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 * *
나무, 바위가 스쳐 지나고, 깜짝 놀란 동물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너른 하늘의 주위로 지형지물이 환영처럼 휙휙 지나갔다.
그럼에도 그가 영묘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후욱, 훅…! 매서운 눈! 어떻게 된 거냐?!”
영묘의 입구에는 매서운 눈이 앉아 있었다.
가장 빠른 그를 먼저 보내고, 그믐에게 전사들의 인솔을 맡겼다.
그리고 뒤를 따랐다.
헌데…….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거냐?!’
매서운 눈의 망연자실한 얼굴을 보았을 때, 너른 하늘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
매서운 눈은 말없이 영묘의 안을 가리켰다.
직접 들어가 보라는 손짓이었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에는 말 못 할 상실감과 무시무시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설마… 여울이가…….”
너른 하늘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자제해야 한다.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심호흡을 한 그가 영묘의 안으로 들어섰다.
“…….”
너른 하늘은 들어서자마자 말을 잃었다.
동물을 형상화한 목각 인형들.
입구에 있는 그것들이 박살 난 걸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참담했다.
천 년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영묘의 벽화가 엉망진창으로 훼손돼 있었다.
“이… 놈… 들이…!”
검으로 긋고, 권기(拳氣)로 짓뭉갰다.
이까짓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대를 이어 보존해온 유산이 훼손된 건 역사와 정체성을 거세당한 것처럼 뼈아팠다.
‘……괜찮아…! 지금 살아가는 아이의 목숨이 훨씬 귀하다. 제발 무사해다오, 여울아…!’
부질없는 소망이란 걸 안다.
하지만 너른 하늘은 여울이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무사했다면 매서운 눈이 혼자 밖에 나와 앉아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너른 하늘은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널찍한 공간이 나왔을 때, 그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완파된 항아리들과 새하얗게 깔린 가루.
선조들을 모신 유골함이 박살 난 흔적이었다.
“이놈들이이!!!”
이마에 핏줄이 서고, 머리로 피가 쏠린다.
자제력이 뛰어날 뿐,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도 감정에 영향을 받는 건 다를 바 없었다.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 너른 하늘을 멈춰 세운 건 두 가지였다.
‘여울이…!’
첫째는 여울이가 안 보인다는 점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었으며, 혹시라도 그녀를 찾을 단서가 남아 있다면 지워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내 손으로…!’
둘째는 선조들의 유해 때문이었다.
자신이 힘을 방출하면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리라.
그 두 가지 이유로 너른 하늘은 폭발하려는 스스로를 간신히 다잡을 수 있었다.
“후우우….”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킬 때, 매서운 눈이 다가왔다.
“형님. 난 피를 토했소. 가슴을 부여잡고 밖으로 뛰쳐나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 미친놈처럼 기운을 발산하고. 그러다가 엎어져서 오열했소.”
매서운 눈은 겨우 분노를 삭이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현장을 훑어보다가 발견했다.
침입자들이 남긴 흔적을.
“저걸 보십쇼. 놈들이 글귀를 남겨 놓았군요.”
엉망이 된 유골함에 시선을 빼앗겨서 미처 보지 못했다.
선조들이 안치된 공동의 중앙.
바닥에는 피로 쓴 문자가 있었다.
“할아범을 기다려야 할 것 같소. 형님이나 나는 한족의 문자를 읽지 못하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뿌리와 전통에 대한 마음은 깊어지기 마련이다.
지난 삶을 회상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젊은 시절엔 간과했던 점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믐의 분노는 앞선 둘보다 짙었다.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부들부들 떨었고, 유골함이 훼손된 걸 보았을 때 끔찍한 살기를 토했다.
허나 그믐은 너른 하늘과 같은 이유로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했고, 빠르게 상황에 집중했다.
“……납치. 놈들이 여울이를 데려갔다는구나.”
최악의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공지량. 그놈의 짓이 확실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복잡한 지형 때문에 우리 말고 영묘의 위치를 아는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해. 점창과 가까운 관계가 된 뒤에도 여긴 노출하지 않았으니까.”
“동감이오. 한데… 납치라고? 왜 죽이지 않고 납치를?”
매서운 눈이 질문했고, 그믐은 답했다.
“주술사가 한 세대에 한 명뿐이란 걸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그랬듯이 여울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 줄 아는 게야.”
그믐이 말하는 그녀란 잎의 노래 말고는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이 아렸는지 잠시 멈췄던 그가 말을 이었다.
“노리는 건 볼 것도 없이 금광이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영묘가 어떤 장소인지 아는 놈이다. 우리를 없애기 전까지는 여길 차지할 수 없으니 모두 죽이려 들 게야.”
식구가 납치된 이상, 와족은 갈 수밖에 없다.
사람을 중시하고 식구를 끔찍이 아끼는 부족의 특성을 이용한 인질극이었다.
그믐은 피로 쓴 글자를 짚으며 말했다.
“동요하지 마라. 영묘를 뒤집어놓고, 여울이를 납치했으며, 피로 글귀를 써놓은 것……. 전부 우릴 흔들기 위한 수작이다. 이럴수록 냉철해야 하느니.”
당연한 말이다.
