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61화 (361/463)

361화

* * *

삐이이익―!

비조의 울음이 창공에 메아리쳤다.

갈색 몸통과 검은색의 날개.

바람에 휘날리는 깃털까지도 늠름한 녀석이었다.

몽골 초원에선 독수리 사냥에 이용되며, 여우는 물론이고 늑대까지도 손쉽게 잡는 상위 포식자, 검독수리였다.

삐아악―!

허공을 맴돌던 검독수리가 길게 포효했다.

그러곤 곧장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상엔 인간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인 도시가 있었고, 미로처럼 얽힌 길과 다채로운 건물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지러운 풍경이건만, 검독수리는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녀석은 거침없이 바람을 갈랐고, 지상이 가까워지자 날개를 펄럭였다.

후아아악―!

급속 낙하에 이은 급제동.

날개에 무리가 갈 만도 한데, 검독수리는 태연했다.

양 날개에 맺힌 푸른 기운 덕분인 듯했다.

번개처럼 내리꽂힌 검독수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뿐하게 착지했는데, 녀석이 내려앉은 곳은 인간의 팔뚝이었다.

날개를 접자마자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엇?! 너 이 녀석! ‘투덜이’가 아니냐?! 이게 얼마 만이지? 날 기억하느냐?”

검독수리를 반겨준 건 가을 수리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검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투덜이는 가을 수리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도 반갑다는 듯이 머리를 비볐다.

‘자연기가 깃든 울음을 듣고 나와 봤는데 부족의 반려수가 맞았어! 이 녀석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심지어 나를 기억하는구나!’

투덜이는 가을 수리보다 서너 살 위인 ‘뭉게구름’의 반려수였다.

그리고 이 녀석의 원래 이름은 투덜이가 아니었다.

특출하게 빠른 비행 속도로 ‘갈색 번개’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멋진 외모와 달리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투덜댔다.

뭉게구름은 귀에 딱지가 앉겠다며 진저리를 쳤고, 우여곡절 끝에 붙게 된 이름이 투덜이였다.

“삐익! 삐빅! 삐아악―!”

얌전히 있던 녀석이 부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표정으로 보아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가출한 철부지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내가 너 때문에 이 짬밥에 똥 빠지게 날아와야겠냐?’

‘왜 살기 좋은 운남을 놔두고 이런 시궁창에서 사는 거야?!’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투덜거리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늘씬하게 뻗은 몸체와 인간의 손가락만 한 발톱.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위용이었지만, 부리를 열며 뺙뺙대는 걸 보고 있자니 수다스러운 암탉을 보는 듯했다.

“허허, 그놈 참! 이십 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구나. 뭉게구름 형님도 여전하시겠지? 나만 너무 많이 변한 건가…….”

가을 수리는 감상에 빠졌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족의 반려수가 날아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리라.

아버지의 전언.

가을 수리가 투덜이의 발목에 묶인 그믐의 서신을 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본 사람은 없겠지?’

자연기까지 운용하며 낙하한 터라 투덜이의 속도는 자신의 눈으로도 포착하기 힘들었다.

굉장한 고수가 아닌 이상 낌새도 못 챘겠지만, 이런 건 앞으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신중하게 마련한 은신처였고, 발각되면 곤란한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부족과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방법도 강구해야겠어!’

백강은 하오문과 연을 끊고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북상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대도시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은밀한 곳에 숨으리라는 예상을 뒤엎는 한 수.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조직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녹여냈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고개를 들자, 주변 건물과 대비되는 화려한 전각이 눈을 사로잡았다.

가을 수리가 있는 곳은 건물 뒤편에 딸린 후원이었으며, 삼 층 전각의 꼭대기에는 도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월루(冬月樓).’

하오문에서 독립한 백강이 자금을 끌어모아 마련한 은신처였다.

그들 조직의 임시 총타였으며, 현재로선 유일한 자금줄이기도 했다.

‘어디, 아버지께서 어떤 소식을 보냈으려나….’

이십 년 사이에 자신만큼이나 많이 변한 아버지.

부자의 정이란 세월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믐이 운남으로 떠나기 전까지 함께한 시간은 가을 수리에게 커다란 충족감을 주었다.

야수들이 날뛰는 사태 때문에 그믐이 운남으로 복귀했지만, 가을 수리는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와 부족의 전사들이라면 그런 건 손쉽게 정리할 테니까.

허나 서신을 읽어 내려갈수록 가을 수리의 표정은 굳었다.

그는 투덜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긴 뒤에 백강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 * *

“금광… 말입니까?”

백강은 놀란 눈치였다.

그믐과 겨울 달을 통해 점창과의 전쟁에 대해선 들었지만, 영묘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백강을 믿지만, 둘은 의도적으로 영묘에 대해선 교묘하게 말을 흐렸다.

가을 수리도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네. 루주님. 정황으로 보아 실각한 점창 장문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모든 게 의문투성이입니다. 폐인이 된 그가 어떻게 힘을 회복한 건지, 세력은 어디서 끌어 모았으며, 자금은 어찌 마련한 건지. 아버지께서 이번 사태의 배후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셨습니다.”

백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차례에 걸쳐 서신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의뢰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노사는 제게 명령을 하셔도 무방한 분입니다. 당장 움직이도록 하지요.”

“하, 하지만 루주님.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저희 상황이….”

급한 마음에 뛰어왔지만, 가을 수리는 뒤늦게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렸다.

하오문은 원한을 잊지 않는 자들이다.

