.”

스스스슥―

용병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군길산을 둘러쌌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원형 방진.

그사이 외곽에 있던 용병 서너 명이 더 쓰러졌지만, 암습을 허용하고도 이 정도 피해에 그쳤다면 경미한 수준이었다.

“진형을 갖추니 무리하지 않는다. 영리하군.”

암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원형의 방진과, 그늘 속에 숨어 움직이지 않는 검은 수리 전사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고착 상태를 깬 건 군길산이었다.

“파악 끝났어.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마.”

군길산의 입가에 살소가 번졌다.

적의 힘을 가늠하는 능력과 빠른 상황 판단, 그리고 십좌에 오를 정도의 무공.

그를 용병계의 정점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군길산의 손가락이 여덟 명의 검은 수리 전사와 여덟 마리의 반려수가 숨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짚었다.

“한 놈당 둘이 붙으면 승산이 칠 할, 셋이면 구 할. 세 명씩 뭉쳐서 여덟 개 조를 짜라. 짐승은 둘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이인일조 여덟 개.”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총 사십 명. 손실 없이 잡도록. 쳐라.”

순식간에 조를 짠 용병들이 튀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검은 수리 전사 한 명이 그늘 속에서 중얼거렸다.

“왔다.”

“……?”

군길산의 고개가 후방으로 홱 돌아갔다.

급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기운!

뭔지는 몰라도 엄청난 게 다가오고 있었다.

“멈췃! 방진 유지! 새로운 게 온다! 대비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무들이 터져 나갔다.

“부오오오!”

용병들의 고개가 일시에 하늘로 들렸다.

고개를 꺾어야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괴수!

나무기둥 같은 앞발 두 개가 시야를 가렸다.

“코, 코끼리…?”

숲을 뚫고 나온 긴 코가 앞발을 들어 올린 순간, 용병들은 얼어붙었다.

“카아아압!”

군길산이 화살처럼 튀어 나가며 호조를 휘둘렀다.

그는 두려움 없이 긴 코의 밑으로 파고들었고, 뒷다리를 베었다.

거체를 지탱하는 다리에 상처를 입자, 긴 코의 자세가 흔들렸다.

“부오오오―!”

긴 코는 휘청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발아래 있는 군길산을 노려봤다.

방진을 뭉개려던 다리가 표적을 바꾸어 떨어져 내렸다.

의외였는지 군길산의 눈썹이 꿈틀댔다.

“안 쓰러져? 뭐 이런 무식한….”

앞발이 덮쳐오는 와중에도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느려.”

촤아아악! 촤악―!

피가 튀고, 살점이 날린다.

군길산은 하늘로 솟구치며 긴 코의 앞발을 피하는 동시에 배를 긁어 올렸다.

고통에 찬 울음이 터지며 긴 코가 무너졌다.

“허…? 호조가 파고들지를 못해? 바윗덩이 같은 몸이군.”

그는 체공 상태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기에 내공을 흘려 넣었다.

“어디 강기도 버티는지 보자꾸나.”

“긴 코, 건드리지 마라”

“……?!”

등 뒤에서 날아든 강격!

군길산이 기겁하며 호조를 겹쳤다.

투콰아아앙!

거인의 발차기는 군길산을 지상으로 내리꽂을 만큼 강렬했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그 한 방으로 끝났겠지만, 군길산은 십좌의 자리를 마작으로 딴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그는 멀쩡하게 땅에 내려섰고,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깜짝이야. 코끼리의 주인인가? 이건 꽤나….”

군길산이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우둔한 땅은 거기에 없었다.

“다 죽는다.”

우둔한 땅은 기습을 가한 걸로 그치지 않았다.

긴 코가 뭉개려고 했던 곳.

방진으로 떨어져 내린 그는 온몸으로 대지를 찍었다.

쿠아앙―!

진형의 일각이 허물어지고, 돌파할 구멍이 생겼다.

우둔한 땅이 적들을 날려버리는 순간, 숲을 뚫고 와족의 전사들이 난입했다.

마을이 공격받았다는 비보를 들은 그들은 벌게진 눈으로 용병들에게 달려들었다.

“노인과 아이들, 사십여 명을 해친 놈들이다. 타협, 없다. 우리 쓰러질 때까지 죽인다.”

우둔한 땅의 눈에도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힘의 유불리(有不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들을 공격한 이유도 묻지 않는다.

적들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뿐.

용맹한 마음가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실수였다.

우둔한 땅은 중원의 저력을, 그리고 군길산을 너무도 몰랐다.

“거대 문파 장로급을 상회하는 고수라니?”

군길산이 호조에 묻은 긴 코의 피를 털었다.

그는 우둔한 땅을 상세히 훑었고, 탐색을 마친 뒤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수왕 말고도 싸울 줄 아는 놈이 한둘은 있을 줄 알았지. 이놈이 족장이겠구나.”

그래, 이 정도 고수는 나와 줘야 말이 된다.

흑의인이 건넨 의뢰비는 그만큼 막대한 금액이었다.

“상당해. 수왕이란 놈도 그렇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야만 부족이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니. 허나 오늘은 너희가 운이 없구나.”

혈조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자였다.