너른 하늘과 매서운 눈,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우둔한 땅까지도 모두 이성을 찾은 뒤였다.
평정이 흔들린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면, 자신들이 유골함이 파손될 걸 본 순간에 달려들었어야 했다.
점창과의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한층 노련해지고 냉철해진 와족의 전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납치……. 그래서 그 뒤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할아범?”
“악연을 마무리하자……. 영인(永仁)으로 오라는구나.”
“영인이면…….”
그믐이 북쪽을 바라봤다.
“그래. 사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북쪽 끄트머리다. 운남 땅은 좌우가 북쪽으로 길게 뻗은 데 반해, 중앙 부분은 쑥 들어간 형태야. 그곳에 영인이 있다. 곤명에서 사천으로 이어지는 관도가 이곳을 지나지.”
매서운 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뜬금없이 영인이라니? 혹시… 공지량 말고 다른 놈이 아닐까요? 우리가 모르는 경로로 정보가 새 나갔을 수도 있고, 걷지도 못하는 놈이 농간을 부렸다고 보기에는……. 그리고 일을 벌인다면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대리로 유인하는 게 유리할 텐데, 왜 그런 곳으로…?”
그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글쎄. 사정을 모르니 추측할 방도가 없구나. 허나 공지량 그놈의 짓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든다. 일을 꾸미는 방식이 사 년 전과 너무도 흡사해. 한데 점창에서 완전히 축출된 놈이 어디서 세력을 끌어모은 거지?”
정보가 없으니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공지량이 맞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랴.
여울을 구하고, 이딴 짓을 벌인 놈들을 쓸어버릴 뿐.
너른 하늘이 고개를 돌려서 북서쪽을 바라봤다.
“하얀 깃이 있는 매리설산은 좌측으로 삐죽하게 올라간 북서쪽의 끝……. 영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군요. 노을이 이끄는 청년 전사들이 그리로 갔을 텐데…….”
그믐이 수리의 눈 전사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가장 빠른 반려수를 보내마. 설마 그쪽에 무슨 일이 있진 않겠지. 설령 일이 터지더라도 하얀 깃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산과 걸음이도 함께 있으니 노을이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상황을 설명하고 영인으로 오라고 전하마.”
남은 건 노약자들을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너른 하늘은 혈조단의 습격에서 간신히 몸을 빼냈거나 출타 중이었던 식구들을 모아서 신령목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거기엔 이성을 지닌 짐승들이 있었고, 대망이나 광서우는 몰라도 전상이라면 와족 식구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보살펴줄 테니까.
“그럼 바로 출발하죠.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감히 우리를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노을이 족장으로 선출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던 백여 명의 전사들.
숫자는 적으나 그들은 점창과의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와족 무력의 정수였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전사였으며, 무엇보다 너른 하늘을 필두로 전대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반려수까지 합쳐 이백에 이르는 그들은 세상 어떤 적이 오더라도 깨부술 자신이 있었다.
“잠깐. 혹시 모르니 중원으로 서신을 하나만 띄우자꾸나.”
“……?”
서신이란 말에 매서운 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신이라니? 아, 가을 수리 그 썩을 놈에게 보내는 거요?”
이십여 년 전에 헤어진 친구.
그믐이 아들과 재회한 소식을 들었을 때, 와족 식구들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가을 수리와 동갑내기인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은 특히 그랬다.
일선에서 물러났으니 둘은 조만간 가을 수리를 볼 겸 첫 중원행을 계획 중이었다.
“그래. 유언 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 마라. 정확히는 백강이란 녀석에게 보내는 게다. 아들놈이 몸을 의탁한 녀석인데, 상당하거든. 특히 정보를 다루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지. 그에게 이번 사태를 일으킨 놈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할 생각이다.”
검은 수리 전사가 필기구를 가져오자, 그믐은 빠르게 서신을 써 내려갔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너른 하늘을 힐끗 봤다.
“……소식을 전할 테냐? 이 녀석에게 부탁하면 비아에게도 기별이 갈 거다. 중원에서 가장 빠르다는 개방이나 하오문에 못지않아. 원래 하오문 출신이기도 했고.”
그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백강은 그의 장담대로, 탈퇴가 불가능하다는 하오문에서 몸을 빼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너른 하늘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할아범. 많은 일에 얽혔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도 정신이 없을 겁니다. 비아는 비아 나름의 길을 걷도록 놔두죠. 여긴 우리들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일을 해결하고, 제가 직접 아들놈 얼굴을 보러 올라가렵니다.”
수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장성한 아들.
족장의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 후, 너른 하늘의 가장 큰 낙은 마른 비의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이 걷는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른 비가 자기만의 길을 나아가는 것처럼 자신 또한 주어진 시련을 거뜬히 해결하고 아들을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할 생각이었다.
애비를 놔두고 떠난 여행은 즐거웠느냐고.
남은 여정에는 나도 좀 끼워달라고.
‘기다려라, 비아야. 곧 만나러 가마.’
평생을 동고동락한 식구들과 함께, 너른 하늘이 영묘를 나섰다.
마른 비가 진시황릉을 나와 북쪽으로 향하던 때였고, 노을이 매리설산에 오르기 전 청년 전사들이 모이길 기다리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