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시시각각 좁혀오는 포위망.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려도 적들을 떨쳐낼 수 없다.
와족은 운남의 지형에 너무도 익숙했고, 자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군길산과 부대장들은 죽을 맛이었다.
“크앙!”
집채만 한 표범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군길산은 쳐다보지도 않고 호조를 휘둘렀다.
추아아악―!
여섯 조각으로 갈린 몸통.
표범은 즉사했고, 뒤를 쫓던 와족 전사 하나가 큰 충격을 받은 듯 휘청대다가 풀썩 쓰러졌다.
그걸 본 매서운 눈이 발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반려수를 물려라!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발톱 같은 무기를 쓰는 놈은 나보다도 강하다! 일반 전사들은 거리를 유지하고 접근하지 말도록!”
전사들은 군길산 일행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포위한 채 서서히 압박했다.
토끼몰이를 하는 듯한 광경.
와족은 지금 용병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포기해라! 너희는 우릴 뿌리치지 못해!”
매서운 눈은 속도를 올렸고, 그들의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충분히 거리를 좁힌 그가 번갯불을 터뜨렸다.
콰아앙―!
돌진기이자 단거리 고속 이동을 위한 기예.
가속도를 등에 업은 매서운 눈이 뒤꿈치를 내리찍었다.
“남상! 숙여라!”
수하들을 버리고 도망칠 만큼 썩어빠진 놈이지만, 실력 하나만은 진짜였다.
군길산은 매서운 눈의 발차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냈고, 반격까지 가했다.
호조가 날아들자 매서운 눈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칫…!”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일반 단원들은 버린 놈이 부대장들만큼은 각별하게 여기는지 날아드는 공세를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다.
초고속 추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군길산과 매서운 눈이 눈부신 공방을 벌였다.
‘젠장! 못 잡는다…!’
매서운 눈이 튕겨져 나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놈을 잡을 수 없다는걸.
뒤따르는 세 놈도 상당하지만, 용병왕이란 놈은 그믐과 일대일로도 붙을 수 있는 강자였다.
‘잠깐! 이쪽으로 가면…!’
평생을 누빈 운남이다.
앞으로 펼쳐질 지형을 떠올린 매서운 눈이 포위망을 조정하여 적들을 몰았다.
“막다른 길로 밀어붙여라! 퇴로가 끊기는 절벽으로 몰아!”
명령 한마디에 진로가 변했다.
양옆에서 달리는 전사들이 숫자로 압박하며 강제로 방향을 틀었고, 군길산은 욕설을 뱉으면서도 와족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삐아아아악!”
마침내 왔다.
어둔 날개의 울음이 들린 순간, 양측의 표정은 극명하게 갈렸다.
와족은 환호한 반면, 혈조단의 인물들은 어느 정도 삶을 체념한 얼굴이었다.
아니, 세 명의 부대장들은 그랬지만 군길산은 도리어 생에 대한 집착을 불태웠다.
“반드시 살아 나간다! 내가 이런 오지에서 죽을 것 같으냐!”
대답은 하늘에서 들려왔다.
“참으로 구차하구나. 차라리 사내답게 싸우다가 죽는 게 어떠냐?”
머리 위.
그믐은 어둔 날개의 발목을 붙잡은 채 날고 있었다.
군길산의 표정이 일그러진 데 반해, 노장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걸 조롱이라고 느꼈는지 군길산이 발작했다.
“으아아아아!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내가! 이 몸이! 네깟 놈들에게 호락호락 죽어줄 것 같으냐!”
그믐이 지그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러냐? 그럼 달리다가 죽어라.”
그믐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사선으로 하강했고, 군길산의 머리통을 향해 올빼미 사냥을 퍼부었다.
“으아아아아!”
군길산은 한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만 돌린 채 미친 듯이 호조를 휘둘렀다.
강철로 만든 호랑이 발톱과 피륙으로 된 올빼미의 발톱이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쩌저저저정! 치징! 파칭―!
중원 한복판이었다면 두고두고 회자될 격전이었다.
와족의 살아 있는 전설과 십좌.