백강의 능력과 기지로 눌러두어 당장은 넘어갔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찾고 있었다.

껄끄러운 관계인 건 하오문만이 아니며, 가장 큰 문제는 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각 성을 살필 인력과 자금도 턱없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이번 일을 조사하려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세인들은 모르지만, 정보를 다루는 자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전통적인 강호 무림의 서열과 위계가 무너져 내렸다.

기괴한 생물이 출몰하고, 기이한 현상들이 목격되며, 백 년간 힘을 축적한 세력들이 물밑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원장은 관망하는 척하지만 무림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마교가 있는 신강 일대는 폭풍전야라 할 수 있다.

세세하게 파고드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백강은 천하 정세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고 과감했다.

“전부 철수시키세요.”

“네… 네?!”

“은혜를 받았다면 갚는 게 도리입니다. 제 식구가 된 두 분과 노사. 와족의 일이 곧 저의 일입니다. 아직은 본루의 힘이 미약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합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운남에 집중합니다.”

“……!”

가을 수리는 감격하여 몸을 떨었다.

말이 쉽지, 이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일까?

운남은 중원과 동떨어진 변방 중의 변방이며, 루에 아무런 이득을 줄 수 없는 곳이다.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인력을 철수시키면 그간의 고생이 전부 허사로 돌아간다.

하지만 백강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운남의 정세는 모르지만, 인접한 사천과 귀주에선 꾸준히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신경을 건드리는 자금의 흐름을 포착했는데…… 여력이 부족해서 캐지 못했죠.”

백강은 중원 남서부의 지도를 펼쳤다.

“모든 인력과 자금을 집중하면 캘 수 있습니다. 삼 일. 세세한 건 불가능하더라도 그 안에 배후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내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루주님.”

가을 수리가 눈을 글썽이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삼 일.

백강은 장담한 대로 삼 일 만에 실마리를 잡아냈다.

집무실에 들어선 가을 수리는 움찔했다.

‘안색이…! 설마 삼 일 동안 주무시지 않은 건가?’

집무실에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는 걸 봤다.

자신 역시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지만, 그건 본인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일처럼 최선을 다하는 백강의 모습에서 가을 수리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오셨어요?”

백강의 옆에는 겨울 달도 있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겨울 달은 그믐의 특훈을 받으며 과거의 상처를 이겨냈고, 이제는 백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돼 있었다.

무력은 물론이거니와 영민한 두뇌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을 척척 해냈다.

최근엔 동월루의 운영까지 도맡았다.

이 기루도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니 겨울 달이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백강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가을 수리를 재촉했다.

어지러운 선과 기호들이 수놓인 중원 남서부의 지도.

가을 수리는 그쪽을 훑었지만, 백강이 짚은 건 전혀 엉뚱한 섬서성 일대였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자금이 운남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총 세 방향으로 나뉘었죠. 하나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미했고, 다른 한쪽은 전체의 삼 할 정도를 차지했습니다. 모든 걸 조사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칠 할에 가까운 자금의 흐름을 역추적 했죠.”

그 결과 다다른 곳이 섬서성이란 뜻이리라.

화산과 종남이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지역이며, 얼마 전 진시황릉이 발굴되어 홍역을 치렀던 곳.

백강은 섬서성에서도 두 곳을 짚었다.

“칠 할의 자금은 섬서에 이르러 또다시 두 곳으로 나뉘었습니다. 여기. 그리고 여기.”

한 곳은 섬서의 중심이자 수도이며, 살막의 근거지였던 서안이었다.

또 한 곳은 화음(華陰).

거대한 물줄기가 지나는 그곳은 온갖 물자들이 유통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서안이면… 수많은 세력이 상존하지만, 멸문해버린 살막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섬서는 구파의 둘이 위치해서 다른 문파들이 기를 못 펴고요. 그리고 화음? 거긴 또 왜….”

가을 수리로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백강은 두 곳을 동시에 짚으며 말했다.

“둘을 따로 떼어놓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곳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을 안다면 답이 나오죠.”

“실질적인 지배? 그런… 자들이 있습니까?”

확신에 찬 백강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흑상. 중원의 지하 상계를 독점한 암상인들입니다. 세인들은 만금당이 천하 상계의 삼 분의 일을 좌지우지한다고 말하죠. 틀린 말입니다. 양지에선 그렇지만, 음지까지 계산에 넣으면 달라지죠. 현 시점에서, 단언컨대 흑상의 자금력은 만금당을 뛰어넘습니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일개 암상인 집단이 그렇게까지 거대할 수 있다니.

그것 역시 원의 치세와 연관되어 있었다.

양지의 상인들이 원 황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지하에 숨어든 흑상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를 불렸으니까.

“흑상 총단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만한 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걸.”

백강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튀어 나왔다.

“흑전대(黑戰隊).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흑상을 수호하는 무력 집단입니다. 그들의 전력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절대 약할 리 없죠. 흑상을 위협하는 자들을 처단하고,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그들이….”

백강은 서안에서 출발하여 운남으로 이어지는 선을 그렸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남으로 이동한 흔적을 포착했습니다.”

“그럴 수가…!”

가을 수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 백강이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게 가볍지 않은 사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노사께서는 언급하시지 않았지만, 흑상이 개입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곧장 북쪽으로 사람을 파견했죠.”

“북쪽이라고요? 북쪽에 누가 있길래….”

백강은 가을 수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수왕. 그에게 운남으로 귀환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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