군길산이 눈짓하자 남상과 그에 필적하는 기운을 지닌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십여 명의 와족 전사들이 용병들과 충돌하는 가운데, 군길산과 세 명의 수하가 우둔한 땅을 둘러쌌다.

“난 확실히 이기는 걸 좋아하거든. 비겁하다고 원망치 말도록.”

우둔한 땅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살의와 분노, 용맹함이 점철된 얼굴로 자연기를 끌어올렸다.

“조잘조잘, 말 많다. 덤벼라.”

키이이잉―!

전투화장이 빛나고, 우둔한 땅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남상과 두 명의 사내가 흠칫했으나, 이어진 군길산의 말에 평정을 찾았다.

“그래. 당연히 숨겨둔 한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어쩌나? 이게 전부면 너 오늘 죽겠는데?”

투콰아아앙!

바위 부수기를 정면에서 받아내며, 군길산이 눈짓했다.

“힘은 엄청나지만, 빠르지 않다. 공격은 내가 상쇄할 테니 등을 찔러라.”

바위 곰의 기예들이 폭발하고, 천둥바위가 공간을 울렸다.

군길산 하나뿐이었다면 좀 더 비등한 대결을 펼쳤을까?

한 가지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은 군길산은 여휘와 같은 반열에 선 강자라는 점이었다.

우둔한 땅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며 바위 곰 전대 수장의 면모를 보였지만, 용맹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심지어 일 대 사.

수하들조차 하나하나가 거대 문파 대주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우둔한 땅의 몸엔 상처가 늘어갔다.

“후욱, 훅….”

결국, 무릎이 꺾이고 만다.

허나 우직한 전사의 눈에선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그의 투지에 군길산 일행이 기가 질려 버렸다.

“이런 미련한……. 승산이 없는 걸 알면서도 죽자고 달려드는 이유가 뭐냐?”

군길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용병들에게 달려든 와족 전사들은 그들의 반려수와 함께 차가운 시체가 된 지 오래였다.

긴 코가 나무를 등진 채 저항 중이었지만, 녀석도 곧 쓰러질 듯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는 군길산으로서는 우둔한 땅과 와족 전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희……. 우릴 공격한 이유, 뭐냐?”

우둔한 땅은 군길산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쳐두었던 질문을 건넸다.

군길산은 뻔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돈이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 그것 외에 일면식도 없는 놈들과 싸울 이유가 뭐가 있겠나?”

일을 마치면 착수금으로 받은 금액만큼이 더 들어온다.

군길산은 기분이 좋아져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렇게 쉬운 일로 떼돈을 벌다니……. 아마 일이 끝나면 수왕이란 놈의 처치 의뢰도 들어오지 않을까?”

“비아… 까지 해칠 생각인가?”

군길산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돈만 주면 당연히. 수왕이란 놈은 한가락 한다고 들었지만, 그래 봤자 혼자가 아니냐? 제아무리 강한 놈도 쪽수를 이길 순 없지. 이번엔 독식할 생각으로 내 휘하의 병력만 데려왔지만, 여의치 않을 땐 연합을 움직이면 그만이야.”

우둔한 땅은 분노와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돈……. 이해 안 된다. 그것, 다른 사람 해칠 만큼 가치 있는지. 왜 거기에 그토록 목을 매는지. 너, 비슷하다. 공지량, 그놈과 같다.”

고작 그 이유였던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자신들을, 힘없는 노인과 아이들을 해친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었나.

군길산은 멍청한 소릴 한다는 표정으로 웃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 말고 사람을 죽일 이유가 있나? 난 모르겠는데? 한데… 공지량? 흠, 그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군길산이 기억을 되짚을 때, 우둔한 땅은 그의 뒤편을 바라봤다.

그리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웃었다.

“내 역할, 끝났다. 두 분의 탐지 범위에 잡힌 이상, 너흰 죽는다.”

“두 분? 탐지 범위?”

그때였다.

군길산의 뒤편, 저 먼 곳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우우우~!”

뒤이어 치솟는 야생의 살기.

군길산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상당하군. 너와 비슷한 힘의 크기가 아닌가. 이런 놈이 또 있었나?”

그는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직접 싸워봤으니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저따위 걸 믿고서….”

“삐아아악―!”

거조의 울음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 느껴진 기운은 군길산을 바짝 긴장하게 했다.

“……뭐냐, 이건? 설마 십좌? 나와 필적하는……. 심지어 완숙함과 노련함이 느껴진다. 수왕 말고도 이런 놈이 있었나?!”

이렇게 둘이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아니, 반려수까지 감안하면 이쪽이 밀릴 수도 있었다.

군길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때, 천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가 터졌다.

“커허허허헝!”

“……?!”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범 하나를 상대하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걸.

하지만 마지막으로 솟구친 기운 때문에 군길산은 앞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이, 이게 뭔…?!”

지형을 갈아엎을 듯한 살기.

마치 용암이 대지를 불태우며 밀려오는 것 같았다.

군길산은 우둘투둘하게 소름이 돋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파르르 떨었다.

우둔한 땅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너희,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 다한다. 후회 없도록. 무슨 짓을 하든 죽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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