둘은 전력으로 내달리며 자신만의 절기를 펼쳤고, 그곳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 됐다.
투콰캉! 쩌저정― 쾅! 콰캉―!
후폭풍을 이기지 못한 나무들이 터져 나가고, 대지가 푹푹 파였다.
양손을 쓰는 그들의 싸움은 검이나 도, 창 같은 병기들이 따라올 수 없는 극속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둘은 마른 비가 진입한 시간의 차원을 한발 앞서 경험한 극강의 고수들이었다.
“외톨이! 바짝 따라붙어라!”
매서운 눈도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는 뒤로 처진 세 명의 부대장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옆엔 어느새 나타난 자줏빛 늑대가 함께했다.
일대일, 그리고 이 대 삼.
천하 어디를 가도 통용될 만한 고수들이 불꽃 튀는 격전을 벌였다.
후아아악―!
전황이 변한 건 한 남자의 개입 때문이었다.
너른 하늘이 속도를 올려서 따라붙자 군길산 일행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군길산은 그나마 평정을 유지했지만, 다른 세 명은 아니었다.
남상 등은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매서운 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만 끝내자.”
저공에서 펼치는 수평 소낙비.
온몸을 난타당한 부대장 한 명이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크아악…!”
그의 비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줏빛 그림자가 스치며 목을 물어뜯은 것이다.
동맥에서 터져 나온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커, 커억…!”
그는 목을 부여잡고 비틀대다가 처절한 눈빛으로 군길산을 봤다.
숨 돌릴 틈 없는 격전을 벌이던 군길산이 눈살을 찌푸렸고, 강한 힘으로 그믐을 밀어낸 뒤에 그에게 다가갔다.
“대, 대장….”
잘 가라는 인사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군길산의 행동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퍼어어억―!
그는 비틀대는 수하를 냅다 걷어찼다.
사내는 매서운 눈에게 날아갔고, 상상도 못 한 행동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이, 이 무슨…?!”
매서운 눈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는 날아온 사내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군길산을 노려봤다.
허나 놈은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매서운 눈! 조심해라!”
그믐의 다급한 경고.
매서운 눈은 곧바로 몸을 뺐지만, 허를 찔린 상태였고, 상대는 그보다 고수였다.
촤아아악―!
강피가 찢기고, 피가 튀었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면했지만, 상반신이 피로 물들 만큼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크아아앙!”
“개새끼가 어딜 감히…!”
외톨이가 달려들었지만, 군길산은 그마저 격퇴했다.
“상종 못 할 놈이로구나! 어찌 동고동락한 동료를…!”
그믐이 사납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군길산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남상! 자주! 함께 저 늙은이를 친다!”
“허…!”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건 부대장들이었다.
하지만 앞에선 그믐이 노성을 토하고 있었고, 뒤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상과 자주는 극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군길산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쩌저저저정―!
일 대 삼.
놀랍게도 그믐은 밀리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군길산보다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전세가 뒤집히겠지만, 분노한 그믐은 홀로 세 명을 때려눕힐 기세였다.
“빌어먹을! 혈랑조만 있었어도 이깟 늙은이쯤은…!”
공허한 외침이자 비겁한 변명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벼랑 끝까지 밀려 있었고, 항거할 수 없는 절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구나. 아니, 그건 짐승에 대한 모독이겠어. 절대 살려둬서는 안 될 놈이야.”
너른 하늘이 전투에 난입했다.
그러자 강대한 기의 파동이 대기를 밀어젖혔다.
단순한 정권이지만 너른 하늘의 주먹엔 분노가 오롯이 담겨 있었고, 그건 맞받을 수 없는 해일이 되어 용병들을 덮쳤다.
군길산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남상! 자주! 내게 바짝 붙어라!”
“……?!”
촤아아아악―!
혈조난무(血爪亂舞).
군길산이 아껴놓은 최강의 절기가 팔방을 찢어발겼다.
두 명의 부대장을 내부에 두고, 그 외의 모든 걸 갈라버릴 강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믐은 회피를 택했지만, 너른 하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휘, 그 친구보다 못하군. 네놈이 중원 십대 고수의 일인이라고?”
