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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58화 (358/463)

358화

“저놈들은 뭐냐! 네가 족장이 아니었나?!”

군길산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우둔한 땅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나, 족장이라고 한 적 없다. 그리고 저들도, 족장 아니다.”

“저런 놈들이 족장이 아니라고?”

군길산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지금 말을 주고받는 거인.

그리고 늑대 울음과 함께 달려오는 자만 해도 보기 드문 고수들이 아닌가.

직접 싸워본 결과, 눈앞에 있는 사내는 정파 최고라는 구파일방의 장로 혹은 유서 깊은 문파의 문주 이상 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온 두 명은…!’

비조를 거느린 자.

자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초고수다.

십좌에 필적하는 강자가 운남 오지에 처박혀 있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심지어 범을 반려수로 둔 자는…!

‘못 이겨! 저런 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어떻게 저런 괴물이 존재하는 거지?! 천검이나 패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군길산이 가늠한 너른 하늘은 치밀한 전략과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지 않는 한 비벼볼 수도 없는 괴물이었다.

저런 자가 있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의뢰를 수락하지도 않았으리라.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때, 우둔한 땅이 말을 걸었다.

“내가 보기엔 너, 속았다.”

“……갑자기 뭔 개소리냐? 속다니, 누가? 내가 말이냐?”

우둔한 땅이 잠자코 쳐다보자, 군길산이 웃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헛소리!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누가 나한테 수작질을 건단 말이냐! 네놈이 뭘 모르나 본데, 내가 바로 용병왕이자 십좌의 일인인…!”

우둔한 땅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우릴 아는 자, 극히 드물다. 마을 위치까지 알 정도면 우리의 전력도 안다. 그런데 너한테 말 안 했다. 그럼 일부러 숨긴 거다.”

군길산은 멍한 얼굴이 됐다.

초짜 용병일 때야 뒤통수도 얻어맞고, 사지에 던져진 적도 헤아릴 수 없다.

허나 요화문을 멸문시킨 이후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누군데 감히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떤 미친놈이?

“두 분의 분노, 여기까지 느껴진다. 너희, 우리 식구들 건드렸다. 속았든 그렇지 않든,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너른 하늘과 그믐에 대한 반석 같은 믿음.

용병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우둔한 땅이 끄응, 하며 몸을 일으켰다.

“덤벼라. 너희는 아직 나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피 칠갑을 하고서도 전사의 투혼은 꺾이지 않았다.

주먹을 턱 밑에 붙이고, 몸을 웅크린 그는 부술 수 없는 천년 거암과 같았다.

똥줄이 탄 용병들이 군길산을 바라봤다.

“대, 대장! 빨리 결정을…!”

‘빌어먹을! 결정이고 나발이고…!’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군길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병기 외엔 모두 버려라! 본진까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뛴다! 전부 달렷!”

용병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튀어 나갔다.

군길산은 우둔한 땅을 노려봤지만, 마무리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욕을 뱉으며 몸을 날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남상이 물었다.

“대, 대장! 앞에 매복시킨 이백 명은…?”

“씨팔!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냐! 네가 가서 살릴 게 아니면 닥치고 뛰어!”

군길산은 짜증을 냈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둔한 땅의 말을 곱씹었다.

‘그 시커먼 놈이 나를 속였단 말이냐? 대체 왜?!’

원한이 있는 놈인가?

그래서 막대한 돈을 써가며 날 사지로 밀어 넣었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평생토록 이 짓을 하며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아냐. 날 노린 거라면 다른 방법을 썼을 거다. 꾀어내서 급습을 하든가, 나 하나만을 노린 올가미를 준비했을 거야. 내가 수하들과 움직이게 둘 리도 없고, 돈을 들이부을 필요도 없었어.’

그럼 왜?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의뢰를 한 것인가?

‘……?!’

뇌리를 스친 생각.

군길산이 내린 결론은 한없이 진실에 가까웠다.