웃기지 말라는 듯한 어투였다.
직접 붙어봤으니 너른 하늘의 판단은 정확할 터였다.
군길산은 ‘혈랑조가 있었다면…!’ 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순정한 정권이 강기의 회오리를 깨부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
군길산이 핏발 선 눈으로 너른 하늘의 팔을 난자했다.
허나 고양이에게 긁힌 것 같은 생채기를 내는 게 전부였고, 주먹은 똑바로 그의 얼굴을 노렸다.
“자주! 날 위해 죽어라!”
군길산은 옆에 있는 부하의 뒷덜미를 잡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자주는 기겁하며 강기를 끌어올렸지만, 그가 버틸 리 없었다.
“군길사아안! 이 개 같은 새…!”
퍼어억!
자주의 몸통이 형체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군길산의 비기와, 자주의 호신강기를 깨부수고도 너른 하늘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군길산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한 쌍의 호조를 겹쳤다.
투콰아아앙!
무기가 박살 나고, 군길산의 양팔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힘에 밀린 군길산과 남상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죽더라도 나의 의지로 죽을 것이다! 너희에게 내 목숨을 줄 것 같으냐!”
악에 받친 고함이었다.
군길산은 멈출 수 있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관성에 몸을 맡기며 절벽을 향해 나아갔다.
“남상! 뛰어라! 차라리 떨어져 죽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하지만 남상에게도 선택권은 없었다.
뛰면 기적이라도 바랄 수 있지만, 여기 남았다간 무조건 죽는다.
그가 이를 질근 깨물 때, 그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뛸 걸 예상 못 했을 것 같으냐? 낚아채라, 어둔 날개.”
“삐아아아악!”
거조가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어둔 날개가 군길산을 낚아채려는 순간, 그는 마지막 남은 수하를 이용했다.
“네겐 조금 미안하구나! 허나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나, 남상!”
남상이 군길산의 의도를 눈치채고 저항했지만, 그가 십좌의 힘을 당할 리 없었다.
남상을 집어던진 군길산이 마지막 힘을 짜내 강기를 날렸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너희에게 죽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해라!”
어둔 날개가 남상의 몸을 쳐내는 순간, 강기가 쇄도했다.
어둔 날개는 기겁하며 날아올랐고, 강기는 애꿎은 남상의 몸만 박살 냈다.
“미끼…! 정체도 밝히지 못하는 놈들에게 이용당하다니 원통하구나!”
이를 가는 와족의 전사들을 보며, 군길산은 웃었다.
“카하하! 내가 그놈들의 뜻대로 훌륭히 놀아났으니 너희도 성치는 않을 것이다! 전부 뒈지길 기도하며 지옥에서 기다리겠다!”
참으로 지독한 놈이었다.
군길산은 끝까지 광인처럼 웃으며 저주를 남겼다.
매서운 눈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내 불찰이요, 형님. 설마 ‘구름 절벽’에서 뛰어내릴 줄이야…….”
너른 하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높이면 나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네 판단은 옳았다. 저놈이 지독한 놈인 거야.”
둘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볼 때, 그믐이 중얼댔다.
“미끼라니? 이용당했다고? 누가 있어 저런 놈을…….”
“열 받으니까 되는 대로 지껄인 거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매서운 눈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믐은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와족의 현 상황을 되짚었다.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 성인 전사들의 대부분은 여기 있고, 청년 전사들은 노을이 쪽으로 집결했을 거야. 우리에겐 재물도 없으니 노릴 만한 게….”
중얼대던 그믐이 멈췄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영묘. 우리에겐 선조를 모신 무덤일 뿐이지만, 거긴 금광이야. 그 사실을 아는 놈이라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하지만 그럴 만한 놈이 없는데…….”
“금광……. 금광? 어? 자, 잠깐…!”
그믐과 매서운 눈은 깨달았다.
완전히 폐인이 돼서 잊었지만, 금광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 놈이 있다는 사실을!
“서, 설마…!”
“맙소사! 짐작이 맞다면 영묘가 문제가 아니다! 여, 여울이가…!”
잠자코 있던 너른 하늘의 고개가 남쪽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