“……미끼?!”

“……?”

남상이 발을 놀리다가 돌아봤고, 군길산은 부들부들 떨었다.

“미끼……. 그래, 미끼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우릴 미끼로 던진 거야. 야만인들을 움직이려고!”

“미끼라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대장?”

군길산이 이를 빠드득 갈 때였다.

후미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악…!”

“이, 이놈들! 어떻게 벌써?! 컥…!”

뒤에 처진 용병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육체로 바람처럼 움직이는 자들.

나무표범 전사들이 용병단의 후미에 따라붙었다.

그 중심엔 흉신악살의 얼굴을 한 매서운 눈이 있었다.

“한 놈도 안 놓친다. 네놈들이 운남에서 우릴 떼어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용병들이 무기를 들었지만, 그들은 몸을 돌리자마자 얼굴이 박살 나며 나뒹굴었다.

“벌써 따라왔다고?! 그, 그럼 매복조는?!”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멀리서 비조의 울음과 범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생기가 급격히 꺼지기 시작했다.

너른 하늘과 그믐이 이끄는 와족의 전사들이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우둔한 녀석에게 칼질을 한 게 누구냐? 꼬랑지 만 개처럼 도망치지 말고 덤벼라!”

누구냐고 물었지만, 매서운 눈은 확신하고 있었다.

맨 앞에서 달리며 이쪽을 힐끗거리는 자.

새어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엄청난 강자라는 게 느껴졌다.

허나 군길산은 매서운 눈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무시해라! 계속 달려! 따라잡히면, 그때 가서 싸우는 거다!”

언뜻 들었을 땐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냉혹한 명령인 걸 알 수 있었다.

추격의 끝에 남는 건 볼 것도 없이 군길산일 터였고, 그 말은 수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살아남겠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그의 말을 곱씹을 정신이 있는 자는 없었다.

설령 알아챘더라도 달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른 하늘의 살기를 접한 용병들은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투지마저 앗아가는 압도적인 공포.

그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죽어라 달릴 뿐이었다.

후아아악―!

기어이 ‘그자’가 다가오고야 말았다.

무형의 기운이 덮쳐오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동료들이 죽어 자빠지건 말건 앞만 보고 달리던 자들이 한꺼번에 뒤를 돌아봤다.

“히, 히익…!”

저 멀리, 그늘이 드리운 숲속.

청색의 귀화가 타올랐다.

용병들은 자신이 무인이라는 것도 잊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심지어 무기까지 내버린 채 달리는 자도 있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는 급속도로 거리를 좁혔고, 소름 끼치는 무언가를 뿜어냈다.

쿠아아앙―!

한꺼번에 십여 명의 목숨이 날아갔다.

분노가 집약된 일격은 용병단의 후미를 날려버렸고, 곧바로 또 한번의 공격이 가해졌다.

투콰아앙!

이번엔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퍼런 게 번쩍하는 순간, 또다시 십여 명이 피떡이 되어 나자빠졌다.

중원에서 악명을 떨치는 혈조단(血爪團)이 꽁지가 빠지라 도망만 치다가 괴멸하고 있었다.

“다 왔다! 뒤를 돌아보지 마! 멈추지 말고 계속 뛰엇!”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도 모르겠다.

군길산은 사색이 된 채 달렸고,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번 의뢰를 위해 운남에 설치한 주둔 기지.

백여 명의 예비 병력을 남겨둔 그곳엔 무기부터 식량까지 전투를 위한 물자들이 그득했다.

“멍청한 새끼들아! 뭘 보고만 있나! 당장 가세하지 못해?! 좌우 협격(挾擊)! 준비한 걸 전부 쏟아 부엇!”

군길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예비병들에게 외쳤다.

그들은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금세 눈치를 채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풀어라!”

“후방을 조준해!”

“불붙었으면 명령 기다리지 말고 던졋!”

그물, 투창, 화살, 기름병에 이르기까지…!

백전(百戰)에 대비한 무기들이 하늘을 날았다.

기지로 달려오는 군길산과 패주병(敗走兵), 그 뒤를 쫓는 와족의 전사들.

좌우로 나뉜 예비 병력이 지원사격을 시작할 때였다.

하늘에서 어둠이 내리꽂혔다.

“삐아아아악!”

새카만 날개는 사신의 낫과 같았다.

돌풍과 함께 당도한 올빼미가 예비병의 우익을 휩쓸었다.

뒤이어 거조의 주인이 강림하니, 섬전처럼 뻗어 나간 체술이 용병들의 몸을 분쇄했다.

“어디까지 내빼는 거냐? 당장 나서지 못할까.”

그믐의 음성은 나지막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거미줄처럼 용병들을 옥좼다.

“크아아앙!”

좌익에선 자줏빛의 늑대가 날뛰고 있었다.

매서운 눈은 그의 반려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좌익을 무너뜨렸다.

“우, 우리가 아무것도 못 하고 이토록 무력하게…!”

남상이 턱을 덜덜 떨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본진으로 달려왔는데, 뭘 해보지도 못하고 예비병이 몰살했다.

날고 기는 용병들을 모은 사백의 혈조단이 수십에 불과한 인원에게 전멸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싸워보기라도….”

그랬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몇 명만 빼면 나머지는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 있었다.

영혼까지 불사를 듯한 살기에 위축되는 바람에 손 한번 못 써보고 괴멸한 게 통탄스러웠다.

“남상! 이 멍청한 새끼야! 뭘 멍청히 섰나! 달렷!”

그때, 군길산의 외침이 들렸다.

수하들이 죽어 나가는 데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남상은 혼자 저만치 앞서 있는 군길산을 보며 중얼댔다.

“달리라니? 수하들이 개 박살 나는 게 안 보이오? 어떻게 우리만….”

“이 새끼야! 닥치고 달리란 말이다! 살아야 복수라도 할 것 아니냐!”

“복수….”

그제야 남상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복수라는 단어를 들은 그는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찼다.

군길산과 함께 우둔한 땅을 공격했던 세 명.

부대장에 해당하는 세 사람까지 군길산의 뒤를 쫓자, 용병들은 완전히 전의가 꺾였다.

“대, 대장이… 우릴 버린 거야?”

“씨팔! 원래 저런 새끼였어! 무공이 세고 질 싸움은 벌이질 않으니 들어온 건데, 결국 이렇게…!”

“으아아아! 군길산, 이 개새끼야! 십좌란 새끼가 싸워보지도 않고…!”

사기가 꺾이니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용병들이 내뿜는 절규와 저주, 비명이 난무했다.

허나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

혈조단에게 가족을 잃은 와족 전사들은 동정심 같은 건 느끼지 못했고, 공격을 늦추지도 않았다.

무자비한 살육 끝에 숨이 붙어 있는 용병은 아무도 없었다.

“쫓아라. 도망친 네 명이 놈들의 수장이다.”

너른 하늘이 차갑게 명령했다.

우둔한 땅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는 한 놈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와족의 전사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군길산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혈조단과 와족 전사들이 점으로 보일 만큼 먼 곳.

산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긴 자들이 있었다.

호흡마저 죽은 사람처럼 가라앉힌 그들은 잠행복과 복면까지 검은색 일색이었다.

그중 가장 낮게 호흡하던 자가 눈을 빛냈다.

“그래, 군길산. 최선을 다해 도망쳐야지. 그게 장문인께서 널 선택하신 이유니까.”

응목대주 몽념이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수신호를 보냈다.

“와족이 미끼를 물었다.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주변에 은신해 있던 자들이 흩어졌다.

용병왕을 미끼로 쓸 만큼 대담하게 일을 추진한 자.

공지량의 지령을 받은 몽념이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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